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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19화 (319/337)

나 혼자만 마탑주 319화

홍연의 몸이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린다.

"……미안해요."

그녀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사과했다.

시련 속의 홍연은 나를 네메시스로 알고 있다. 세계를 지키지 못했으니 남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는 걸까?

"……미안해요."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의 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시련일 뿐인데.

가짜일 뿐인데.

가슴이 닳아버리는 것만큼 아팠다.

지금 이 광경이 정말로 현실이 되는 걸까? 내가 정말로 그녀를 죽여야만 하는 걸까?

-탑주.

"……."

[축하합니다!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마탑 제8층 '이계정원'이 해금됩니다.]

['메인플래너'의 일부 특성을 획득합니다.]

안 되겠다.

기분이 X 같아서 안 되겠다.

그래, 이 시련의 의도는 잘 알겠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견했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친절히 최종보스와 연습게임도 시켜줬다.

근데 그냥 내가 X 같아서 안 되겠다.

'다 집어치워.'

그동안 내가 세운 플랜들은 전부 폐기 한다.

결정했다.

나는 이 운명에 저항하기로 했다.

* * *

드디어 8공정을 손에 넣었고, 마지막 8층도 개방했다.

자축할 새도 없이, 나는 진짜 홍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만나자고 했다.

"……."

내가 먼저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숨김없이 좋아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른 채 말이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짙은 여운에 잠겼다.

그러다 정신을 수습하고 앞을 보았다. 마지막, 8층으로 향하는 길.

"가자. 에아."

그녀가 빛무리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나며 말했다.

"네, 탑주. 안내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나는 마탑 전 층을 개방했다. 1층부터 9층까지 전부 다 뚫어낸 것이다. 홍연 일만 아니었으면 기뻐 날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마지막 계단을 걸어서 8층에 올라왔다.

"제8층, 이계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아가 말했다.

"……뭐야 이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여기가 8층이라고?"

계단을 오르자마자 난데 없이 보인 것은 아담한 나무집이었다.

옛날 방식으로 나무를 통으로 쌓아올린 형태였고, 끝에는 타닥거리며 타들어가는 벽난로가 보였다. 바닥에는 폭신한 짐승 털이 깔려 있고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럼주 한 병이 보였다.

마탑의 8층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좁았다. 그냥 작은 단층 나무집에 불과했다.

'음? 나가는 문도 있네?'

여긴 마탑 안이고 실내인데 왜 나가는 문이 있는 걸까.

나는 문고리를 잡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와.'

내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졌다.

뻥 뚫린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햇볕은 따뜻했고 맑은 새 소리가 들린다.

이 집은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금색과 분홍색으로 이루어진 휘황찬란한 꽃밭이 언덕마다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 끝까지 전부 다 꽃이다.

이 풍경을 보고 누가 아름답지 않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거 설마."

"네, 탑주의 예상이 맞습니다."

에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8공정의 이계마법으로 만든 세계입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위의 아름다운 환경과 작은 나무집이 사라지며 다시 원래의 탑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8층은 '이계'를 관리하는 층입니다."

"이계를 관리한다고? 어떤?"

"우선 탑주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계가 있지 않습니까?"

응? 그럴 리가.

난 이제 막 8공정 마법을 손에 넣었다.

에아는 내벽에 설치된 벽난로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손을 뻗자 뒤편의 장작 하나가 날아와 벽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불씨가 순식간에 붙으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응……?"

벽난로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들이 내 주위에 글자를 형성했다.

[마력 동력 : 마력 발전소가 영구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탑의 마력이 일정량으로 유지됩니다.]

[형상 기억 합금 : 마탑의 벽은 큰충격을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형태대로 돌아오는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자연 재생 : 마탑의 소속원들은 마탑 내부에서 체력과 마력의 재생효과를 받습니다.]

"어, 잠깐만! 이건 마탑의……"

"네."

자리에서 일어난 에아가 나를 돌아보며 설명했다.

"마탑의 내부는 이계의 공간입니다."

그랬다.

마탑에 있으면 시련에서 입었던 치명적인 상처가 빠르게 자연 회복되는 것도, 벽이 충격을 받아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모두 이계라서 가능한 거였다.

마탑 자체가 거대한 8공정 마법이었다.

"그럼 8층의 존재의의는 마탑에 적용된 이계마법의 효과를 바꾸는 거야?"

"그건 가장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아까 보신 그 세계."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멀리서부터 황금 꽃밭이 드러났다. 마탑과 꽃밭이 반반이 되었다.

"여기 있는 이계정원도 이제 탑주의 것입니다. 탑주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이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에아의 설명을 꼼꼼히 들어보았다.

요컨대, 이제 나는 세 개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 됐다는 소리다.

첫째는 내가 직접 8공정 마법으로 창조하는 이계.

둘째는 이계의 효과를 받고 있는 마탑의 내부.

그리고 마지막 셋째, 8층 이계정원이 보유한 이계까지.

"이 이계정원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거지?"

"물론입니다."

에아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내 앞으로 무수히 많은 수식창들이 떠올랐다.

"어떤 배경으로 하겠습니까? 설산? 황무지? 아니면 바닷속? 이 세계의 규칙도 탑주가 정할 수 있습니다."

"설산도 가능해?"

"네."

그녀가 수식을 조작하자, 주위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하고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갑자기 훅 내려간 온도에 나는 어깨를 쓸었다.

"윽, 너무 추운데."

"그럼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수식을 건드리자,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는 눈.

이 따뜻하게 변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자, 손난로를 댄 것처럼 따뜻했다. 눈구덩이를 파고 손을 넣어보니 끊는 냄비처럼 뜨거웠다.

"와, 이건 진짜 사긴데."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아공간 주머니 같은 수준이 아니다. 나는 내 전용 세계를 손에 넣었다.

* * *

저녁 시간, 나는 모자와 후드를 눌러쓰고 홍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간이고 동네의 한적한 카페라 내가 있는 2층엔 손님은 없었다.

그때 딸랑 딸랑 하는 종 소리가 들리더니 또각또각 계단을 오르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긴장된다.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났다.

저번 카니발랜드 때처럼 검은색으로 숨긴 머리카락에, 선글라스를 썼다. 밤색 목도리를 두르고 살짝 오버핏인 양털 코트를 입은 모습이 귀여운 느낌이다.

"안녕하세요. 선배."

그녀가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손을 흔들며 밝게 웃어주었다.

그녀가 양털 코트를 벗어서 의자 옆에 걸어두자 반전 몸매가 드러났다. 괜히 헛기침이 나온다.

우리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는 이런 저런 안부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빨대로 커피를 휘휘저으며 말했다.

"별로 표정이 좋지 않으시네요. 선배."

"……."

처음부터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나는 길게 숨을 내뱉고는 그녀의 금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어."

그녀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만났을 때 차마 못했던 그 이야기야."

나는 천천히 대화를 풀어나갔다.

이번 네메시스의 비밀에 대해.

처음엔 숨길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남김없이, 솔직하게, 전부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네메시스를 죽일 수 있는 건 수호자뿐이며, 네가 네메시스를 죽이면 네메시스의 본체가 흘러나와 네 몸을 빼앗을 거라는 것까지도.

"그렇게 되면 네가 새로운 네메시스가 돼서 세상을 멸망시키게 돼."

충격적인 이야기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내 말을 부정하거나 거짓말로 치부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오라클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그리고 내 예언은 이전 에렌델과 다른 세계의 과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그럼 제가 네메시스를 파괴하지 않으면요?"

"네메시스가 세계를 멸망시키겠지. 그게 더 최악이야."

"……."

"그리고 지금부터가 본론인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끌어올려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네가 네메시스가 되면…… 나는 내 손으로 널 멈춰야 해."

"……."

그녀는 네메시스를 죽이고, 나는 그녀를 죽인다.

아마도 그게 이 세계가 살아남을 유일한 엔딩.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이루 말할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래."

그녀는 두 손을 감싸 쥐고 그 위에 이마를 올리거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나는 잠자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혹시 제가."

그녀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메시스에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네메시스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껏 마인화에 저항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녀가 떨리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오라클. 아니, 선배의 예언대로라면 제가 네메시스를 파괴한 뒤 네메시스가 제 몸을 빼앗으려고 할 거예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그사이에."

그녀가 나를 보며 눈웃음 지었다.

"선배가 절…… 멈춰주세요."

"……."

"저는 세계를, 그리고 선배를 구했다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요. 그게 수호자로서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앙이 없어진 미래에, 제 힘은 필요 없으니까요. 제가 없어도 괜찮아요."

웃기지 마라.

그런 표정으로, 그런 목소리로, 나는 괜찮다고 말해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집어치우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건 다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고, 마탑이 그렇게 될 거라 멋대로 추측하는 것뿐이야.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선배."

"난 네가 살아 있는 엔딩을 만들거야. 지금부터는 내 계획을 들려 줄게."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의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할수록 그녀의 떨림은 점점 더 커졌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한가요?"

"이론상으론 가능해."

"하, 하지만!"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면 선배가 또 희생당하는 거잖아요! 안돼요! 지금까지 몇번이고 희생했으면서 왜 그렇게……!"

"누가 희생한대?"

내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엔 네가 날 구해주는 거야. 그럼 공평하지?"

"……."

갑자기 그녀의 두 눈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뛰어와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선배."

"응."

"……사랑해요."

나는 눈을 감았다.

"나도 그래."

다시 한번 결심했다.

그녀를 살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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