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29화
"사미아, 시작하세요."
우우우우우우웅!
허공에 푸른 호수 같은 커다란 워프게이트가 열렸다.
그 안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하예린의 천공성이었다.
-아저씨이이이!
바람을 가르며 솟아오른 성에서 하예린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유신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어요?
"응, 멀쩡해."
쿵! 쿵! 쿵! 쿵!
이번엔 반대편에서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루즈만 한 소라 껍질을 짊어진 괴물 소라게가 무수한 다리를 움직이며 워프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사자선단의 기동요새인 '쉘터'다.
-공인 2급 샴과 사자선단 전원, 전선에 합류한다.
쉘터가 움직임을 멈추고, 소라 껍데기 위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여인이 지상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다시 함께 싸우게 되어서 영광이다. 마탑주."
훈장이 주렁주렁 매달린 해군 제복을 차려 입은 그녀는 제독이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샴이었다. 그녀가 이어마이크에 손을 내리며 유신과 악수했다.
"못 본 사이 또 바뀌셨네요."
유신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젊은 20대 여성의 모습이었는데, 그녀는 다시 원래의 나이인 60대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나이를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이번에는 유신의 머리 위에서 워프게이트가 열리더니, 중세시대를 연상케 하는 회색빛의 낡은 범선이 하늘을 날아올랐다.
-공인 2급 마리 골드 및 유령대원 1, 000명, 공략대에 합류했어.
유령왕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김유신.
"와줘서 고마워. 마리."
유령선의 뱃머리에서 마리가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히이이이이잉!
갑자기 말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두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가 유신의 앞에 멈추고, 그 안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순백의 성의를 입었고 십자가 목걸이를 메고 있었다.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성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아크 비숍 루치아라고 합니다."
그녀가 치마 끝을 살짝 잡고 인사를 올렸다.
"아, 마르첼로 후임이에요?"
"예. 미약하지만 그분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분 덕분에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성기사단."
루치아의 등장과 함께 창공을 수 백기가 넘는 백색 헬기들이 뒤덮었다. 성기사단이 자랑하는 첨단 공중전력들이다.
그리고 하나 더.
-비켜어어어어!
유신이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대뜸 커다란 모래 피라미드가 뚝 떨어지고 있었다.
쿠우우우우우우웅!
주위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온 피라미드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잘 맞춘 퍼즐처럼 벽들이 갈라지거나 조립되면서 공간이 드러났고, 그 공간마다 앉아 있던 묘지기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서는 아누비스 동상과 유적들이 올라왔고, 모래 관이 열리며 그 안에서도 묘지기들이 몸을 일으켰다.
촤르르륵!
가리고 가장 중앙, 흙의 커튼이 아래로 걷히고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드높은 계단의 꼭대기에는 모래 옥좌에 다리를 꼬고 앉은 파라오가 있었다.
-공인 1급 파라오 메네스 외 묘지기 3천 명 전원 합류!
유신은 속으로 웃었다. 한윤정은 계단에서 뛰어내려 모래 양탄자를 타고 유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저런 연출 하느라 연습 많이 했겠다."
"입 다물어!"
그때 뒤쪽에서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니 봉인 마법진에 붙잡힌 총통이 웃고 있었다.
[왔느냐, 증오스러운 세계길드!]
"저 용대가리는 뭐야?"
한윤정이 물었다.
"총통이야. 아직도 살아 있더라고."
"엥? 저게?"
총통이 비웃음 띤 미소를 흘렸다.
[그래, 그래. 마탑에 세계길드. 딱 그 정도가 네 인맥으로 끌어올 수 있는 최선이겠지. 하지만 봐라! 이제 또 누가 오고 있지?]
확실히 세계길드의 등장 이후, 워프게이트는 계속 열려 있었지만 들어오는 헌터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세계는 움직이지 않아. 미국 부통령, BHL회장, 1급 4위 에스퍼, 연맹 군사령관까지! 이 세상에 마인이 관여하지 않은 곳은 없고, 모든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얽혀 있다!]
익숙한 사람들까지 총통의 입에서 나오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우리의 방해공작이 아니더라도 인류는 결국 그 정도밖에 안돼. 지금은 탑의 총공세가 벌어지고 있다. 당장 자국민들이 학살당하고 있고, 헌터가 더 없이 부족한 상황에, 과연 누가 0%에 가까운 가능성을 믿고 지옥에 제 발을 들이려고 할까?]
'에아.'
유신은 덤덤하게 에아를 불렀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발표해.'
* * *
서울시 성동구 제7 지하 대피소.
어둡고, 습기 차며, 곰팡이 냄새가 나는 대피소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찬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쿠우웅!
천장에서 소리가 들리자 대피소 곳곳에서 놀란 비명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은 위에서 무슨 소리만 들리기만 해도 공포에 질리곤 했다.
몬스터의 활동성이 강해지는 밤이 되면 소리는 더 강하게 들렸다. 킁킁거리며 인간의 냄새를 맡는 소리, 파박거리며 땅을 파는 소리까지.
혹시나 이곳을 찾아 내지 않을까.
사람들은 노심초사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지독한 공포 속에서 버텨야만 했다.
"……."
천장을 불안한 눈으로 응시하던 한 소년은 배식받은 빵을 한입 깨물었다. 돌처럼 딱딱했지만 침을 섞어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소년의 대피소 생활은 최악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엄마는 공포에 점점 미쳐가더니, 결국 소년의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목을 매달았다.
아빠는 배식을 받으러 간다며 떠난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하 대피소의 다른 사람들도 소년의 엄마 아빠처럼 미쳐가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했다. 본능적으로, 내키는 대로, 당장 내일 죽을 사람처럼 행동했다.
소년의 맞은편에는 한 남녀가 달뜬 소리를 흘리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어린 소년이 근처에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몇몇 젊은 남녀들은 눈만 마주치면 서로 껴안고 스킨십했다.
"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겁니다! 믿어야 살아남습니다! 자, 다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복도 너머 방에서는 예배가 한창이었다.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 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보면 예배 중인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았다.
인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대재앙의 공포에,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사이비도 있었다. 스스로를 목사라고 자청한 남자가 헌금 시간이라며 비닐봉투를 들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유일한 한 끼인 빵과 음식을 기꺼이 비닐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신께 살려달라며 빌었다.
"야, 안 비켜?"
"어린놈의 새끼가 뒈질라고."
반대편에서는 거친 목소리들이 들렸다.
두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하루에 몇 번이고 싸움이 일어난다. 중년 남자가 상대를 바닥에 넘어뜨리고는 돌을 들어 이마를 찍어댔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다들 그저 죽은 눈으로 싸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이 희망을 잃고 생을 포기한 사람들.
이젠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시체인지 자고 있는 사람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딜 봐도 암흑뿐이다.
소년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자신의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그리고 지하네트워크의 소식란으로 넘어갔다.
혹시나 좋은 소식이 있을까 봐. 혹시나 인류가 이겨서 언젠가 여기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소식이 있었다.
[예언 능력자 오라클 10분 후 중대발표!]
[100% 적중률 오라클의 마지막 예언 10분 뒤 전 세계 동시 공개!]
대피소 사람들에게도 소문이 퍼졌는지, 다들 웅성거리며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과연 이 끔찍한 생활 끝의 결말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긴 10분이 지나고.
오라클의 메시지가 발표했다.
"뭐야 이게?"
소년 옆자리의 아줌마가 휴대전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을 보라고?"
* * *
예언 능력자 오라클.
네메시스가 일어나기 전, 정부와 협회는 대규모 의무 피난 계획을 발표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하로 밀어 넣는 이유가 한 예언쟁이의 예언이라는 사실 때문이라는 놀랐고.
전 세계가 똑같이 그러고 있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예언? 그딴 비과학적 근거 때문에 사람들을 지하에 밀어 넣겠다고?]
[샤머니즘 정치냐ㅋㅋㅋㅋ]
[세상 진짜 미쳐 돌아간다.]
당연히 불만과 비난이 쏟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세계 연맹과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들은 당혹스러울만큼 오라클의 말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사실 누구보다 오라클을 부정하던게 바로 연맹 및 각국 상층부였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오라클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고,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헌터계의 오라클 의존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근래세계의 재앙 및 이상 현상 피해가 큰 폭으로 줄어든 것도 모두 오라클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라클 프로젝트를 진행한 유신은 개인적인 이유로 이 힘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라클을 쓰면 더 쉽게 일을 해결할 일도 많이 있었지만, 철저히 중립을 고수했고, 객관적인 정보만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유신의 뒤를 이어 마탑주 자리에 오른 나대용 또한 오라클만큼은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그 또한 오라클의 순수성을 지켜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오라클은 이 지구상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오라클은 직접 움직이진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해낸 플레이어였으며, 인류의 구세주였다.
그 오라클이 최후의 예언을 발표한다는 소식에 전 세계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슬슬 오라클이 발표할 때 아닌가?"
"난 그냥 왔어. 봐도 기분만 꿀꿀할 것 같아서."
신대륙에 와 있는 헌터들도 그 이슈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예언 내용을 못보고 왔네."
한윤정도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녀마저도 오라클의 정체에 대해선 모르고 있다.
유신은 휴대전화를 들고 뭔가를 확인하는 척하며 말했다.
"방금 내용 떴는데."
"아, 통신 되는 거야? 뭐래 뭐래?"
유신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늘을 보라는데."
"……응?"
그 말에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지하에 숨어 있는 사람들 또한 영상으로 하늘을 보고 있으리라.
그러나 하늘에 보이는 건 냉정하고 끔찍한 현실.
[5, 781, 909, 322 -> 1, 000, 000, 000]
[00: 00: 00]
붉은 글씨로 쓰인 종말을 알리는 카운트다운뿐이다.
"저게 뭐 어쨌다는…… 어?"
"글자가 바뀐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바로 이때, 끔찍한 카운트다운 위를 선명한 청색 글씨가 덧칠했다.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는 가운데 유신만이 입꼬리를 올렸다.
바로 지금.
오라클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다.
지금 이 한 순간을 위해.
수년간 힘겹게 유지해 온 순수성을 깨뜨릴 것이다.
"저건……!"
필드마법으로 하늘에 그린다.
오라클로서 하는 마지막 예언.
그것은 바로.
[Humans will survive.]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아아! 아아아아아!"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일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얼굴이 시뻘게진 헌터들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울먹거리고, 얼싸안고,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로 들어 올렸다.
환호는 거대한 울림이 되어 바이러스처럼 다른 헌터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늘을 본 총통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인간들이 저딴 소릴 믿을 것 같냐!]
유신은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 점이다.
사람들은 의심할 것이다.
오라클의 예언 능력은 진짜인가?
그리고 진짜라고 한들, 오라클은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 걸까?
오라클이 멸망의 미래를 봤어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혹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끝없이 의심할 것이다.
-공인 1급, 가브리엘 공략대에 합류한다.
바로 그렇기에.
-공인 2급하인스 외 미군 10만 합류.
잠깐이라도 희망을 느낀 사람들은 고민할 것이다.
-공인 1급 왕야와 7개 매니지먼트 합류했습니다.
저 오라클의 예언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떻게 해야 승산이 있는지.
지금, 어디로 와야 할지.
우우우우우웅!
하늘이 파랗게 물든다. 수천 개가 넘는 워프게이트들이 열리고, 그곳을 통해 전 세계의 헌터들이 신대륙에 집결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미국의 기동 전함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독일의 마력 전차와 러시아의 기계화 보병들까지 등장했다.
그야말로 세상에 더 없이 전율적인 광경. 헌터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저벅. 저벅.
공인 1급 가브리엘이 포탈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흐흐! 흐흐흐흐!"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그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곤 검지를 하늘로 치켜세우더니 목대에 핏줄을 세우며 외쳤다.
"Humans!"
주위의 헌터들이 팔을 높게 들어올리며 후창했다.
"will survive!!!"
울부짖고, 환호하며, 결의를 다진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가자!"
"할 수 있다!"
"아직 안 끝났어!"
"네메시스의 죽음을!"
공인 3급 이상의 헌터 전력만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인류의 공략대.
1차 공략대 10만.
2차 공략대 15만.
그리고 지금 이 신대륙에 모이는 공략대의 수는.
도합 10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이……!]
총통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창백해져 있었다. 유신은 쪼그려 앉아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씩 웃었다.
"미안하지만, 총통."
그러곤 천천히 스펙터를 그의 심장한가운데에 꽂아 넣었다.
"우리는 이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