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18화
공정 마법이란 건 생태계에 하나의 공정이 더해질수록 완전히 새로운 마법으로 변모한다.
그 구축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건 덤이다.
이번에 내가 배운 건 무려 여덟개의 생태계가 합쳐지는 8공정 마법.
8공정 마법은 여덟 개의 생태계를 모두 감당할 수 없기에, 생태계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비상식의 연속. 끔찍할 정도로 복잡해서 방정식이나 논리체계로는 환원시킬 수 없지만, 이것 또한 한번 이해하기만 하면 더 이상 복잡하지 않다.
이것이 안톤이 말한 '혼돈'의 기본.
7공정의 창조와는 다르다.
창조는 이 세계에 이미 있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거라면, 혼돈은 이세계가 아닌 것을 만들어낸다.
즉, 또 다른 세계를 만들거나 부수는 힘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나 분필을 창조해서 손에 쥐고는 머릿속에 들어간 8공정의 혼돈 수식을 벽에 그려나갔다.
치덕치덕 마나 분필이 벽을 그을 때마다 선명한 푸른 자국이 남는다.
거침없이 수식들을 써 내려갔다.
심장이 뛴다. 미친 놈처럼 웃음이 나온다.
팔이 기세를 타고 귀신들린 듯 움직인다. 팔이 두 개만으로도 모자라다. 이럴 때면 열 개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정신을 놓은 과몰입을 경험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선배님?"
진보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그제야 밤을 새웠다는 걸 깨달았다.
'윽.'
뒤늦게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선배님!"
진보라가 달려와 부축해 주었다.
"내가 못 살아 진짜!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이게 다 뭐예요?"
주위를 살피는 진보라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7층 거의 모든 벽면에 마나 분필로 그린 수식들이 그려져 있었다.
나중엔 두 팔로 하는 게 너무 답답해서 원격 시전을 이용해 분필을 한 번에 열 개씩 쥐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꼴이다. 벽 전체가 수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게 바로 8층 시련을 극복할 키. 그리고……."
나는 진보라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이번 네메시스를 공략할 핵심이야."
나름 자신감 넘치게 말했건만, 돌아오는 건 그녀의 한숨이었다.
"네메시스도 좋지만 일단은 좀 쉬셔야죠.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단명하면 무슨 소용이에요?"
진보라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에아 씨도 쫌, 이 사람 과몰입하면 말려주시지."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허공에서 빛무리와 함께 에아가 내려 왔다.
"방금 탑주는 8공정에 도달하는 중대한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말렸으면 다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수년은 더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두 사람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
나는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내일 다시 도전할게, 에아. 이 수식들 빠짐없이 캡쳐해 줘."
"알겠습니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더 질질 끌 것 없이 바로 결전이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도전한다."
다시 어둠을 지나 폐허에 도착했다.
하루 내내 푹 쉬어서 몸 상태는 만전.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김유신 오리지널- 디포메이션 마에스터>
우선 마에스터를 켜고 주위에 깃털을 흩뿌렸다. 깃털들이 바닥에 꽂히며 8공정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속도전.
홍연은 3분 안에 도착하니 그 전에 완성해야 했다.
8공정 마법의 마법진은 여타 마법진과는 외형이 다르다. 수식과 마법회로로 연결된 게 아닌, 어린아이 낙서처럼 난잡하고 어지럽게 수식들이 얽혀 있는 외형이다.
"후우우."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정면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긴장감에 가슴이 빠르게 뛴다. 몇번의 반복된 학습으로 생겨난 죽음의 공포가 내 머릿속을 잠식하려 꿈틀댄다.
-탑주. 완성했습니다.
'좋아.'
나는 망설임 없이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마법진을 중심으로 결계막이 펼쳐지며 나와 주위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홍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슬아슬했다.'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막을 보았다.
"이상한 힘을 쓰는군요. 당신이 네메시스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는 자세를 낮추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만 사라지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녀가 발검하자 일자로 곧게 뻗은 검격이 날아왔다.
몇 번이나 내 심장을 뚫고 목을 날린 바로 그 기술. 어떤 방어마법도 찢을 수 있는 적광기의 중첩.
하지만.
'된다!'
이번엔 막아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흘려보냈다.
내 결계에 부딪힌 검격이 그대로 뒤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건 그냥 방어막 같은 개념이 아니다. 홍연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세계에서 있다.
그쪽 세계에서 날린 힘으로 이쪽세계에 간섭할 수 없기에 그대로 통과해 버린 것이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자, 쫄지 말고 들어와!"
나는 내 주위를 감싼 우주를 확장시켰다. 막이 순식간에 부풀며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충격에 대비하는 듯했지만, 아무런 저항감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하얀 백사장이다. 바다가 쏴아아 소리를 내며 넘실거리고 있고 야자수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열대지방의 모습이다.
"평화롭지?"
내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해."
그녀가 검을 바로잡으며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느끼고 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세계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다. 내 마력도 그녀에게 끌려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증폭의 진>×30
<가속의 진>×30
나도 이제 제 실력을 낼 수 있게 됐단 소리다.
내 앞으로 무수히 펼쳐진 마법진에서 깃털들이 섬광의 비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검을 휘둘러 쳐냈다. 붉은 검격이 허공에 무수히 펼쳐지는 모습이 확실히 진짜 홍연처럼 극의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까득!
그녀의 허벅지에 깃털이 박히고.
으적! 으득!
어깨와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녀의 인상이 파리하게 질려간다.
'뭔가 좀 이상하지?'
이곳은 '내 세계'다. 엄연히 말해이 공간의 창조주는 나다.
내가 방금 정한 세계의 규칙. 이세계에서의 중력은 계속 변한다.
검사의 강함은 무수한 훈련과 반복 전투로 쌓여온 업.
그러나 지상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과 물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게 차원이 다른 만큼, 검사는 환경의 변화에 취약하다.
홍연 특유의 적응력이 까다롭긴 해도, 나는 초 단위로 이곳의 중력을 마구 바꾸어 그녀의 균형을 흔들어놓고 있다.
8공정이 더 능숙해지면 다양한 조약들을 삽입할 수 있겠지만, 당장은 잔재주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홍연 같은 타입의 상대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시킬수 있다.
점점 더 많은 깃털들이 꽂히며 그녀의 슈트에 붉은 핏물이 새어 나온다.
"큭!"
결국 그녀가 마력을 끌어올려 적광기를 회오리의 형태로 발산해 깃털을 막아냈다.
실책이다. 이곳은 이전처럼 힘을 펑펑 써도 마나가 차오르지 않는다.
그녀가 저 기술을 계속 쓰도록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길 수 있다.
홍연도 마나가 부족하단 사실을 눈치챘는지 회오리가 유지되는 동안 포화지점을 빠져나왔다. 이내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내 주위를 가속하며 내달리고 있다.
나는 데바의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뒤쫓는다.
"하아아아앗!"
초 단위로 들이닥친 그녀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틀어서 피해냈다. 이어지는 검격도 고개를 젖히고, 다리를 들어 피한다. 홍연의 안색이 점점 굳어진다.
본래라면 그녀의 검을 보고 피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에서 그녀에게 적용되는 중력과 공기저항을 계속 바꿔가고 있다. 검은 휘두르는 중에도 몇 번이고 궤적이 바뀐다.
'기분 좋은데.'
내가 불리했던 세계에서, 이제는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세계에서 싸우고 있다. 모든 게 편해졌다.
나는 휘둘러지는 검을 피한 다음, 팔을 뻗어서 그녀의 하얀 손목을 낚아챘다.
"이 옷이 또 고성능이라."
마에스터의 힘으로 이루어진 청의가 그녀의 손목을 묶고, 나머지는 바닥에 고정시켰다.
나는 뒤로 물러났고, 홍연은 청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낑낑대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즉시 윙골렘을 켜고 최고속도로 하늘로 도약했다.
그리고 에아가 스펙터에 준비하고 있던 마법진의 장전을 마쳤다. 다음 사용할 마법은 대지계 7공정.
<라그나로크>
그녀가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면이 올라왔다. 융기라고 할 정도가 아니다.
공간이 일그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면이 꺾여 올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땅과 바다와 숲이 보인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좌우에서 올라오던 지반이 둥글게 말아지며 천장까지 차지하더니, 그대로 중심을 향해 모여든다.
꾸드드드드드드드드득!
지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흙공이 됐고, 그녀는 안에 갇힌 격이 되었다. 나는 주먹 쥔 손을 옆으로 비틀었다.
까드드드득!
홁공의 크기가 초 단위 만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 압력은 고스란히 홍연에게 전달되고 있을 터였다.
나는 계속 압력을 가했다. 까드득 소리를 내며 작아지는 흙공의 크기는 본래의 1/3까지 줄어들고 있다. 모래들이 먼지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힘드네.'
나는 팔을 내리며 숨을 내뱉었다.
그때 홁공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쾅!
홁공을 무너뜨린 홍연이 적광기를 부스터처럼 사용해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윙골렘의 속도를 최대로 높여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고, 1공정의 레피드 에로우를 거의 무한정일 만큼 꺼내 발사했다.
그녀의 슈트는 파괴된 상태다. 맨살에 화살이 박히지 않으려면 적광기를 몸에 둘러야하고, 나를 따라잡으려면 적광기를 태워야 한다.
적광기는 마나효율이 극도로 나쁜 고유 능력 중 하나. 다른 때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여기는 내 세계다.
즉, 홍연을 상대할 내 전략은 단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정면승부는 무조건 피하고.
그녀를 말려 죽인다.
* * *
그래도 홍연은 홍연이었다.
도망치면서도 그녀가 휘두르는 원거리 검격에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겨야 했다. 중력과 공기저항 등 그녀에게 적용되는 자연계 수치를 바꿔주지 않았다면 먼저 당하는 건 내 쪽이었다.
그렇게 긴 숨바꼭질 끝에.
"……."
전략은 성공했다. 홍연은 검을 바닥에 박은 채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이래 보여도 최상위 공인 1급 세명을 상대해서 이긴 몸이다. 그런데도 홍연을 상대로 정면승부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가짜임에도.
내 세계로 끌어들였음에도 이런 결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나보다 더 강하다.
그 사실이 승패를 가르는 건 아니겠지만, 현실이 그랬다.
'미안하다.'
나는 검지를 치켜올렸다.
바닥에서 솟구친 어스 클레이모어가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