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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20화 (320/337)

나 혼자만 마탑주 320화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에리히 프롬.

6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라클은 네메시스를 최후의 재앙이자 최악의 재앙으로 천명했고, 전세계가 재앙 준비에 모든 여력을 쏟아부었다.

인류 역사에 남을 최대의 벙커 확장 공사가 진행됐고, 자가발전 시설과 지하네트워크 등 인류의 문명이 지상에서 지하로 옮겨가고 있었다.

네메시스가 시작되면 그 기간 동안은 인류의 경제활동이 거의 대부분 멈춘다. 지하에 축적해 둔 식량과 자원만으로도 버텨내야 했다. 학자들은 인류 최대의 겨울잠이라고도 표현했다.

나도 물론 공략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6개월을 보냈다.

세계 전역에 워프게이트를 설치했고, 포션들을 헌터들에게 무상 지급했다. 방어 능력이 떨어지는 지역에는 원격 조종 골렘들을 지원하거나, 지하 벙커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동안 마탑이 벌어들인 수입 대부분을 이번 네메시스에 다 꼬라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7층 관리자 데릭 로스바쉬를 위시한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모인 마공학 프로젝트도 99% 완료됐다.

현재는 제품을 양산하는 단계에 있고, 새로운 마력 확산망도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이 6개월간,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인류의 단합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美 대통령, 미군은 자국의 영토와 국민만을 지킬 것. 공략대 이탈 시사.]

[중국 정부,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만도 벅차.]

자국우선주의와 국수주의 흐름은 여전히 팽배했다.

미국이 제일 먼저 방아쇠를 당겼고, 중국과 몇몇 M10국가들도 자국 우선 방어를 천명했다.

이 말은 즉, 공략대에 헌터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세계 연맹은 이들을 강도 높게 비난했고, 연맹에 우호적인 유럽의 나라들도 범세계적 공략대 참여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사실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략대 참가국들의 자국 내 여론은 좋지 않았다.

[제발 자국민들을 먼저 지켜주세요.]

[니네가 연맹 따까리냐?]

[미국이 현명한 거지 ㅇㅇ]

[언제까지 연맹 눈치만 볼래? 누굴 위한 나라인지 모르겠다.]

뭐 그런 거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자신의 안위를 희생하면서까지 공익에 힘을 쏟으려 하지 않는다.

미국을 시작으로 파견국 내부에도 회의론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연맹 사무총장 필 또한 난색을 보였다.

'공략대비참여국을 제재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답답한 상황이다. 네메시스를 앞두고 전쟁을 벌일 수도, 경제제재를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죽고 살고가 달린 문제니 비참여국들을 감정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필에게 말했다.

'그냥 냅둬요.'

지들이 기를 쓰고 안 간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복수의 플랜을 가지고 있다.

지금 상황에선 트러블을 일으켜서 세계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

그렇게 인류의 마지막 유예기간인 6개월은 지나갔다. 내일부터 오라클이 발표한 네메시스 예정일이다.

외부 업무를 마치고 차를 타고 마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한밤중에도 불빛이 가득 해야 할 서울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다. 거리는 유령도시처럼 조용했고, 빼곡하게 들어찬 상점들은 하나같이 문을 닫거나 셔터를 내렸다.

국민들은 이틀 전부터 지하 벙커와 대피소에 들어가 있다. 자유 선택이 아닌 의무적 사항이다.

그래도 전 인구가 서울에 몰린 카타클리즘 때에 비해선 상황이 나아진 편이다. 전국의 지하 대피소를 모두 사용할 수 있고 6개월간 벙커도 많이 늘어났다.

그렇게 한국은 전 국민을 지하에 쑤셔 박는데 성공했다.

인류가 지하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론적으로는 10년, 현실적으로는 2년 남짓이다. 식량이나 의료용품은 물론, 배수시설이나 자체 전기 발전소까지 버틸 힘은 충분하다.

모두가 지하에서 웅크리고 있는 밤. 우리 같은 헌터들은 더더욱 바쁘다. 나는 통제구역을 지나 마탑으로 들어왔다.

"마정석 여분은 이쪽으로!"

"스톤 골렘 보수 누가 했냐? 당장 튀어나와!"

"앞에서 길 막지 말고 비키라고!"

고요한 바깥과는 달리, 마탑 내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완전무장 상태의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러댔고, 각종 장비와 포션들을 상자에 옮겨담는 사람들이나 마법진 설계도를 펼치고 열띤 토론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는 직원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복도를 지나서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밟고 9층으로 올라왔다.

"얍! 골라보시지!"

"이거다!"

내 방으로 올라오니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완전무장 차림의 은솔과 김사랑이 마주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 대표님! 늦으셨네요."

"오빠야 왔어?"

그녀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한가하다 못해 태평한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여긴 너무 긴장감 없는 거 아닙니까?"

김사랑이 후후 웃으며 팔짱을 꼈다.

"에이, 대표님도 참! 마지막 날까지 바쁜 사람들은 준비 부족이라고요. 우린 준비 만전! 여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게임도 하면서 긴장을 푸는 거죠. 그치 솔아?"

"응! 응!"

뭐, 마탑은 전원이 '공략조'라서 네메시스가 시작돼도 바로 출동하지 않는다.

한국의 방위는 헌터 협회와 TOP10을 위시한 길드들, 그리고 매니지먼트들이 맡는다.

그녀들 말대로 어느 정도 여유는 있는 셈이다.

"준비 만전 같은 소리 하네."

그때 내 뒤의 마법진 엘리베이터가 번쩍이며 진보라가 올라왔다. 그녀는 진이 빠진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솔아. 누가 스톤 골렘 물량 빵꾸냈다던데?"

"아악! 누구야!"

은솔은 다급히 이어마이크를 켜고 어디론가로 연락했다.

나는 그녀들을 지나 서울 야경을 볼 수 있는 9층 투명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에 잠긴 도시가 보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후회는 없다. 이제 내가 원하는 결말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앗, 선배님! 카운트다운 시작해요!"

진보라가 내 옆으로 달려와서 말했다. 그 말에 김사랑과 은솔도 투명벽에 착착 붙으며 눈을 빛냈다.

진보라가 시계를 보며 손가락을 세웠다.

"자, 5!"

전화를 받던 은솔이 팔을 번쩍 들었다.

"4!"

이어서 모두가 목청껏 외쳤다.

"3! 2! 1!"

"말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와아아앙!"

…다들 신났네 신났어.

압박감으로 멘탈이 과부하 되다 못해 미쳐 버리게 된 걸까.

그래도 말세랍시고 나 언제 죽을까 꿍해 있는 것보단 낫다고 본다.

"근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요?"

진보라가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바보야. 재앙이 한국의 시간을 기준으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바보라니 너무해!"

나는 의자에 앉아 편안히 등을 기댔다.

"다들 잠이나 푹 자둬. 아마 내일 모레쯤……"

"어, 저게 뭐야?"

"내려온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 다시 그녀들처럼 투명벽에 얼굴을 착 붙였다.

어두움 밤하늘을 뚫고 뭔가가 내려오고 있다.

─────쿠웅!

저 멀리서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우뚝 솟은 뭔가가 보인다.

거대한 탑이었다.

'시작됐다!'

나는 데바의 눈의 범위를 더 확장시켰다. 위치는 대충 어림잡아 성북구 쪽. 탑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크네."

"저 정도면 마탑보다 더 큰 거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밤하늘에서 무수한 궤적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네메시스의 첫 번째 페이스, '심판의 탑'이 시작됐다.

* * *

대서재의 기록에 따르면 '심판의 탑'은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아직 네메시스는 지구에 등장하지도 않았다. 대서재의 기록에 따르면 심판의 탑이 시작된 이후 5~6일이 지난 뒤에 네메시스가 나타나는 추세다.

이 심판의 탑은 마탑과 닮은 점이 많은데, 파괴 불가능한 오브젝트이며 9층 구조물이다. 1층에는 약한 몬스터들이, 9층에는 가장 강한 몬스터들이 살고 있다.

각각의 층에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고, 이 보스 몬스터를 제거하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마지막 9층의 몬스터를 쓰러뜨리면 심판의 탑은 완전히 파괴된다.

연맹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지구전역에 떨어진 탑의 수는 약 60개.

한국은 서울에 하나 떨어졌다. 탑이 아예 떨어지지 않은 나라도 있고, 인구수가 많은 중국의 경우 네개나 떨어졌다.

협회장 홍연은 신속히 대처했다.

서울에 떨어진 탑을 중심으로 두껍게 방어진을 형성하고,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을 원천 봉쇄했다.

빡센 일은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나오는 출구는 1층으로 한정되어 있고, 전체적인 수준도 1~4랭크 정도에 불과했다. 레드게이트를 겪은 한국의 헌터들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번 네메시스는 장기전이라는 점이다.

다들 9층의 보스 몬스터를 제거하면, 심판의 탑을 클리어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에렌델의 기록에 따르면 쉽지 않다.

5층까지는 쭉쭉 올라갈 수 있는데, 6랭크가 나오는 6층부터는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성과가 별로다.

최선은 탑 주위를 틀어막고 전력을 온존하는 것.

심판의 탑은 지금도 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떨어질 것이다. 전력을 낭비하지 말고 참았다가 네메시스가 등장하면 공략대에 올인하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미국, 3개 탑 공략 발표.]

[美 국방장관, "국민 안전을 위해 악성 던전을 최우선으로 제거"]

처음부터 공략대 탈퇴를 선언했던 미국과 몇몇 국가들이 탑의 공략을 시작했다.

공략대에 병력을 보낼 생각이 없는 그들은 전력을 아낄 필요가 없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가장 부응하는 정책을 선보였다.

연맹 사무총장 필이 즉각 중지 권고를 보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들은 더 이상 연맹의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국의 간판 헌터 하인스. 7시간만에 포틀랜드 탑 5층 격파! 더 없이 순조로워.]

[시애틀, 피츠버그 탑도 공략 시작.]

[美 국방장관, "미국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안전하다"만족]

'……이 새끼들은 대체 무슨 속셈이야?'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자기 국민들을 위하는 건 좋은데, 이런 식의 언론플레이는 좀 아니지 않나?

희생을 감수하고 공략대에 병력을 파견하기로 약속한 국가들을 바보로 만드는 꼴이다.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인터뷰 내용을 퍼다 나르고 있고, 국민들은 공략대에 보낼 전력을 탑 공략에 쓰라며 성화다.

세계 최강대국이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엇나가고 있다.

이게 아직도 네메시스 이후 연맹과 유럽을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면…… 진짜 대가리에 물 찼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세계 각국의 노골적인 비난에 美국방장관, "미국은 자국민의 보호를 우선시할 것이다. 자국민의 안전이 확보되면 그때 병력을 파견을 검토할 것"입장 밝혀.]

일단은 미국 최상층부에 마인이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다.

국내여론은 아직까진 잠잠한 편이고 이기적인 미국을 비난하고 있지만, 미국을 따라서 우리도 자국 보호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에아를 보았다.

"내가 말했지? 역시 플랜B '핵미사일 협박 대작전'은 살렸어야 했다니까."

에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닙니다."

"……끙."

그래, 참아야 했다.

이건 인내심 싸움이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정적 순간까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뿐이다.

"필한테 말해서 연맹 파견국은 흔들리지 말고 탑 주위 방어에 집중하라고 다시 한번 강조해. 물론 탑 공략은 무조건 금지야."

"알겠습니다."

최후의 재앙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제 곧 내 차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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