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33화
7공정 마법의 연계 이후 둠스데이로 마무리. 인간이든 마인이든 생명체라면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망할!'
유신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붉은 섬광이 번뜩이는 모습이 보인다.
몇 번을 그렇게 좌우로 점멸하던 붉은 섬광이 이내 긴 꼬리가 되어 빛의 속도로 내려왔다.
그러곤 틀어박히는 대못처럼 지면에 내려꽂혔다.
"허억!"
"큭!"
헌터들이 딛고 있는 바닥 전체가 사각형 모양으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모두 피해!
지면이 무너져 내리고 적광기가 마그마처럼 뿜어나왔다.
유신도 윙골렘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그때.
[마탑주는 뭔가 다르긴 하네.]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홍율의 몸이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적광기를 한껏 머금은 주먹이 소름끼치는 궤적을 그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약해.]
까아아아아아아앙!
네메시스가 주먹을 뻗는 것과 동시에 홍연이 바람처럼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불똥이 튀며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이기고 말겠습니다!"
홍연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넌 안 될 텐데? 같은 힘으로 내가 밀릴 리가 없잖아.]
홍연이 문답 무용으로 검을 휘둘렀고, 네메시스 또한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팔다리를 뻗었다.
충격파만으로 지면이 박살 나고 대기가 찢어지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신은 지상에 착지해 숨을 골랐다.
방금의 무리한 연속 7공정으로 청의가 벗겨지며 마에스터 상태가 해제되었다.
'아직도 반응이 없어.'
유신은 네메시스의 상태를 살피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에아. 이제 다른 방법이 없어. 내 앞에 이계정원을 소환해 줘.'
에아는 바로 유신의 생각을 읽고 말했다.
-하지만 탑주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혼돈계 마법에 성공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유신은 씩 웃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아마도.'
결국 에아가 8공정의 이계정원으로 만든 공간을 꺼냈다. 유신의 앞에 작은 공간만큼 하얀 백사장이 생겼다.
"후우우."
유신은 심호흡을 하며 이계의 내부와 밖에 마법진을 그려놓고 조작했다. 그러자 마력의 손이 튀어나와 이계를 움켜쥐었다.
수 많은 연구 끝에, 유신이 꼽은 네메시스를 물리칠 수 있는 두 가지핵심.
혼돈, 그리고 타이탄.
혼돈은 네메시스를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타이탄은 네메시스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그중 첫 번째인 혼돈. 이 마법을 익히려면 아무리 천재인 유신이라고 해도 최소 2년은 필요했다. 유신에겐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이런 도박수밖에 남지 않았다.
'시도라도……'
마력으로 움켜쥔 이계정원이 작은 크기로 압축된다. 이내 공처럼 줄어들더니 그 속에서 '치이이이' 소리를 내며 녹 같은 게 흘러내린다.
혼돈을 사용하려면 '세계'하나를 희생해야만 한다. 세계를 무너뜨리고,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인 빅뱅 상태로 되돌린다.
그래서 유신은 8층 이계정원을 날려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마탑에서 전해 내려오던 층 하나가 날아가는 거였고, 다른 선배들을 볼 면목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유신은 더 강한 힘으로 이계를 움켜쥐었다.
'한계까지 압축시킨다!'
이계를 파괴해서 나오는 혼돈을 사용하면 수호자가 아니라도 네메시스를 세상에서 없앨 수 있다.
네메시스는 유신이 수상쩍은 시도를 하는 것을 캐치했지만, 홍연이 이를 악물고 막아내고 있었다.
[귀찮구나.]
네메시스가 다량의 적광기를 폭발시켜 검을 맞대고 있던 홍연을 날려버렸다.
이내 빠르게 유신과의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뻗으려는 순간.
쿵!
거대한 방패가 네메시스의 전면을 막아 세웠다.
공인 1급, 레이더가 방패 디바이스를 앞세운 것이다.
"이지스 전개."
방패의 중심으로부터 마력이 퍼져나가며 방패가 이질적인 외형의 성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신의 심판>
하늘에서 루치아의 신성력 십자가가 떨어져 네메시스의 몸을 고정시켰다.
<하이브 텐타클>
샴이 내뿜는 마나 촉수들이 네메시스를 휘감았다.
뒤이어 저격수 헌터들의 마력탄들이 날아왔지만, 네메시스는 그 모든 공격들을 무시하고 힘으로 십자가와 촉수를 적광기로 치우며 팔을 뻗었다.
꾸웅!
적색의 파장이 레이더의 성문에 직격했다.
"커헉!"
레이더가 피를 토했다.
SS급 유물인 이지스가 실시간으로 금이 가고 있었다.
"물러서."
그때 하늘에서 소름 끼치는 회색태양이 떠올랐다.
<델타포스>
유령왕 마리가 두 팔을 내리자 소울오러의 집합체가 네메시스를 덮쳤다. 폭음과 함께 루치아와 샴이 뒤로 물러났다.
"제발 좀 쓰러져라!"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이 무색하게, 아직도 폭발 속에서 적광기가 일렁이는 모습이 보인다. 소울오러로도 네메시스의 마력을 다 태우지 못한 것이다.
<메렛세게르>
그때 하늘로 올라간 파라오 한윤정이 두 팔을 펼쳤다.
주위의 대기에서 초대량의 모래들이 쏟아져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네메시스의 몸을 뒤덮었다. 그러곤 일순 팽창하며 길이 수백 미터의 피라미드를 형성했다.
피라미드의 끝부분이 불룩거리며 뭔가가 올라오는 듯싶더니 네메시스의 머리가 툭 튀어나왔다.
[이것들이 감히……!]
격분한 네메시스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자신을 가둔 피라미드와 똑같은 크기의 피라미드가 역으로 뒤집힌 채 떨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두 개의 피라미드가 꼭짓점에서 만나며, 모래시계의 형태가 되었다.
양쪽 피라미드의 모래가 고속순환하며 일종의 조류를 형성해 밸런스를 맞추고 있다.
단순히 힘만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모래 늪이다.
네메시스를 붙잡는데 성공한 한윤정이 마력을 더 끌어올렸다. 허공의 모래들이 병장구들로 모습을 바꾸어 모래시계의 중앙 부분을 거침없이 찌르고 베기 시작했다.
"노, 놈을 잡았다!"
"역시 파라오!"
한윤정의 이마에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진작 한계에 달해 있었지만 그녀는 마나 고갈까지 각오하고 움직이는 모래 병장구의 수를 다섯 배로 늘렸다.
[그런 장난감으로 뭘 할 수 있는데?]
퍼어어엉!
위쪽 피라미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네메시스의 주먹이 보였지만, 금방 모래가 뒤덮었다.
퍼어엉! 퍼어엉! 퍼어어엉!
뒤이어 피라미드에 연달아 구멍이 뚫리며 순환하는 모래 조류의 밸런스가 무너졌다.
자연히 피라미드의 내구력이 약해졌고, 이내 네메시스가 적광기를 폭발시켜 피라미드를 통째로 무너뜨리며 빠져나왔다.
"망할!"
한윤정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쪽으로 간다! 김유신을 지켜!"
헌터들이 헌팅 디바이스를 들고 네메시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휘두른 검은 적광기에 닿자 사탕처럼 부서지고,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헌터 한 명이 고깃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막을 수가 없었다.
까아아아아앙!
그나마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한사람.
홍연이 휘두른 검은 네메시스라고 해도 두 팔을 세워서 막아내야 했다.
[끈질긴 것!]
"못 간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공수를 주고 받는다. 대기가 울부짖고 지면이 크레바스처럼 갈라진다.
헌터들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홍연을 서포트해!
-다시 한번!
그렇게 모두가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사이, 유신은 극도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얼추 됐어.'
이계를 극한으로 압축시키고 붕괴시켜서 서서히 빅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상태를 확장시키고 네메시스에게 꽂아 넣으면, 그녀를 죽일수 있다.
"커흑!"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네메시스의 발에 걷어차인 홍연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네메시스가 마법을 준비 중인 유신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덥석!
다리를 강하게 붙드는 손길에 네메시스가 뒤를 돌아봤다.
홍연이 바닥에 누운 채로 네메시스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못…… 갑니다!"
[이게!]
홍연이 반대쪽 손으로 검을 휘둘렀고 네메시스도 팔을 들어 막았다.
"흐읍!"
하늘로 날아오른 샴이 두 팔을 교차했다. 그녀의 등에서 솟구친 거대집게팔이 네메시스를 찍어눌렀다.
퍼어어어억!
동시에 네메시스의 적광기가 샴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을 냈다. 그녀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 새끼가아아아아아!"
마력이 고갈된 한윤정이 직접 모래창을 들고 내질렀다. 네메시스는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피해내며 파리 쫓듯 팔을 휘둘렀다.
붉은빛이 번쩍이더니 창을 쥔 그녀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아흑!"
한윤정이 바닥을 구르고 이번에는 루치아의 마차와 왕야의 코끼리 가 들이닥쳤다.
[작작해!]
처절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전투였다. 마력이 떨어진 헌터들이 이제는 자신의 몸으로 시간을 벌고 있었다.
한 명을 죽이면 또 한 명이 나타났고, 그 한 명을 죽이면 줄줄이 목숨을 내밀며 뛰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아아아아아아!"
오뚝이처럼 일어선 홍연이 악귀 들린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중간에서 네메시스의 주먹과 검이 맞닿자, 결국 한계에 다다른 그녀의 소드 디바이스가 산산조각이 났다. 어떤 무기든 적광기에 오래 노출되면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네메시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주먹을 뻗는 그때.
쩌억
아래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얼굴을 얻어맞은 네메시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다리를 내린 홍연이 이번에는 주먹을 뻗어왔다.
'검이 없으면 맨손이라도!'
뻐억!
네메시스가 가드를 올려 공격을 받았다.
묵직했다. 방어를 했는데도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지면에 맞닿은 다리가 살짝 뜰 정도였다.
"하아아아아아!"
울부짖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며 홍연이 연타를 퍼부었다. 네메시스는 팔을 뻗어 날아오는 주먹을 쳐내고 무릎을 세워 발차기를 막는 등 방어에 급급했다.
당혹스러웠다.
검을 버리니 공세가 더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적광기의 양은 여전히 네메시스가 압도적이다. 지면을 디딘 발에 순간적으로 힘을 가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부우우우우우웅!
대기를 찢고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날아오는 주먹을, 홍연은 고개를 꺾은 채로 네메시스에게 바짝 붙어 피해냈다.
그대로 턱을 향해 어퍼컷. 망치로 대못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버텨낸 네메시스가 반대쪽 팔로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보다 빠르게 홍연의 브라질리언 킥이 머리에 꽂히며 다시 밸런스를 무너뜨린다.
[감히!]
네메시스와 홍연은 템포를 점점 더 끌어올렸다. 두 팔과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가며 거친 스파크를 튀겼다.
이제 두 사람은 방어도 포기했다.
철저한 공격 일변도. 상대의 공격을 몸으로 얻어맞으면서 공격을 가했다.
쩍!
그런데.
까득!
홍연이 더 앞서기 시작했다.
뻐억! 팍! 으적!
홍연의 속도가 점점 더 올라가자 네메시스는 경악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네메시스의 전투 스타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수호자아아아아아!]
쩌어어어어어억!
홍연의 주먹이 내리꽂히며 네메시스의 턱이 돌아갔다. 어느새 홍연의 몸에는 적광기와는 다른, 하얀 아우라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유신이 8층 시련에서 봤던 바로 그 각성 상태.
격분한 네메시스가 아예 도망가지도 못하도록 홍연의 어깨를 짓누르며 주먹을 당겼지만 홍연은 당돌하게 뛰어들어 주먹을 내지르지 못할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쩌어어어억!
이번에는 박치기.
마치 날아오듯 거리를 좁혀 상대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순간 네메시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주홍빛이 금빛이 되었다가 다시 주홍빛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캐치한 유신이 이어마이크로 말했다.
-연아, 내 말 잘 들어.
유신의 이야기를 들은 홍연의 동공이 커졌다.
[가증스러운 것들!]
격분한 네메시스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화아아아아악!
초대량의 적광기가 허공에 집결하며 일렁이는 태풍의 핵으로 변했다.
이에 홍연은 맨손으로 검을 쥐는 시늉을 했다.
우우우우웅!
적광기가 응집되며 검의 형상으로 길어졌다.
네메시스의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홍연은 입술을 깨물고 검을 휘둘렀다.
<적무>
그 어떤 소리와 흔적도 남기지 않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일격이 세상을 양단했다.
네메시스의 기술이 반으로 갈라진다.
[크윽!]
두 팔로 가드자세를 취했지만 네메시스의 팔에 커다란 흠집이 생겼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붉은 연기를 뚫고 들이닥친 홍연이 주먹을 뻗었다.
[건방지이이이이인!]
기다리고 있었다. 네메시스가 팔에 두른 적광기를 폭발시켜 최고 속도의 주먹을 내질렀다.
홍연보다 더 빠르게.
스륵.
그때 홍연의 몸이 주먹을 회수하며 몸을 낮추었다.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극단적으로 아래로 내려간다.
네메시스의 팔은 부우웅!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다.
[……!]
완벽한 공격찬스.
상체를 위로 쭉 세워 올린 홍연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내뻗는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휘몰아친 적광기가 네메시스의 안면에 꽂혔다. 그녀가 피를 왈칵 토하며 지면에 처박혀 나뒹굴었다.
모든 힘을 다 쥐어 짜낸 홍연은 주먹을 날리자마자 바닥에 엎어져거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끝이다.]
쓰러진 네메시스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외부로 움직이는 마력을 느낀 홍연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피해요 선배!"
어느새 유신의 머리 위로 검은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생체 반응이 전혀 없던, 네메시스의 시체가 일어나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앱솔루트 배리어>
터어어어어엉!
간발의 차이로 배리어를 펼쳐냈지만 집중력이 흔들렸다.
유신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혼돈을 만들어내기 직전까지 갔던 마법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흩어지고 있었다.
"……아."
[하하하하하!]
네메시스가 마침내 승리감을 만끽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와장창창!
주위의 세계가 파편처럼 깨져 나갔다. 그리고 밖에 대기하고 있던 울티오류 몬스터들이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네메시스를 겨누고 있던 헌터들이 뒤를 돌아보며 무기를 쥐었다.
[이제 일말의 희망도 없어. 너희는 전원 여기서 사라진다.]
유신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선배!"
홍연이 다급히 뛰어와 유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유신을 먼저 노리려던 네메시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제 됐어요! 선배는 할 만큼 했어요! 돌아가서 휴식을……!"
"아직 최후의 수단이 남았어."
유신은 스펙터를 손 안으로 전이해서 바닥에 박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달달 떨리는 무릎을 세우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아 스펙터의 겉면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아잘 들어."
언제 어디서 네메시스가 뛰어들지 몰랐기에, 그녀는 유신을 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얼마나 괴로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내가 타이탄이 되어 싸울 거야."
"아, 안돼요!"
그녀가 물기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절대 안돼요! 제발 그건!"
유신은 슥슥 손가락을 움직여 '인체 시술 타이탄' 마법을 스펙터에 그려서 완성시켰다.
그러곤 스펙터를 양손으로 붙잡고 들어서 가슴에 댈 준비를 했다.
"내가 해야만 해."
"제발! 선배!"
홍연이 울먹이며 애원했다.
네메시스는 이제 다시 여흥을 즐기듯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자세만 낮추고 있었다. 어차피 홍연을 힘으론 뚫지 못하니 상황을 지켜볼 심산인 것 같았다.
유신이 가슴을 향해 스펙터를 내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안돼애애애애!"
슈슉!
그리고, 유신의 손에서 스펙터가 사라졌다.
"나 참."
어느새 스펙터는 쭉 뻗은 네메시스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기다리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변조된 네메시스의 음성이 아닌, 깨끗한 목소리였다.
[뭐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이번엔 네메시스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몸을 흔들며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네메시스는 전투 중이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동자 색깔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금빛이었다.
[어, 어떻게? 내가 몸을 장악했어! 이런 건 불가능할……!]
"뭐가 불가능해 이 븅딱년아."
다시 목소리가 바뀐 그녀가 팔을 내려서 스펙터를 가슴에 댔다.
"수고했다, 유신아. 그리고."
홍율이 빙그레 웃었다.
"연아."
스펙터에 새겨졌던 타이탄 마법진이 그녀의 몸으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