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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14화 (314/337)

나 혼자만 마탑주 314화

"탑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나는 화를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고, 안톤은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지. 재앙이 닥치면 행성의 의지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탄생시킨다네. 그게 바로 수호자지."

또 수호자인가.

요즘 많이 듣는 말이었다.

[이미 파국은 시작되었다, 수호자. 세상은 네 손에 무너질 것이다.]

1급 위험도의 알렉산드로가 말했고.

[앞으로 기대하마. 수호자.]

총통도 언급했다.

"자네의 세계에도 선택받은 용사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겠지?"

"엄청 많죠."

"바로 그 용사의 현대판 버전이 수호자라고 생각하게. 세상을 구할 운명을 짊어지는 대신, 한계를 넘어서 네메시르와 싸울 만큼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지."

"……그냥 학습 능력이 강화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수호자의 가장 기본적인 힘에 불과해."

다시 생각해 보니, 홍연이 홍율의 적광기를 습득한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몸에 적광기를 주입해서 적응시키는 것만으로 본래의 능력자보다 더 힘을 잘 쓸 수 있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학습 능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아니, 그럼 더더욱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수호자인 홍연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거죠?"

"그건……"

그때였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붉은 검격이 안톤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대선배님!"

안톤의 몸이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허깨비? 뭐, 상관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검을 든 홍연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에는 적광기와는 다른, 하얀 아우라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연아."

"네메시스. 당신을 죽이면 모든 게 끝납니다."

경계심 가득한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설마 나를 네메시스라고 알고 있는 건가?

"각오하시길."

"아니, 잠깐만! 내 말을!"

붉은 뭔가가 갑자기 내 쪽으로 확밀려 들었다.

"……!"

그리고 시야가 떠올랐다.

나는 뒤늦게, 내 목과 몸이 떨어졌다는 걸 인지했다. 그녀는 검을 휘두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죽었다.

그녀의 검에.

째깍. 째깍.

라디오 테이프를 거꾸로 튼 것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내 목이 다시 몸에 붙었고 안톤도 살아났다.

이내 다시 내 몸이 검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넨 아직 준비가 덜 됐군."

어둠 속에서 안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한 얼굴로 목을 매만졌다. 제대로 붙어 있었다.

"네메시스를 상대하는 수호자는 진심이야. 일종의 각성상태지. 일말의 망설임이라도 있으면 자네는 몇 번이고 죽게 될 걸세."

"대선배님!"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가르쳐 주세요! 왜 홍연, 아니, 수호자가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거죠?"

그 말에 안톤이 내 옆으로 나타났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네메시스는 수호자만이 죽일 수 있네. 행성의 방어체계가 단 한 사람에 힘을 몰아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지. 사실 수호자는 네메시스 파괴하기 위한 존재야."

"그러니까 그게 왜……"

"재앙은 행성보다 한 수를 더 앞서 있었을 뿐이네. 네메시스를 죽이는 게 끝이 아니야."

안톤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에렌델이 왜 멸망했는지 궁금하지 않나?"

기억 속으로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결 같은 금발 머리, 앳되지만 아름다운 얼굴의 여성.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홍연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 손녀 신시아. 마법사로 키우려고 했더니 이놈의 망할 행성이 이 아이를 수호자로 만들었네."

신시아의 부모는 마인들과의 전투로 목숨을 잃었다. 신시아는 고아가 됐고, 안톤이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여 키웠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같이 생활했고 깊은 유대를 나누었다.

17살이 된 신시아는 부모의 복수를 위해 마인을 사냥하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다. 19살이 될 땐 이미 최강, 누구도 막을 자가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고 사람들은 그녀를 '에렌델의 성녀'라고도 칭송했다.

그리고 신시아가 스무 살이 됐을 때, 네메시스가 나타났다.

극강의 마법사들을 다수 보유한 에렌델인들은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네메시스를 막아냈다. 마지막 순간엔 신시아가 네메시스를 검으로 찔러 파괴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네메시스의 영혼은 자신을 죽인 신시아에게 들어갔고, 비로소 네메시스는 완전히 각성했다.

타락한 신시아는 단신으로 세계를 멸망시켰다. 고작 석 달여 만에 2개 제국과 17개 왕국이 무너져 내렸다.

인류는 몬스터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자위력마저 잃어버렸고, 세상은 몬스터 천국이 됐다.

그렇게 에렌델은 사라졌다.

"이제 알겠나?"

기억이 걷히고 안톤이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네메시스를 죽이지 않으면, 끝없이 증식하는 몬스터에게 세상이 멸망할 걸세. 네메시스를 죽이면, 네메시스를 상처입힐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수호자가 타락해서 세상을 멸망시키겠지."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걸 찾는 게 마탑주인 자네의 몫이네만."

안톤이 나를 바라보았다.

"수호자가 네메시스를 죽이도록 유도한 후, 그 수호자와 네메시스를 자네가 한 번에 없애는 방법도 있겠지."

지금 나더러 홍연을 죽이란 소린가?

내가 따지려 하기도 전에, 내 몸이 시련의 마법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의 정리가 끝나면 돌아오게."

* * *

시련에 나온 뒤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 동안 넋 놓은 채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네메시스를 앞둔 바쁜 시기에 뭐하는 짓이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시련에서의 일은 내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오빠야! 오빠야!"

은솔은 오늘도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재잘재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던 그녀가 갑자기 샐쭉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빠야.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뭐라고 했지?"

"오빠야 바보!"

"악!"

그녀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나는 그대로 상체가 아래로 꺾이게 됐다.

"요 며칠간 오빠야 좀 이상한 것 같아!"

타악.

그때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진보라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선배님. 시련에서 무슨 일 있었죠?"

……5년 후의 진보라는 정말 못당해 내겠다.

"별일 없었는데."

"별일 없었으면 왜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건데요? 8층 시련의 주제가 뭔지, 거기서 뭐가 나왔는지. 원래 그런 거 저희한테도 말씀해 주시고 같이 의논도 하고 그랬잖아요."

"의논할 거리도 안 되는 거라서."

그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뭔가 있어."

그때였다. 허공에 빛무리가 모여들며 에아가 나타났다.

"탑주, 7층 관리자 후보가 도착했습니다."

"응, 올라오시라고 해."

다행히 타이밍 좋게 일이 생겼다.

진보라가 의심의 시선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아, 오빠야 방해하지 말고 이제 내려가자."

"웅? 싫어어! 오빠야랑 더 놀 거야!"

중학생의 극심한 애정결핍에 대해선 어떤 기관에 상담하는 게 좋을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너희도 앉아 있어."

"어머, 그래도 돼요?"

"너희도 관리자잖아. 이건 일종의 면접이니 깐 평가나 좀 도와줘."

"오빠야 최고!"

잠시 후, 마법진 엘리베이터가 번쩍이며 낯선 인물이 나타났다.

나이는 40대 초반에 날카로운 눈매, 마른 몸에 하얀 가운을 걸쳤다.

이 사람이 7층 관리자 후보.

"데릭 로스바쉬라고 합니다."

미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이자 괴짜.

중간에 플레이어로 각성하긴 했지만 계속 과학자로서 일했다. 현대의 '헌팅 디바이스'라는 무기의 베이스를 만들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악수를 했다. 에아는 차와 디저트를 머릿수에 맞게 내왔다.

"정말로 제 제안을 받아들이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의외였다고 해야 할까요."

데릭이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묻습니다. 제임기는 6개월, 그동안 프로젝트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마탑 7층의 정보들은 물론 이계의 데이터까지 열람이 가능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데릭이 고개를 쭉 땠다.

"그리고 임기가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가도 붙잡지 않겠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진보라와 은솔이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녀들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오히려 의구심이 드네요."

데릭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그동안 마탑은 내부 기술이나 시설에 철저한 보안을 유지해 왔지 않습니까. 왜 이제 와서 당신들의 기술들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죠? 저뿐만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과학자 중 마탑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마탑주님의 저의가 궁금합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내가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

"돈 몇 푼 더 벌자고 기술 숨기고 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 6개월 뒤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전 인류가 힘을 합쳐야죠."

"공익을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감수해야죠. 7층 데이터는 물론 마공학 관련 기술 전부 내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그 자료들을 이용해 뭘 만들든 그건 댁들 자율니다. 대신 6개월 안에 어떻게 해서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세요. 제 요구는 그것뿐입니다."

"으음."

데릭이 콧잔등을 눌렀다.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데에는 최소 단위가 3년입니다. 6개월은 너무 빡빡한……"

"아, 자꾸 빼는 소리 하시네. 자신없어요?"

이번엔 데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계속 말했다.

"기술 빼가도 좋아. 니네 조국으로 돌아가도 좋아. 돈이니 재료니 원하는 거 다 구해다 준다니까? 맨날 당신네들이 하는 소리가 그거 아닙니까, '한정된 정부 재원으로 가지고 뭘 만들라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싹 다 지원해 주겠다고요. 그러니 이번엔 시간이 문제? 그냥 평생 변명이나 하면서 사세요 그럼."

쾅!

그가 무릎으로 테이블을 찍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겠습니다. 7층 프로젝트 총 책임자."

"각오는 좋네요. 하지만 데릭 씨가 원한다고 해서 그냥 막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진 엘리베이터에서 사복 차림의 남녀 다섯 명이 마탑주의 방으로 몰려 들었다.

"데릭! 당신이 왜 여기……!"

"저 쓰레기 얼굴을 여기서 또 보네."

"내가 아직도 노벨상 건 잊은 줄 알아?"

다들 아는 사이인 듯했다. 몇몇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나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네, 여러분 모두가 후보이십니다."

과학자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천재 중의 천재들, 이들은 자신들을 경쟁시키려는 내 속셈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게 건방지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선 당근을 뿌릴 생각이다. 에아가 테이블 위에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이건 마탑 7층에서 발견된 자료들의 복사본입니다. 한번 훑어보시죠."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펴본 과학자들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DNA 비접착 공정? 이런 기술이 존재한다고……?"

"마나 제어 기술도 현대보다 최소 30년은 앞서 있군."

마공학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술. 한번 다른 차원의 기술에 맛을 본 이상, 과학자라면 이제 빠져나가지 못한다.

과학자들이 서류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깍지를 꼈다.

이제 내가 주도권을 잡았다. 내 의도를 알고도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30분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홱 들었다.

"자료를 취합하시고 프로젝트 총책임자가 됐을 때 6개월간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걸 다 듣고 총책임자를 뽑도록 하죠."

나는 박수를 짝쳤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 중 누가 최고일지 저도 기대되네요."

과학자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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