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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27화 (327/337)

나 혼자만 마탑주 327화

유신은 신대륙을 걷고 있었다.

갈증도 피곤함도 잊은 지 오래.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8공정에 도달한 유신은 현재 세가지의 '이계'를 보유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제8층, 이계정원으로 만들어낸 낸 세계.

두 번째는 마탑 내부에 적용된 시간의 세계.

마지막 세 번째 번째는, 유신이 직접 8공정으로 만들어내는 고유한 공간.

자신과 대상 하나를 제외하고 그외엔 모든 것을 지워 버리는 공백의 세계.

동시에 8공정이 가지는 베타적 성향을 극대화시켜 그 무엇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침의 세계이기도 했다.

유신은 이 불가침의 세계를 극도로 줄여 자신의 몸만 간신히 덮을 정도로 만들었고, 이 상태를 유지하며 걸었다.

이게 바로 신대륙을 건너는 유신만의 방법이었다.

-크르르르!

신대륙의 고랭크 몬스터들도 유신을 어쩌질 못했다. 눈으로 보이는 거리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유신과 몬스터들은 엄연히 다른 세계에 있었다.

물론 8공정 마법을 오랜 시간 유지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기에, 유신은 한 가지 묘책을 냈다.

바로 8공정 마법을 유지하고 걷는 동안 의식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레퀴엠' 마법을 인스턴스 버전으로 개발해서 스스로에게 적용시켰다.

신대륙을 걷고 있는 유신의 눈은 흐리멍덩하고, 초점이 없었지만.

"아, 이거 재밌네!"

사실은 의식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소파 위에 편안히 누워 있는 그는,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벅벅 긁었고 다른 한 손엔 리모컨을 들었다.

TV에는 유신의 과거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아, 저때 프로스트를 더 두들겨 팼어야 했는데!"

TV를 보던 유신의 옆으로, 피부에 풀이 자란 여인이 과일을 깎아서 가져왔다.

"고마워."

유신의 주위에는 동료들이 각자 편안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노파'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황금빛 머리를 정성껏 정돈하고 있었고, '뚱뚱한 아기'는 양손에 든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몸뚱이가 갈라진 남자'와 '목이 떨어진 남자'는 바닥에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제 목이 떨어진 남자의 목은 다시 원래대로 붙어 있었는데, 그 대신 머리에 기계관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쿠우웅!

"우왓!"

갑자기 방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의식세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액자나 선반의 책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유신은 소파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야야."

몸을 일으킨 유신이 민망한 듯 웃었다.

"다들 미안해. 또 어디 걸려 넘어졌나 봐."

동료들이 유쾌하게 웃었다. '머리에 관을 쓴 남자'는 이기고 있는 카드게임을 망쳤다며 화를 냈지만 다들 크게 신경은 쓰지 않는 눈치였다.

유신은 다시 소파 위로 올라갔다.

"어, 벌써 끝났네. 그럼 다음은 힐러 연합 편으로……"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신은 '아 참!' 하고 무릎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자, 애들아 주목! 새로운 친구를 소개할게."

문이 열리며 '잿더미가 된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렸고 하얀 눈구덩이 두 개만 뚫려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랑 쭉 같이 지낼 친구야. 싸우지 말고 잘 지내줬으면 좋겠어. 자, 박수!"

동료들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잿더미가 된 남자는 부끄럼을 타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모두에게 공손히 고개숙여 인사했다.

소개를 끝낸 유신은 다시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을 들었다.

-탑주.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세계에서 에아의 목소리는 마치 스피커처럼 방안에 윙윙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응, 에아. 듣고 있어."

-……여기가 탑주의 의식세계인겁니까?

"보다시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수년간…….

유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도 처음엔 어색해서 고생 좀 했는데. 읏차!"

유신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고깃덩이를 주워서 뒤로 휙 던졌다.'뚱뚱한 아기'가 돌고래처럼 펄쩍 뛰어올라 고깃덩이를 입에 물었다.

"여기도 적응하니까 지낼 만 해. 애들도 착하고."

-……힘내주십시오.

"밖은 어때?"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 * *

[6, 000, 000, 000 : 6, 000, 000, 000]

[49: 59: 59]

다시 10억이 죽었다.

수일간의 지독했던 2차 공세가 끝나고, 50시간의 유예가 주어졌다.

사무총장 필은 세계 유력인사들이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대책 회의를 열었다.

2차 공세가 워낙 지독했기 때문에, 전 세계가 공략대에 뜨거운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텔레포트 능력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스위스로 관계자들을 실어날랐다.

회의 구성원은 각국의 협회장들, 공인 1급 헌터, 글로벌 매니지먼트회장들과 국방부장관들까지.

내로라 하는 인사들이 전부 모였지만 하나같이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니, 이럴 거면 왜 그때 공략대를 해산시킨 거야?"

공인 1급의 프란츠가 목소리를 높였다.

"계획대로 출발했으면 지금쯤 네메시스 잡고 집에서 쉬고 있겠네!"

"그건 너무 지나친 낙관론 아닌가요?"

공인 2급이자 바티칸의 아크 비숍, 루치아가 입을 열었다.

"미국, 중국이 빠진 쥐꼬리만 한 병력으로 신대륙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허무하게 병력을 날리는 것보단, 차라리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지금이 낫죠."

"지레 겁먹어서 시도조차 안 한 게 문제다."

공인 1급 왕야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총사령관의 공략대 해산은 경솔한 판단이었어."

"아, 경솔이고 자시고 게임이 안된다잖아! 똥을 꼭 찍어 먹어봐야 맛을 아냐?"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파라오 한윤정이 눈을 부라렸다.

"신대륙은 7랭크 이상 몬스터만 500만이야. 그때 병력만으로 돌파해봐야 개죽음일 뿐이라고."

"천하의 파라오도 팔은 안으로 굽네. 같은 세계길드라 그런가."

왕야의 일침에 그녀가 킥 웃음을 터뜨렸다.

"3:1로 깨졌다고 김유신 까대는 속좁은 누구보단 낫지."

"그 소리가 지금 왜……!"

"그만!"

벼락같은 외침에 장내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중간에 떡 하니 자리 잡은 산만한 덩치의 헌터, 가브리엘 가르시아 로드리게스가 눈을 치켜떴다.

"우리끼리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돌려 사무총장필을 바라보았다.

"회의 속행하게."

"감사합니다."

필이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2차 공략대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더 불어 김유신 총사령관의 계획도 알려드리겠습니다."

필은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총사령관이 공략대를 해산시킨 이유는 2차 공략대를 위함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은 마탑과 천공성을 이끌고 태평양을 돌파, 그 과정에서 방해하는 총통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는 홀로 신대륙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헌터들이 수군거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전부 보고 받은 내용이긴 한데. 그럼 마탑과 천공성은?"

"모두 자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전략의 골자는 총사령관이 홀로 신대륙의 중심까지 도달해서 워프게이트로 2차 공략대 전원을 소환한다는 겁니다."

"공략대 전원을?"

웅성 웅성 웅성.

그때 한 헌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계획 아닙니까? 총사령관 혼자서 신대륙의 500만이 넘는 7랭크 몬스터들을 돌파한다고요?"

미국의 간판 헌터, 하인스도 인상을 굳혔다.

"신대륙은 던전화 된 지역이야. 좌표 오류 때문에 텔레포트랑 워프 둘다 막혔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김유신 혼자서 전 세계의 병력을 옮긴다는 거지?"

"지적할 건 또 있어요."

공인 1급 세라프가 말했다.

"워프가 가능했으면 처음부터 김유신이 신대륙으로 넘어갔으면 됐지. 태평양은 왜 뚫고 간 거죠? 말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확실히 합리적인 의심이었기에, 모두가 설명을 요구하듯 필을 바라보았다. 필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저도 마법 파트 쪽은 문외한이라 자세한 원리는 모릅니다. 총사령관은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믿고 기다리라니."

헌터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때 팔걸이를 탕! 치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있었다.

"그림 아주 빤-하다 빤해. 그치?"

프란츠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다들 그간 김유신의 행보를 한번 생각해봐. 멀리 가지 않아도 세계선전포고, 바레인 사태 생중계, 그리고 멀쩡한 공략대 해체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랑은 거리가 멀잖아? 그리고 5년 내내 식물인간이었던 놈이 뜬금없이 의식불명 상태에서 회복됐다는데, 그 새끼 정신 상태가 지금 100% 정상이라고 장담할수 있는 사람 있어?"

"……."

주위가 조용해지자 프란츠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런 병신들 심리를 잘 알아요. 이번에도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이 그런 강박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대책 없이 공략대 해체시켜 버리고 사람들이 전부 자길 기다리도록 하는 거야. 장담하는데, 지금 이새끼만 믿고 기다리고 있으면 피 본다."

"잠깐."

한 소녀가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김유신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단정 짓는 거지?"

유령대의 수장인 공인 2급 마리 골드. 5년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어린 소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훠이, 아저씨들 이야기하잖아. 꼬마는 저기 가서 놀아라."

프란츠가 귀찮다는 듯 팔을 휘휘 흔들자 뒤편에서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게 인정욕 때문이든 뭐든, 적어도 김유신은 혼자서라도 신대륙에 갔어."

마리는 꿋꿋이 말했다.

"공략대해체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제일 먼저 자국으로 도망친 당신이, 공략대 해체 이슈로 김유신을 물고 늘어지는 건 우습지 않아?"

이번엔 프란츠의 반대편에서 큰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프란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꼬맹이가……!"

"자, 여러분. 진정하시죠."

바로 그때, 공인 1급 4위의 듀크 에스퍼가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왔다.

"감정싸움은 상황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의견을 한번 모아보죠."

능숙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투표를 해봅시다. 여기서 마냥 총사령관만 믿고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한윤정과 세계길드 몇몇은 가만히 있었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거수했다.

한윤정이 쯧 하고 혀를 찼고, 에스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총사령관을 믿고 싶습니다만…… 만사를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건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헌터로서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에스퍼가 고개를 돌려 필을 바라보았다.

"총장님. 지금이라도 총사령관 김유신 헌터를 제외한, 2차 공략대를 구성해서 신대륙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필은 굳은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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