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28화
결국 총사령관 유신을 제외한 2차 공략대가 출범했다. 각국의 헌터들은 텔레포트 능력자들의 도움으로 자국으로 돌아갔고 빠르게 2차 공략대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상황의 급박함 때문에 연맹은 각국의 파견 병력에 간섭하지 않았다. 믿고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총장님! 마탑으로 부터의 연락입니다."
"말해."
필이 책상 앞에 쌓아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서류를 살피는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탑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각 공략대 함선에 워프게이트 마법진 설치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필은 서류를 내리며 장교를 바라보았다.
"그게 끝인가? 총사령관을 끝까지 믿지 못한 내게 유감의 표명 같은건?"
"요청사항이 전부였습니다."
필은 복잡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워프게이트 설치는 허가한다. 마탑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예."
장교가 돌아가고 필은 다음 서류를 펼쳤다. 이번에는 영국의 공략대 리스트 차례였다. 숫자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 다시금 진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이것들이 진짜 장난하나.'
이번 2차 공략대는 미국과 중국 등, 1차 공략대에 빠졌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공략대에 비해 병력 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기존의 공략대 국가들이 오히려 파견 병력을 줄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네메시스 공략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안위가 확보된 뒤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마음이 안 맞아서야.'
보고서를 보는 필의 주름은 깊어져만 갔다.
"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그때 지휘통제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또 다른 장교가 뛰어나왔다.
"왜 그래?"
"죄송합니다. 하늘을 좀 봐주십시오!"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필이 서둘러 그를 따라 뛰어가 창밖을 응시했다.
하늘에 붉은 글씨의 카운트다운이 보였다.
[6, 000, 000, 000 : 5, 000, 000, 000]
[15:22:48]
'평소와 다를 게 없지 않나?'라고 생각하던 필은 깜짝 놀랐다.
'분'에 위치한 숫자가 거의 초 단위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초' 단위의 숫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러면 설마……'
장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장님. 3차 총공세까지 15분 남았습니다."
쾅!
필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차서 박살 냈다. 쌓여 있던 서류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어째서? 왜!"
분노를 토해내던 필은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 붉은 카운트다운은 재앙과 함께 시작됐다. 정말로 저 이상현상이 네메시스가 만든 카운트다운이라면.
재앙은 굳이 인간과의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다.
카운트다운은 기만책.
저 숫자를 절대적인 수치로 생각해서는 안 됐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의 필이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준비된 공략대 함대부터 집결지로 이동하라고 해!"
"총장님! 영국에서 공략대 파견을 유예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페루에서 파견 중지 요청을……!"
바로 꼬리를 말아버리는 가맹국들의 모습에 필은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이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연맹이 호구로 보이나. 나한테 전화돌려!"
필은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분투했다. 일단은 공략대 준비를 마친 함대들을 집결지로 오도록 이끄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탈은 막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은 가맹국들이 자국 보호로 돌아섰다.
"하아아아."
답답했다. 너무나도 답답했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그가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6, 000, 000, 000 : 5, 000, 000, 000]
[00:12:27]
"이제 시작이군."
"12초 남았습니다."
연맹 장교들도 긴장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카운트다운이 모두 끝나고.
"……어?"
"뭐, 뭐야?"
하늘을 보는 필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6, 000, 000, 000> 1, 000, 000, 000]
[00: 00: 00]
70억, 60억 다음에는 바로 10억.
"……10억이 남을 때까지 다 죽이겠다고?"
네메시스가 본색을 드러냈다.
최후의 재앙은 바로 여기서, 인류의 근본까지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총장님! 대기권에서 다수의 탑들을 관측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필이 다급히 모니터 앞으로 뛰어들어갔다. 레이더로 대기권을 표시하는 지점에서 무수한 검은 선들이 보였다.
"이게 다 심판의 탑인가?"
"예! 추정 숫자 500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건 악몽이었다.
벌컥!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한 헌터가 지휘통제실에 들이닥쳤다.
그는 신속한 동작으로 슈퍼컴퓨터에 꽂혀 있는 USB 디바이스들을 회수하더니, 대뜸 필을 어깨에 들쳐메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자네 지금 뭐 하는……!"
"죄송합니다! 꽉 잡으십시오!"
헌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휘통제실을 달려서 유리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와장창!
졸지에 헌터에게 들쳐 메진 채로 깨져 나가는 유리 파편들을 응시하던 필은 이제야 목격했다.
본부 건물에 떨어지고 있는 거대한 단색의 탑을.
그것은 건물 꼭대기부터 부수며 들어갔다. 철근 건물이 종이모형처럼 으적거리며 무너지고, 뒤이어 그가 방금 있던 지휘통제실까지 탑에 짓눌려 파괴됐다.
잠시 후, 건물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오며, 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무전기에서는 연신 보고가 흘러나왔다.
-미국 헥사곤에 심판의 탑 낙하! 사망자 최소 3천 명 이상 추정!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에 탑이 떨어졌다! 300만 거주자 총대피령 발령!
-런던의 타워브릿지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 * *
유신은 여전히 8공정 이계를 몸에 두른 채 걷고 있었다.
이제 며칠을 걸었는지, 몇 시간을 걸었는지 세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의식세계에 빠진 채로, 무상무념의 경지에서 걸었다.
가끔 의식세계에서 빠져나올 때는 식사할 때 정도, 대충 초콜릿바나 영양제 등을 쑤셔놓고 다시 의식세계에 들어갔다. 마나와 정신력은 아끼면 아낄수록 좋았다.
"자, 기반 수식은 이렇게!"
의식세계에서, 유신은 심심풀이 삼아 동료들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뚱뚱한 아기'와 '몸이 갈라진 남자'가 쭈뼛거리며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깔면 나중에 마나가 흐를 때 저항이 생겨. 여기선 회로를 분산해서 이렇게……"
쿠우우웅!
갑자기 주위가 크게 흔들리며 유신의 의식세계가 흐릿해졌다.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탑주! 큰일 났습니다!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나와주세요! 당장!
에아의 목소리가 급박해 보였기에, 유신은 즉시 인스턴스 라퀴엠을 해제하고 의식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시야가 돌아오고 새까만 공간이 보였다.
'8공정을 둘렀는데 어떻게 공격한거지?'
우선은 몸에 두른 세계를 갈라서 바깥의 시야를 확보했다.
누군가 있었다.
[찾았다.]
사람의 몸에 용의 머리가 달린 남자. 크기가 무척이나 줄어들고 왜소해졌지만, 유신은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목을 떨어뜨렸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한심하긴, 날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하지 마라.]
총통은 암흑 마력을 다룬다.
어떤 물리적 힘도 베타적 세계에 간섭할 수 없지만, 공간의 힘을 가진 암흑계라면 이계에 충격을 주는 정도는 가능했다.
"뭐, 좋아."
유신은 순순히 이계에서 벗어나 지구로 빠져나왔다. 어차피 네메시스와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슬슬 나오려던 참이었다.
밀집지역을 벗어났는지 주위에 몬스터들도 듬성듬성 있는 게 괜찮은 조건이다.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총통이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여전히 재수 없는 면상이라고 유신은 생각했다.
[덤벼라. 전엔 방심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달라?"
순식간에 데바스타를 밟은 유신이 총통의 후면으로 파고들었다. 총통이 반응하는 것보다 빠르게, 유신의 다리가 뒤통수에 닿았다.
쩍!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커헉!]
"뭐가 다른데?"
쓰러진 총통의 뒤통수를 짓밟은 유신이, 오른발에 마법진을 연달아 시전했다.
<데바스타>×5
콰콰콰콰쾅!
지면에 거대한 구덩이가 겹겹이 만들어졌다. 총통은 피를 토하며 축늘어졌다.
"뭣도 아닌 게 자꾸 깝쳐."
총통의 머리를 한 번 더 짓밟은 유신이 발을 뗐다.
[……널 끌어냈으니 이제 내 역할은 완수했다.]
고개를 든 총통이 음흉하게 웃었다.
[네메시스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있고, 이 대륙에는 500만이 넘는 7랭크 몬스터들이 존재한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계획도 이제 끝이다!]
"준비됐지? 에아."
-네, 탑주.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유신은 고개를 돌렸다.
"잘 봐둬."
원격시전으로 총통의 가슴에 봉인마법진을 그려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유신은, 체내의 마력을 외부로 끌어올렸다.
유신은 세 가지 이계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 첫 번째, 8층 이계정원으로 만들어낸 결계를 펼쳤다.
주위가 새하얀 백사장으로 바뀌며 키 높은 야자수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쏴아아 하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까지.
전쟁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평화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이계정원이 신대륙에 펼쳐지는 것으로, 신대륙에 자욱한 보랏빛 대기는 바깥으로 밀려났다.
[……이게 뭘 어쨌단 거지?]
유신은 바닥에 유도 마법진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는 특별한 수식을 쓰는 위치 좌표가 적용돼."
정서진이 대서재에서 에렌델의 기록을 기반으로 위치 좌표를 따고, 그것을 마나 좌표로 계산해 지구에 적용시키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유신은 지금 이 세계의 위치 좌표를 계산해서 에아에게 알려주었다.
에아는 다시 5층팀에게 좌표를 넘겼다.
-탑주. 마탑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계정원은 5분을 유지하는 게 한계입니다.
'그 정도면 차고 넘쳐.'
유신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바닥의 마법진이 눈부신 광채를 흩뿌렸다.
-마탑 전이, 개시합니다.
이내 마법진의 위로, 일렁이는 그림자 같은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네놈 설마……!]
그것은 거대한 탑의 형상이었다.
몬스터들의 땅인 이 신대륙에 깃발을 꽂아 넣듯, 우뚝 솟은 마탑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유신이 집중력을 해제하자 백사장이 사라지며 다시 보랏빛 대기가 주위를 뒤덮였다.
물론 마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하하하하하!]
총통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네 직속 부하들을 불러들인 그 정도가 한계겠지! 하지만 신세계의 몬스터는 500만이다! 마탑의 전력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거 성격 급하시네. 이건 밑 작업일 뿐이야."
이제 유신이 가진 두 번째 세계가 발동한다.
마탑 내부에 적용되는 '시간의 세계'가 외부까지 확장하며, 푸른 막이 신대륙의 보랏빛 대기를 밀어내고 펼쳐졌다.
유신이 가진 가장 안정적이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세계다. 이공간 모두 마탑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으로 대규모 워프의 준비가 전부 끝났다. 유신은 이어마이크를 붙잡고 말했다.
"사미아,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