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17화
나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두 명의 공인 1급은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열정리는 얼추 끝난 것 같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이젠 내가 인류 최강입니다. 반론하고 싶은 분은 앞으로 나오세요."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전의는 확실히 꺾은 모양이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피 때문에 붉어지는 시야를 소매로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 1급."
바닥에 퍼질러 있던 가브리엘이 신음을 흘렸다.
입고 있던 헌터 슈트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최강이라는 이름답게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약속한 대로, 앞으론 제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십시오. 우리 관계는 네메시스가 끝나도 지속되는 겁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가브리엘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자기가 한 말에 여지를 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프란츠 1급? 당신이 꼴사납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잘 촬영했습니다."
나는 손을 뻗었다. 허공이 출렁거리더니 투명화 상태였던 드론이 내손바닥 위에서 나타났다. 프란츠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물론 정당한 결투 운운하던 당신이 재미있는 수작을 쓴 것도 다 촬영했어요."
나는 손가락 사이에 낀 마비침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뒹구는 모습이 인터넷에 뿌려지면 커뮤니티 사람들이 좋아하겠네요. 역대급 인터넷 밈화가 되지 않을까요?"
프란츠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이 새끼! 이러고도 무사할빠악!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그의 이빨몇 개가 햇빛에 반짝이며 날아갔다.
"아무래도 굴욕샷 몇 개 더 챙겨야겠네."
나는 쓰러진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올린 다음,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꺼내 셀카를 찍었다.
찰칵. 찰칵.
얼굴이 엉망으로 부어올랐고, 이가 듬성듬성 빠진 채 눈이 반쯤 풀린 프란츠와 다정히 추억 하나를 남겼다.
"와, 잘 나왔네요."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전화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프란츠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런 사람을 총수로 둔 수 많은 글로벌 길드들의 주가 하락, 그리고 소속원들의 심리적 박탈감은 참 볼만하겠죠?"
"앞으로는 어떻게?"
"……그래 X발, 따르겠다. 따르면 되잖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쓰려져 있는 왕야는 두손을 슥 들었다.
"인정."
"감사합니다."
내가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튕기 자 그들의 앞에 워프게이트가 열리며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헌터 전용 병원으로 향하는 워프입니다. 프라이버시는 확실히 보장되는 곳이니까 안심하고 치료받으세요."
마법사들이 그들을 부축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나머지 전투에 끼지 않은 1급들은 본부로 돌아가는 워프를 타고 사라졌다.
이제 둘만 남았다. 나는 자꾸 시야를 가리는 붉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너도 도전할래?"
홍연이 눈에 힘을 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 말이지."
그러곤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내 이마에 대고 살살 닦아주었다.
"윽, 아파."
"대체 왜 이렇게 무모한 거예요?"
시야가 확실히 밝아지며, 걱정 가득한 홍연의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다리에 힘이 풀리며 나는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청의가 깃털로 분해되어 대기 중으로 사라지고, 마에스터 모드도 풀렸다.
"상처 심한 거 아니에요?"
그녀도 나를 따라 무릎을 꿇고 상처를 살폈다.
"괜찮아. 그냥 지쳤을 뿐이야."
홍연은 나를 부축해 바위 근처에 앉혔다. 그러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치료 키트와 엘릭서를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둘렀다.
"긴급조치만 할게요. 꼭 병원 가세요."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심했으면 홍연은 또 나를 들어서 앰뷸런스에 처넣든가 했겠지.
치료를 마친 그녀가 키트를 아공간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역시 선배는 대단하네요."
"대단하긴 뭘, 너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 이렇게 할 수 있었잖아."
"힘으로 막 찍어누르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역시 못한다는 이야기는 안 하네.
내가 공인 1급들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디테일 덕분이다. 한 명 한 명 정성껏 분석하고, 그들의 약점을 그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마법적 수단을 총동원해 악랄하게 후벼팠다.
가브리엘은 파동으로 뇌를 흔들었고.
프란츠는 능력을 쓰는 딜레이에 워프로 태평양에 처박았으며.
왕야는 결계로 산소를 차단하고 주특기인 화염 능력을 못 쓰게 된 사이 두들겨 팼다.
물론 기술 한 방에 날로 먹을 수 있는 상대들은 아니라 우위를 점하고도 쓰러뜨리는 데에는 고생 좀 했다. 홍연이라면 더 쉽게 쓰러뜨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인류 최강자리도 먹었고, 명분도 강화했어. 준비할게 많아."
"선배."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제 눈을 못 보세요?"
"……응? 내가 언제."
"저한테 뭐, 말씀 못하시는 거 있으세요?"
나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네가 세계를 멸망시킬 운명이고, 그런 널 내가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녀 앞에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냥. 이제 곧 네메시스잖아.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서."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뭔가 실수했나?
내가 다시 말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아직 선배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란 확신을 주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전 마탑 멤버도 아니고, 그간 함께 생활해 온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선배 앞에선 진심이려고 노력했어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선배가 누구보다 세계를 구하고 싶어 하는 걸 알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선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어요. 그게 무엇이든."
"나중에라도 말씀해 주세요."
그녀가 워프게이트로 걸어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연아."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널 믿지 않는 게 아니야. 조금만 시간을 줘."
그녀가 다시 등을 돌려 다가왔다.
그러곤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응, 돌아가요."
배시시 웃는 그녀의 미소가, 오늘 따라 더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 * *
본부 일정을 마치고 다시 마탑으로 돌아왔다.
홍연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그녀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8층 시련에 도전했다.
그리고.
'자넨 준비가 덜 됐군.'
겁나게 깨졌다.
홍연에게 4번 연달아 죽었다. 시련의 마법에서 튕겨 나온 나는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아이 씨,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냐고……"
그녀와 만나는 게 아니었다. 괜히 더 신경 쓰인다.
100% 전력을 다해도 이길까 말까인데, 멘탈이 흔들리니까 평소 나오지 않던 실수까지 난발하고 난리다.
"에아, 다섯 번째 시도 들어간다."
….
너무 무리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번 도전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할게."
나는 각오를 다지고 다시 시련에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폐허의 모습이 보인다.
'플랜 F.'
나는 윙골렘을 켜고 최고속도로 비행했다.
여기 있으면 3분 안에 홍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와 거리를 충분히 벌린 다음, 풀파워 아마겟돈으로 홍연과 함께 이 지형 전체를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멀어지는 느낌이 안 나.'
아무리 빠르게 비행해도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느낌이다. 봤던 장소가 계속 나오고 있다.
-시공간 마법으로 좌표가 고정된 것을 확인!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내가 허공을 빙빙 맴도는 사이,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홍연이 다가오고 있다. 동시에 주위의 마나가 그녀를 중심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또 마나이탈이 시작됐다.
기동성은 봉쇄당해 좁은 공간에 갇힌 채로, 마나까지 빼앗기고, 적수가 적수인 만큼 멘탈도 흔들리고 있다.
최악이다.
환경 탓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시련은 모두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이번 8층 시련은 도저히 그런 걸 모르겠다.
이 층을 설계했다는 초대는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그냥 타락한 수호자를 죽이는 연습을 시킬 뿐인가?
갑자기 짜증이 났다.
나는 온몸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6공정이고 7공정이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력을 한없이 쏟아냈다.
애초에 이건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다.
클리어하라고 만든 시련이 아니다.
<김유신 오리지널 - 디포메이션마에스터>
날개를 펼치고 청의로 갈아입는다.
이내 모든 마력을 쥐어짜 내 깃털을 사방으로 흩뿌려 바닥에 떨어뜨린다.
깃털들은 마법진으로 분해되어 바닥에 깔린다.
모두 같은 종류의 마법진이다.
-탑주! 이게 무슨……!
<캔슬레이션>×100
근방의 바닥이 푸른 물결로 넘실거린다. 홍연과 싸울 힘을 남기지 않고 마나를 쥐어짜 냈다.
"발동."
모든 마법진에서 푸른 기둥이 솟아올라 하늘로 솟구친다.
이 세계를, 이 시련의 마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너무 무모합니다! 이 세계가 잘못되면 탑주도 무사히 빠져나올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어."
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적은 홍연이 아닌 이세계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명료해졌다.
'초대가 정한 규칙을, 이 시련의 마법 자체를 부순다.'
그렇게 인지하는 순간.
"……!"
갑자기 머릿속으로 방대한 지식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바다처럼 광활한 정보량에 입을 벌렸다.
'설마 이게 트리거였어?'
비슷한 걸 경험해 본 적 있다.
5층 시련에서 전대 마탑주들이 내가 6공정을 전수해 줄 때와 같지만, 그때와는 양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이제야 준비가 다 됐군."
주위가 일렁거리며 안톤이 내 옆으로 나타났다.
"대선배님!"
"환경을 의식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세. 사람은 당장에 닥친일, 옆 사람과의 관계, 욕구의 충족에 집중하지."
그가 말했다.
"그리고 환경을 적대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일세. 하지만 그어놓은 선 밖에서 사람들끼리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우스운지 아는가? 핵심은 선 밖으로 나갈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야."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도 나를 보았다.
"마법사들은 그런 고찰 속에서 발버둥쳤고, 공정의 한계에서 벗어나비로소 '혼돈'을 손에 넣었지."
"혼돈이요?"
"그렇네. 존재할 리 없는 제3의 속성.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안톤이 미소 지었다.
"혼돈은 다른 세계를 만드는 힘일세."
내가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이, 어둠 속에서 붉은 섬광이 일직선으로 날아와 내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나는 다시 시련 밖으로 튕겨 나왔다.
"허억! 후우!"
나는 숨을 헐떡이며 시련의 마법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나는 방금 세계를 만드는 이론을 얻었다.
'……이게 진짜 가능하다고?'
[…….]
쥐죽은 듯이 제자리에서 있었다.
고요했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눈알도 굴리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이런 대규모 균열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그에 동반되어야 할 그 어떤 비극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균열 몬스터의 제1 본능은 인간 말살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균열로 떨어진 몬스터들이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습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몬스터들의 이런 모습이 뜻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균열에서 막 떨어진 몬스터들은 자신의 감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간이 느껴지지 않을 경우, 마치 굳어버린 듯 동상처럼 멈춰 버린다.
이런 몬스터들의 행동을 '프리징'이라고 부른다.
지금 몬스터들이 보이는 행동은 전형적인 프리징 증상이다. 즉.
"사실 이곳 마나마에는 단 한 명의 인간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실시간 댓글이 미친 듯이 폭발했다.
"죽었거나, 감염되었거나, 몬스터나마인이 됐거나, 실험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겁니다. 이 도시에 있는 인간들은 전부 마인들뿐, 이게 바로 GOT의 실상입니다."
-탑주, 완성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자 에아가 공들여만든 수십 겹의 버프 마법진의 포대가 깔려 있었다.
나는 마력을 일으켜 그곳으로 깃털들을 날려 보냈다. 모든 위력 증강효과들을 두른 깃털들이 하늘 위로 끝없이 올라갔다.
"그러므로 세계길드 마탑은, 이 ' 몬스터 소굴'을 정당한 룰에 의거하여 파괴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맑은 하늘에서 붉은 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보고 있다면 마치 별똥별이라도 떨어지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마겟돈>
세상 무엇보다 압도적이고 강대한 폭력이 지금 이 도시에 내려온다.
그리고 충돌.
귀에 이명이 울린다. 지상이 불꽃과 점멸하는 순백의 섬광에 뒤덮인다. 높은 빌딩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고, 트럭과 보트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몬스터들은 잿더미가 되어 휘날리고 지반은 무너져서 도시가 통째로 가라앉는다.
압도적이다 못해 전위적인 폭력의 향연에 채팅창의 댓글도 순간 멈췄다.
'이 정도면 됐어.'
나름대로 출력을 조절했다. 그냥 바레인 나라 자체를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수도 있었지만, 이 도시 외에 다른 곳에는 민간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 자제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연기와 불꽃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마탑은 GOT와의 전면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인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으며, 네메시스 이전까지 마인들을 제거해 두지 않으면 우리 인류에게 더 큰 피해로 돌아올겁니다."
다시 내 시선이 드론 카메라로 향했다.
"GOT가맹국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뿐입니다. 마인을 도와 우리와 싸우거나, 아니면 우리와 함께 마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거나. 마탑뿐만이 아니라 연맹과 세계길드 전부 도와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통신을 종료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잘 하셨습니다. 탑주.
-꺄아앙! 오빠야 최고!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소매로 닦았다.
역시 난 방송 체질은 아닌 것 같다.
米 米
GOT가 사실 인류의 뒤통수를 칠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이미 서아시아 최고의 헌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던 사우디는 내 방송당일에 GOT 가맹국 탈퇴를 선언하며,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GOT관계자들과 마인들을 전부 사살했다.
이들이야 뭐, 필요에 따라 GOT 가맹국이 된 것뿐이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방송 당일 예멘, 쿠웨이트, 이라 크의 상위층이 마탑과 연맹에 연락을 취해왔다. GOT에서 독립하고 싶으니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였다.
확실한 개입 명분을 얻은 사무총장필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연맹의 최정예 특공대를 파견해서 고위층인사들을 보호하고 마인들의 주요시설을 타격했다.
분위기가 형성되자, GOT를 아니꼽게 보고 있던 M10과 유럽의 강대국들도 앞다투어 나섰다.
그간 자국 우선주의를 부르짖으며 파견은 커녕 본인 나라에서만 헌터를 굴리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이들은 즉각 중동에 병력을 파견해 대규모 마인 소탕작전을 감행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이 이번 일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정서진의 해설에 의하면 중동에서 보유하고 있는 핵들을 경계하는 거라고 한다.
마인들이 네메시스에 맞춰 유럽본토에 핵을 떨어뜨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유럽국들이 이때다 싶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동에 무상으로 주둔군을 두기로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일반 민간인들은 당분간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날수 있으니 환영하는 눈치다.
"……갑자기 불려와서 이게 무슨 난리야."
한윤정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나는 옆에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엄살 그만 부리고 일이나 하세요. 파라오님."
"너 때문이잖아!"
그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하여튼 일을 벌여도 미친 듯이 벌인다니깐! 연맹이랑 아무 상의도 없이 바레인을 날려 버리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정신머리인데?"
"오죽 답답하면 내가 나섰겠냐. 다들 눈치만 보면서 엄중 경고 같은 소리나 해대니까 내가 총대 멘 거야. 그리고, 중동이 GOT에게 점령당하면 네메시스 때 가장 위험해지는 건 이집트였을 걸?"
"아, 네에!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하네요 증말!"
그녀도 이틀 내내 철야 중이라 민감해졌을 따름이지, 내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투덜거리긴 해도 그녀도 이 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야."
한동안 말없이 모래를 펼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왜."
"근데 너,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고 한 거야?"
"당연하지."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막 꼬이고 꼬여서 세계 3차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 했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철저하게 각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움직인 거야. 그리고 당장 6개월 뒤에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그런 거 따지게 생겼냐?"
"하이구, 그런 결단력은 대단하긴 하네요. 마나마가 마인 도시라는 소스는 어디서 얻었는데?"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1급 위험도의 마인계 거물, 알렉산드로."
"아, 그 자식 한국 갔다가 잡혔다더니."
"놈이 들고 있던 전자기기랑 개인 정보로 유용한 정보들을 많이 얻어냈어."
현재 홍연은 직접 스페인으로 넘어가서 알렉산드로의 자택을 싹 조사하고 있다.
그녀는 이번 알렉산드로 작전에 내몫도 있다며 거기서 얻어내는 모든 정보들을 공유해 준다고 약속했다.
괜찮은 정보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 됐어."
능력을 모두 사용한 한윤정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럼, 캔슬레이션 시작한다."
나는 바레인에서 했던 것처럼 캔슬레이션 마법을 사용했다.
잠시 후, 하늘에 무수한 구멍이 뚫리며 몬스터들이 지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나마에서 한번 봤던 바로 그 광경이다.
"뒤는 맡길게."
"오냐."
어느새 주위는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로 우글거리게 되었다.
지면에 떨어진 몬스터들은 프리징이 걸리거나, 혹은 우리들을 발견하고 달려 들었다.
그녀는 기다렸다가 능력을 일으켰다.
지면 전체가 출렁이기 시작하더니 위아래가 파도처럼 일어났다. 이내 지면이 공처럼 말아지며 몬스터들은 그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파라오의 힘이 대단하긴 해.'
나는 일찌감치 아래로 내려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모래공이 내 머리 위에 생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발밑에는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 시티'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천미터 상공이다.
"이걸로 쿠웨이트도 끝!"
그녀가 팔을 뻗자 거대한 모래공이 움직였다. 이내 도시를 지나서 바다까지 오자, 그녀가 능력을 해제했다.
모래공이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
퍼엉! 하고 산더미만 한 물보라가 솟구쳤다.
"저걸로 다 죽은 거야?"
"그럼.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을 즘에는 살점이 모래랑 섞여 갈려져 있을 거야."
도시 아래에서는 마인 소탕작전이 한창이다. 그리고 나와 한윤정의 역할은 균열을 막고 있는 힘을 캔슬레이션으로 치우고,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남김없이 파괴하는 것이었다.
밀린 숙제 대신해 주는 격이니 중동 정부에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근데 말이야."
지상으로 내려오며, 한윤정이 말을 걸었다.
"네메시스가 일어나면 진짜 어떻게 되는 거야?"
"세상이 멸망하겠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안 멸망할 수도 있고."
"아 씨! 바보야. 장난칠 기분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도 멸망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잖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스타트는 나름대로 괜찮게 끊었다고 자평한다.
마인들의 천국이 된 중동에서 대대적인 소탕작전, 완전히 놈들의 씨를 말라진 못해도 전력을 큰 폭으로 깎았다. 그리고 이번 세계 합동 소탕작전은 앞으로 있을 공략대 구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그때 내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홍연으로 부터의 연락이었다.
"어, 연아. 무슨 일이야?"
한윤정의 눈썹이 꿈틀했다.
-선배.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뭔데 그래?"
-알렉산드로에게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그리고 이건…… 마탑과도 큰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드디어 올 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