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마탑주-335화 (335/337)

나 혼자만 마탑주 335화

Epilogue 1

유신이 사라진 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수십억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기반시설들이 파괴당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잡초처럼 일어섰다. 어쨌든, 살아가야 했으니까.

인류는 재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균열 현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지만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학자들은 빠르면 5년 안에 균열 현상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이에 따라 자연히 헌터들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각성자들도 이제는 헌터라는 직업에 목을 매지 않고 각자의 일을 찾았다.

사회가 돌아가고, 경제가 살아났다.

사람들은 재앙에서 해방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물론.

"후우, 하아."

여전히 강해지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붉은 머리의 여자.

바로 전 협회장 홍연이었다.

"안녕! 딱 맞춰 왔지?"

홍연이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는데,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홍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진보라 헌터! 이렇게 자주 안 오셔도 되는데……"

"아, 진짜. 아카데미 동긴데 언제까지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래?"

진보라가 투덜거리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됐고, 고단백질 식단으로 도시락 만들어 왔으니까 좀 먹어."

"아,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진보라는 그녀의 상태를 구석구석 살피더니 말했다.

"어휴, 다크서클에 살 빠진 것 좀 봐. 제발 쉬어가면서 해."

진보라의 핀잔에 홍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선배에게 목숨을 빚져서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배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데 저 혼자 맘 편히 쉴 순 없어요."

"……맨날 그 소리라니까."

그 말대로, 지난 1년 동안 홍연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빠르게 음식을 입에 넣는 그녀를 보며 진보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꼭 여자 김유신 같네."

그 말에 빵 터진 홍연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명예로운 별명은 아니네요."

"아하하!"

그래도 유신을 구한다고 저렇게 열심히 하니까 진보라도 정성을 다해 홍연을 서포트해 주고 있었다.

"멤버들 이야기나 좀 해주세요."

"음, 그럴까?"

유신은 사라졌지만, 어떻게든 세상은 굴러 갔다.

다음 마탑주가 된 정서진은 조직을 빠르게 수습했다.

사라진 마탑 대신 상계동에 커다란 타워 빌딩을 세우고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엔 안드로이드 아담을 기반으로 헌터들을 대체 하는 몬스터 방위체제를 구축해 가는 중이다.

은솔은 평범한 또래 아이들처럼 학창 생활로 돌아갔다.

유신 외에는 삐딱하게 굴던 그녀가 최근엔 친구들도 많이 사귄 모양인지, 해변이나 카니발랜드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들을 자주 진보라에게 보내오곤 했다.

하예린은 천공성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키워가면서 마인 잔당 사냥에 힘을 쓰고 있다. 현재는 정서진의 허락을 받아 세계길드에 도전하고 있다.

사미아는 탄자니아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워프게이트 사업을 진두지휘 했다. 그리고 마탑 그룹 내의 차세대 주력 사업체인 '게이트'의 대표가 됐다. 그녀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일에 보람과 사명감을 느끼는 듯했다.

차도연은 공인 2급으로 진급했으며, 이제는 마법부장관을 넘어 최초의 마법사 출신 차기 협회장 진급을 앞두고 있다.

파라오 한윤정은 아프리카 정벌을 그만두고 대대적인 아프리카 재건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명실상부 '인류 최강'이 된 그녀가 미국과 중국의 독선을 견제하며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가람 매니지먼트의 대표인 신나라는 헌터들의 재교육 시스템을 운영중이다. 몬스터들의 위협이 줄어든 만큼, 은퇴하는 헌터들이 버젓한 직장을 가지고 사회로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렇게 다들 각자의 일상을 충실히 살고 있었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하는 소리가 있었다.

-허전해요.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아.

전원의 상실감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게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진보라는 갑자기 분위기가 처지는 걸 느끼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서클은 어때?"

"이제 6서클이에요."

1년 만에 6서클 도달, 전 세계의 마법사들은 홍연을 보며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왜 이제야 마법을 배웠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성취는 대단했다.

"하지만 역시 창조는 어렵네요."

진보라는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지는 마나 부스러기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7서클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밥 먹으면서도 연습이라니…….

"다른 마법사들이 존경스러워질 정도예요. 수호자 특성도 없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재능충은 영원히 이해 못 할걸."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으며 여러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김유신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 같은 화제를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지 대화가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남편분은요?"

우아하게 이야기하던 진보라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 새끼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기분 잡치니까."

"……아하하."

홍연이 땀을 삐질 흘리며 웃었다.

"아무튼 정말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이제 올라가 볼게요."

"소화도 좀 하고 그래."

"훈련을 시작하면 소화가 되니까요."

진보라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홍연은 다시 계단을 걸어 훈련장을 올라갔다.

넓고 방음이 되는 공간에 수 많은 마법 훈련 도구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바닥 매트릭스에 대자로 뻗은 채로 잠든 여자가 보였다. 홍연이 다가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선생님. 훈련 시간입니다."

"어, 으응?"

여자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으으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6서클에 도달한 현세대 최강의 마법사'. 공인 1급 김사랑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도 진짜 독종이다. 인간적으로 쫌 쉬자니까. 그러다 골병들어."

"오늘 강습비 150% 인상해 드리겠습니다."

"시작하시죠, 제자님."

김사랑이 빛의 속도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러다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들었는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젠 마법사로서도 네가 더 강하잖아. 내 도움이 왜 그렇게 필요한건데?"

"제 보조를 맞춰줄 수 있는 건 선생님뿐이니까요."

"이럴 때만 비행기 태워준다니까."

김사랑이 쓴웃음을 흘리며 두 팔을 세웠다.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시작하자."

"네!"

지옥과도 같은 단련의 나날이 계속 되었다.

홍연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적광기 마저 버렸다.

"실패야 다시!"

죽을 만큼 노력했다.

1분 1초도 헛되이 쓰지 않았다.

낮에는 훈련.

밤에는 7서클의 힌트를 얻기 위해 스스로 인스턴스 레퀴엠을 사용해서 의식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8서클의 '혼돈'그것만이 유신이 온몸으로 봉인한 네메시스를 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신은 그녀가 성장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셈이었다.

거기에 이런 사태를 대비했던 유신은 2층 대서재의 자료들을 빼서 아케인에 보관해 두었고, 자신이 직접 쓴 '마법의 정석 개정판'까지 남겼다.

홍연은 손때가 묻어 책이 덕지덕지 해질 때까지 보고 또 보고 깨달음을 갈구했다. 수호자의 능력을 써도 이루기 벅찬 경지였지만, 그녀는 포기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수개월이 더 흘러. 홍연은 마침내 '혼돈'을 쓸 수 있는 8서클 마법사가 되었다.

좋아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집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헌터 슈트를 입고, 소드 디바이스를 허리에 찼다.

"연아."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는 뒤늦게 휠체어를 탄 홍율을 발견했다.

"아, 언니! 언제 집에 왔어요?"

"어제 잠깐 들렸지."

언니를 보는 홍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내 달려가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요 쪼그만 게 언니 얼굴도 안 보고 아등바등. 그래, 이제 다 끝났어?"

"네. 이제 8서클 마법을 쓸 수 있어요."

그녀가 홍연의 등을 토닥였다.

"유신이 기다리겠다. 빨랑 가서 우리 김 서방 데려와야지?"

"……."

홍연이 눈가를 슥슥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그리고 언제나 고마워요."

그녀는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마탑 그룹의 '게이트' 본사.

2층 대서재뿐만 아니라 5층 차원관의 기술과 시설도 한국에 옮겨졌다.

현재 게이트는 수입이 줄어든 알케미아의 대 안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20여 국에 워프게이트를 시범 운행하고 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하니 연락을 받은 사미아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홍연 헌터."

"잘 지내셨어요? 공주님."

"그 호칭은 언제쯤 그만둬 줄 텐가."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으며 걸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시설 하나를 통째로 개조해서 만든 초대형 워프게이트 앞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계로 갈수 있는 수단이다."

사미아는 그렇게 설명하며 목걸이 형태의 아티팩트를 홍연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건 뭔가요?"

"김유신 헌터의 목에도 걸려 있는 차원 좌표 수신기. 이 워프게이트를 타면 차원 수신기끼리 반응해서 해당 위치로 유도하는 원리다."

홍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사미아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인가? 한번 워프하면 마탑의 전이 프로토콜 없이는 돌아올 수 없다. 아니, 그전에 워프가 100% 성공하란 법도 없고, 마탑이 있는 세계로 이동하리란 것도 보장할 수 없어. 영원히 우주에서 떠도는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알고 있어요."

그녀가 결연한 눈으로 사미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도 저는 가겠습니다."

"…… 알겠다."

사미아도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전기로 지시를 내리자 워프게이트에 불이 들어오며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시작됐다. 홍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워프 앞에 섰다. 사미아가 입에서 무전기를 떼며 말했다.

"이렇게 나만 배웅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시끌벅적하게 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가 사미아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무사하거라. 홍연 헌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워프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 * *

우주 간 워프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추상화를 연상케 하는 색깔들이 바스러진 공간에서, 좁고 무한한 파이프에 갇혀 영원히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끝은 있었다. 파이프의 끝, 눈부신 광휘가 향하는 곳으로 그녀의 몸이 빠져나왔다.

'…….'

서서히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살아 있는 걸 보니 워프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눈을 뜬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밤인지 하늘은 어두웠고, 주위에는 뭔가 집 같은 것들이 불타고 있었다.

원래 이 세계의 집들은 불이 붙은게 보통일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불타는 사람들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앞을 보았다.

"……."

"……."

날붙이를 든 이상한 생물들이 보였다. 가는 팔다리에 배는 움푹 튀어나왔고 뒤에는 올챙이 같은 꼬리가 달려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번엔 인간들이 보인다. 피부색이나 눈동자 색깔이 조금 달랐지만 확실히 인간이었다.

홍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여기는……"

"꺄아아아아아악!"

말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홍연이 당황해서 팔을 뻗자 놀란 사람들은 담장 밑에 숨거나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기 바빴다.

"@*#$!"

"#%$&*[email protected]&*!"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했지만 이어마이크의 통역기능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귀에서 이어마이크를 빼품에 넣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앞으로 나온 중년 남자가 밧줄로 만든 올가미를 던졌다. 그것은 정확히 홍연의 두 팔을 꽉 조이며 바닥에 넘어뜨렸다.

"……?"

홍연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눈을 깜빡였다.

순수하게 놀랐다.

올가미라니. 이게 언제적 무기일까.

"$%@#!"

남자가 팔을 번쩍 들자 사람들도 환호했다.

그때 뒤에 있던 고블린 닮은 생명체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검을 뽑았다. 인간들은 위협을 느꼈는지 물러섰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올가미에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그대로 매듭이 풀렸다.

'확실히 이 세계에도 마나는 존재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바닥에 마법진을 펼치고 발로 밟았다.

<가이아>

쿠구구구구구!

인간들과 괴물들이 대치한 사이로 바닥이 기둥처럼 솟구쳤다.

놀라 자빠지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마법은 흔한 힘이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혼비백산하며 흩어진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산으로 도망쳤다.

겁먹어서 눈물까지 펑펑 흘리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괴물들을 쫓아낸 홍연이 다시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홍연은 말을 멈추고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

그리고 자신을 끔찍한 외계생명체 바라보듯 하는 얼굴.

그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외부인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터, 여기서는 물러나 주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마을 밖을 향해 걸었다.

모두가 숨죽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얼른 이곳에서 떠나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

그때 마을 아이가 홍연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어른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렸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고 홍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그녀도 쪼그려 앉아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아이가 품에 폭 안겼다. 홍연은 잠깐 놀라다가도 웃으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계어 특성을 얻었습니다.]

"! #[email protected]고마r&@."

이제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 * *

마을 사람들로부터 얻은 책자들로 언어와 기본 상식을 익혔다. 홍연의 학습력은 이계에도 제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이름은 메디움(Medium).

살고 있는 종족은 인간과 마수.

지구에서 네메시스를 막아낸 덕분일까, 다행스럽게 메디움에서는 재앙과 균열은 존재하지 않았다.

몬스터가 있기는 했지만 지구처럼 이계에서 넘어온 경우가 아니라, 마나에 심취해서 퇴화해 버린 마수들의 집합이었다.

메디움은 행성 전체가 하나의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륙 내부에 네 개의 바다가 존재한다. 3개 제국과 22개 왕국이 기묘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대륙이지만, 사실 행성의 크기는 지구보다 더 컸다. 강행군이 예상되었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평생을 돌아다녀도 못 찾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유신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여자 혼자 숲을 돌아다녀? 이건 뭐 노예로 삼아달란 뜻이지?

-여자랑은 재수 없어서 거래 안해.

-미천한 평민 따위가 감히!

인권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

하수도가 발달하지 않아 도시 길 바닥에 분뇨가 가득했고, 툭하면 돌림병이 도는 등 위생관념도 낮았다.

북쪽에는 증기기관이 극도로 발달해서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왕국도 있다고 들었지만, 메디움의 기술 및 문화 평균은 전반적으로 지구의 중세 수준이었다.

그런 메디움에서 여자 혼자 여행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홍연은 숱한 트러블에 휘말렸다.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보란 듯이.

[100년 전쟁 종결!]

[악질 슬레브 공작 사망!]

[드래곤 슬레이어 탄생!]

[벨제불 마수 진형 초토화!]

다 부수고 나갔다.

-강하다!

-우리들의 족장이 되어달라!

마수들이 우두머리 자리를 내놓거나.

-그대는 앞으로 정령의 영원한 친구다.

정령왕을 만나거나.

-황제 폐하께서 백작령을 내리셨습니다.

심지어는 직위까지 받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유신을 찾는데 필요한 것들만 취했다.

이 세계는 넓었지만, 정보가 느렸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신문도 잘 보급되지 않았다.

발이 불어 터질 정도로 걸었다. 밤에는 몬스터의 습격 때문에 불도 못피우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뜬 눈으로 잠이 들어야 했다.

아무리 홍연이라고 해도 긴 야영생활은 버티기 힘들 만큼 괴로웠다.

몇 번이고 쓰러지고 기절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힘든 건 참을 수 있다. 그녀의 유일한 걱정은 이 메디움이 유신이 내려온 세계가 아닐까 하는 염려뿐이었다.

가끔 이 하늘 아래에 유신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녀는 지독한 고독감에 몸서리쳐야 했다.

"……선배."

그녀는 간이 천 텐트 안에서 입김을 뿜으며 힘들게 구한 지도에 체크표시를 했다.

지도를 든 손가락은 온통 면 반창고로 둘둘 감겨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아!"

차가운 칼바람 때문에 천 텐트가 찢어졌고,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지도가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안돼!"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맨발로 뛰쳐나갔다. 밤바람이 너무 강했고 숲은 울창했다. 그리고 어둠 때문에 주위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눈에 마력을 집중하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달렸다.

"하아! 하아!"

차디찬 바닥 때문에 발에는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 온몸이 날카로운 가시나무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부우우우웅!

기척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할버드가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자르며 지나갔다.

푸욱!

그리고 쇄도해 온 화살 한 발이 허벅지에 박혔다. 다리가 붉게 물들며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찾았다. 귀여운 아가씨."

어둠 속에서, 갈색 수염을 기른 우락부락한 남자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저게 지도라고 생각해서 덤벼들려고 했지만.

"아가씨에겐 별 원한은 없지만 돈은 필요하거든."

남자는 종이를 돌려서 그녀에게 보였다. 지도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이 나와 있는 현상수배지였다.

"높으신 분들이 아가씨 목에 억대의 현상금을 걸었어. 어련히 원한이 많았나 봐. 그러게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조용히 지냈으면……"

"제발."

그녀가 앞을 막고 있는 산적 떼를 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보내주세요. 부탁이에요."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돈이 필요하다니까!"

그 말을 신호로 사방에 매복해 있던 산적들이 뛰어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홍연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비켜어어어어어!"

세상은 낮처럼 하얗게 세었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날 밤.

산적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칼라고와 그가 이끄는 도적 무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칼라고에게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에 환호하며 홍연을 맞이 하러 떠났다.

"감사합니다! 붉은 머리의 용사님!"

촌장이 고개를 연신 숙이며 말했다.

"덕분에 우리 마을이 산적들의 횡포에서 벗어났습니다. 부디 보은 하게 해주시면……"

홍연은 온몸이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채 바닥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그러다 눈물이 마른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도와주세요."

"예, 예?"

"지도, 지도를 찾아야 해요."

촌장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 사람들을 총동원해 숲을 뒤지게 했다.

"어, 이거 아니에요?"

그때 한 청년이 바닥에 떨어져 흙이 묻은 종이를 흔들었다. 그 말을 들은 홍연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

틀림없다.

그녀의 지도가 맞았다.

"찾으시는 게 이거 맞죠?"

"……감사합니다!"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지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울먹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머리를 긁적였고, 마을 사람들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소문도 있더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평생 이해 못하겠지."

마을 사람들 몇몇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거나 담요를 덮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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