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15화
8층 시련.
<김유신 오리지널 - 디포메이션 마에스터>
나는 청색의 슈트로 갈아입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홍연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오라가 흐르는 걸 보니 안톤이 말한 수호자의 '각성' 상태.
각성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결정적 순간 네메시스를 베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한 순간의 경지라고 한다.
즉 나를 상대하는 그녀는 지금, 전인류를 걸고 홀로 네메시스 앞까지 다가온 그런 결연한 마음가짐을 먹은 상태고.
"후우우."
반면에 나는 심적으로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일체화' 특성으로 진화한 내 과몰입 능력이 온 머리를 흔들어놓는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것은 내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홍연을 죽이는 연습이다.
"네메시스. 당신을 죽이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검을 곧게 세운다.
저런 표정으로, 저런 각오로, 그녀는 나와 싸우려 한다.
'정신 차리자.'
마음을 다잡고 깃털들을 날려 보냈다. 바람에 날아가던 깃털들이 허공에 무수히 많은 쉴드들을 주르륵 펼쳤다.
전면에는 내가 가진 최강의 방어기술의 7공정 에이션트 배리어까지 쳤다. 완벽한 방어태세다.
'함부로 접근하는 건 자살행위.'
나는 바닥에 떨어진 깃털을 밟았다.
<가이아>
그녀의 좌우로 지면이 파도처럼 다가왔다. 이에 홍연은 몸에 두른 적광기를 회오리 상태로 발현시켜 가뿐히 분쇄했다.
<슈퍼쉘>×4
홍연의 좌우 사방으로 날아간 깃털들이 벼락을 동반한 초대형 뇌운으로 변해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검을 쥔 자세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광기의 양을 더 늘리자, 그녀를 휘감고 있는 회오리의 크기가 열 배가 되었다.
내 슈퍼쉘은 가볍게 집어삼켜졌다.
'……힘드네.'
벌써 마력고갈 증상이 온다.
이 세계의 모든 마나가 그녀를 중심으로 흐르고, 빨려들고 있다.
마치 세계가 그녀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존재만으로 마법사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
외부 마력을 공급은 기대도 할 수 없다. 사실 내 마법진들을 홍연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6공정은 못 쓰겠네.'
그녀의 몸에 마법진을 설치하는 즉시 마나는 나를 배신하고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적으로 만나니 알 수 있었다.
그간 그녀가 나와 함께 싸울 때, 얼마나 나를 배려 하고 신경 써줬는지.
그런 생각을 할수록 집중력도 흔들린다. 본래 컨디션의 절반도 내기 힘들다.
'에아, 아마겟돈은 가능할까?'
-네, 탑주. 제 수식의 처리 비중을 더 늘리겠습니다.
지금 내 상태로는 에아에게 짐이 될 정도다. 어떻게든 이 불안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우선 시선 끌고.'
<파이어 캐논>×200
하늘에 불꽃들이 휘몰아치자, 홍연은 검을 쥐지 않은 맨손을 무심하게 휘둘렀다.
하늘이 다섯 개의 금으로 갈라지며 파이어 캐논들이 폭발한다.
'진짜는 이쪽!'
<크레바스>
그녀가 딛고 있던 바닥의 정확히 정중앙이 좌우로 벌어졌다. 발디딤대를 잃은 그녀의 몸이 아래로 내려간다.
좁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나는 깃털들을 보내서 스무 겹의 버프 마법진들을 쭉 깔아놓았다.
이제 이 구덩이에 아마겟돈을 쏟아보내면……!
-탑주! 아래에서 검격이 옵니다!
'뭐?'
내가 크레바스 마법으로 바닥을 가른 것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순수한 힘의 결정체인 적광기가 지면을 찢으며 올라왔다.
뒤로 물러났지만 늦었다. 붉은 검격이 내 오른팔을 자르고 지나갔다.
"크으윽!"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충격이 몰아친다.
집중력이 흔들리며 아마겟돈을 위해 준비해 둔 피스톨들이 사라지고, 홍연은 몸에 적광기를 두른 채 직접 지하에서 올라와 돌진해 왔다.
나는 한쪽만 남은 팔로 스펙터를 세웠다.
까아앙!
홍연의 검 끝이 스펙터에 부딪혔다. 내 몸이 수 킬로미터를 붕 날아갔다.
'다시 아마겟돈을……!'
그것이 내 생각의 마지막.
내 집중력이 흔들린 틈을 타, 아무런 기교도 없이 일직선으로 비집고 들어온 붉은 선이 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대로 심장이 나갔다.
소름이 끼치는 정확도.
나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째깍! 째깍!
다시 시간이 되돌아간다.
가슴에 뚫린 상처가 사라지고 홍연의 몸이 땅속으로 들어간다. 벌어진 크레바스가 닫히고 그사이에 홍연이 올라와 검을 잡은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 가고 나도 다시 어둠 속에 빠진다.
'아, 망할.'
그래, 죽는 것보다야 시간을 돌리는 게 낫긴 하다.
근데 꼭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한 다음에 시간을 되돌려야 하는 거냐고.
"자넨 아직 준비가 덜 됐군."
전에도 들었던 안톤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7층 꼭대기로 튕겨나왔다.
'후우우우.'
나는 나오자마자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온갖 망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아아악! 미치겠네, 진짜!"
"탑주! 괜찮으십니까?"
허공에서 섬광과 함께 에아가 나타났다.
"나 너무 힘들어 에아."
"잠시 쉬시지요."
에아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아이 다루듯 하는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손길이 부드럽고 따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제가 곁에 있습니다. 탑주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저도 함께 짊어지겠습니다."
"…… 고마워."
나는 한동안 그렇게 누워서 에아의 온기를 느꼈다.
너무 힘들어서, 그냥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었다.
에아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있어주었다.
"에아."
"네, 탑주."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중에서…… 뭐가 최선일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
"꼭 이 중에 최선을 뽑아야 합니까?"
"무슨 뜻이야?"
"이 선택지들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탑주는 불행해질 겁니다. 저는 호문쿨루스. 주인이 불행해지는 선택지를 권할 수 없습니다."
"……."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편안히 먹으십시오. 아직 떠올리지 못한 것뿐입니다. 분명히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내 기분도 덩달아 나른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많은 일들을 겪었고, 이제 최후의 재앙이라는 네메시스만 남겨둔 상황이다.
나는 과연 어떤 엔딩을 택하게 될까.
그런 고민을 하며,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닫았다.
* * *
"아이 참, 선배님 일어나세요!"
내 몸을 흔드는 손길에 잠이 깼다.
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으으음, 5분만……"
"우리 탑주님 또 시작이시네."
진보라의 손길이 사라지고, 잠시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기도 싫었던 내가 그대로 다시 잠들려는 찰나.
코를 찌르는 풀 냄새가 난다. 이건 녹즙이다.
"아- 입 벌려요!"
입을 벌리자 끝부분을 가위로 자른 녹즙팩이 들어왔다. 질질 흐르지 않도록 구멍이 작아서 쪽쪽 빨아먹을 수 있었다.
"잘 먹는다. 우리 아기."
이 이모가 또 뭐래.
어쨌든 녹즙 특유의 청량한 맛에 기적처럼 잠이 달아났다. 비로소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날 깨운 거 보니 무슨 일 있나 본데?"
"정답! 세계 연맹의 중대 발표가 있대요. 다들 황금로비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어요!"
"중대 발표?"
아무튼 닥치고 내려오란 소리였다.
대충 세수를 하고 겉옷을 챙겨입은 다음 진보라를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마탑주님!"
"오셨습니까!"
늦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직원들은 퇴근한 뒤였다.
관리자들과 선임급 마법사들, 그리고 야근이 예정된 마법사들이 함께 내려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물론 저녁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건 아니고, 치킨이랑 피자 같은 배달음식들 쭉 쌓아놓고 맥주 파티를 즐기는 정도였다.
"자, 자, 선배님은 상석으로!"
나는 황금로비의 소파 중간에 앉았다. 내가 앉자마자 은솔이 쪼르르 달려와 무릎 위를 차지했고, 정서진은 내 뒤로 그림자처럼 다가와서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줄줄이 보고 했다.
자다 일어나서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척했다.
"오빠야! 시련 수고했어!"
"고마워 솔아. 근데 너무 가깝……."
"오빠야도 피자 먹을래?"
은솔이 원격 조종을 능력을 이용해 피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날아오는 중간에 파마산 치즈가루와 핫소스가 공장라인 돌아가듯 뿌려지고, 가장 자리에 약간 탄 부분들이 세심하게 뜯어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손에 깨끗한 피자를 든 은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빠야! 아?"
입을 벌려 피자 한 입을 깨물어먹자, 은솔이 비명 비슷한 걸 질러댔다.
"으으응, 너무 좋아! 솔이는 오빠야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그거 옛날에 내가 자주 해주던 대산데.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번에는 하예린이 다가와 수줍게 인사했다. 은솔이 그녀를 사납게 노려 보았다.
"예린아! 오랜만이야. 마탑생활은 할 만해?"
"네! 다들 잘 도와주셔요! 마도사분들이 직접 마법도 가르쳐 주시고……"
하예린의 마법은 김사랑, 조용희, 차도연이 번갈아가면서 가르쳐 주고 있다. 차도연은 협회 사람이라 굳이 안 해도 된다는데 자기도 꼭 힘을 보태고 싶다나 뭐라나.
아무튼 하예린도 적응을 잘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실수투성이긴 하지만 성격도 싹싹하고 나름대로 근성도 있으니 금방 자리 잡을 거라고 믿는다.
"와, 마탑주님 내려오자마자 관리자님들이 다 독차지하는 거 봐."
"저희도 상대 좀 해주세요!"
맥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몇몇 마법사들이 장난을 걸어왔다.
마탑은 기본적으로 젊은 조직이라 위아래의 규율이 엄격하지 않다(물론 정서진의 2층은 제외다). 퇴근후의 시간대인 지금은 더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어딜 감히! 꼬우면 짬밥 더 먹고 오던가!"
유일하게 꼰대질을 하는 건 내 무릎에 올라간 채 으르릉거리는 은솔뿐이었다.
관리자들 모두 직원들과 잘 어울렸다. 나도 이런 단란한 분위기를 원했다.
이제 이렇게 모두와 즐기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아! 이제 나와요!"
진보라의 외침에 모두가 대형 스크린 TV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연맹 사무총장 필이 기자회견장에 등장하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쏟아진다.
[연맹 사무총장 필입니다.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조금 불안하다.
갑자기 무슨 중대발표를 한다는 걸까?
필은 빠르게 인사말을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세계 연맹은 예언 능력자 오라클의 예언을 신뢰하며, 6개월 뒤에 벌어질 11랭크의 재앙, 네메시스를 막기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아 루머만 분분했던 오라클을, 연맹이 '공인'했다는 것은 큰 의미였다.
네메시스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 수 많은 재앙들을 거치며 안전불감증이 생긴 현대인들에게 연맹은 네메시스에 대한 심각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에 연맹은 네메시스 공략대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세계 각국의 톱헌터들로 구성된 인류의 군대로 네메시스를 직접 파괴할 겁니다.]
기자들이 손을 들며 질문을 쏟아냈다.
[또 다시 헌터를 차출한단 말씀이신데요.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차출국의 방위는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물론 각국의 방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네메시스를 파괴하지 않으면 이번 재앙은 영원히 계속 됩니다. 네메시스 공략이 각국의 피해를 줄일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연맹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필이 아주 작정하고 나온 모양이다. 공략대 구성이라는 내 의견도 채택했다.
이어서 몇 가지 질문에 답변한 그가, 주위를 조용히 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네메시스 공략대를 이끌 총사령관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때보다 수 많은 카메라 플래시들이 터져 나왔다.
필은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네메시스 공략대의 총사령관은 대한민국의 공인 1급 김유신 헌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