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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13화 (313/337)

나 혼자만 마탑주 313화

[……흠.]

총통이 홍연을 발견하고는 턱을 쓰는 시늉을 했다.

[그 끔찍한 붉은 머리. 그래, 네가 그 여자의 동생이구나.]

총통을 올려다 본 홍연이 인상을 썼다.

"마인 따위가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총통이 히죽거렸다.

[네 언니에게는 많은 신세를 졌지. 그 붉은 머리칼을 볼수록 몸이 쑤셔.]

"그렇습니까?"

홍연의 검 끝에서 적광기가 살벌한 기세로 휘몰아쳤다.

"그럼 더 이상 쑤실 일 없게 만들어 드리죠."

[앤더슨, 이 여자를 막아라.]

총통이 명령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앤더슨!]

"이자를 찾나?"

총통이 고개를 돌렸다.

한 도마뱀 마인의 몸이 어느새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임남진이 손가락으로 툭 치자, 동상이 후두둑 무너졌다.

-2급 허일, 합류한다.

-3급 안세현, 합류합니다!

대한민국 굴지의 헌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총통은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느긋하게 만담을 나누기엔 때가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멈춰!"

홍연이 마인들을 베어 넘기며 달려갔다. 다른 헌터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쉽지만 회수할 건 회수해야지.]

부하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총통은 소심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대로 소심희를 데려갈 생각인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에아, 이제 배리어는 네가 유지해줘!'

-알겠습니다.

윙골렘을 작동시키고 최고속도로 날아가는 그때, 나는 그다음에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총통의 날카로운 발톱이 소심희의 가슴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안돼!"

찢어질 듯한 차도연의 외침이 들렸다.

'이게 무슨……!'

총통의 발톱으로부터 소심희의 에너지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소심희의 몸이 점점 말라비틀어지더니, 이내 바싹 마른 미라처럼 변했다.

[각별한 맛이군.]

총통이 팔을 떼며 웃었다. 차도연이 울부짖으며 빛 속성 마법들을 퍼부어댔지만 총통의 피부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이별에 슬퍼 말거라 아이야. 이제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목숨이 경각에 달할지어니.]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검은 용이 다른 공간 속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순간, 용의 주홍빛 눈이 움직여 나를 향했다.

[6개월 뒤에 보자 김유신, 그리고…….]

눈동자가 홍연으로 향하는 순간, 총통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앞으로 기대하마. 수호자.]

* * *

쌀쌀한 밤바람이 부는 저녁.

폭풍 같은 사태가 지나간 뒤에 남아 있는 건 무너진 식당의 잔해들과 핏자국뿐이었다.

나는 적당한 곳에 걸터앉아 인부들이 식당을 수습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거 다 물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홍연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프렌차이즈 로고가 붙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당연히 내 건 생강 라떼겠지?"

"그냥 따뜻한 카푸치노예요."

"센스 없긴."

그녀가 샐쭉한 표정으로 팔을 거두자 나는 얼른 사과하면서 다시 커피를 받아냈다.

우리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저 정도야 뭐……"

나는 무너진 식당 건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감당할 수 있어. 서울 타워가 무너졌으면 좀 귀찮았겠지만."

"서울 타워도 귀찮은 정도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도치 않게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바쁘신 분들까지 다 데리고오고."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총통의 개입은 누구도 예상 못한 변수였고, 마인이 한국에 넘어왔다면 애초에 저희 협회가 나설 일이니까요."

나는 다리를 쭉 펴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크게 손해 본건 없다.

총통이 끼어들어 상황이 꼬였지만 다수의 마인들과 총통이 아끼는 부하까지 제거했고, 어차피 소심희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거두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꿀꿀한걸까.

"소심희 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날 좋아했대."

"……아."

"솔직히 난 전혀 몰랐어. 내가 의식불명이 됐었을 때 소심희는 안톤의 목걸이를 빼돌려서 내 환상을 만들었고 쭉 그 허상 속에서 지냈나 봐."

"마인으로 변하기 좋은 환경이었네요."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죄책감이 말끔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홍연은 웃는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총통은 6개월 뒤에 보자고 했어요. 역시 마인들은 네메시스 때 총공세를 펼칠 생각으로 보여요."

"그렇겠지."

"워프게이트 좀 빌려 줄 수 있어요? 중동으로 가서 마인 잔당들을 정리해 두고 싶어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더 큰 위협으로 돌아올 테니까."

"사미아한테 말해서 차원관 마법사들 몇 명 붙여줄게."

"감사합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네가 이 이야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

"……?"

"언니에 대해서 뭔가 더 들어온 정보 있어?"

홍연이 시선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퇴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춘 전협회장 홍율.

그녀에 대해선 소문만 무성할 뿐, 지금껏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 정부 측에서 수색대를 파견한 적도 있었다는데, 모두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마치 세계에서 사라진 것처럼 이렇다 할 흔적이 없다.

"……그리고 전 언니의 몸 상태를 떠나서, 언니가 전선에 복귀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녀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언니는 언니의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홍율이 인류를 위해 어떤 공헌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심각한 부상을 참고 싸워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네메시스 때 홍율이 와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그냥 이기적인 내 바람일 뿐이겠지.

"그럼 이제 선배는 남은 시간 동안 뭐 하실 거예요?"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 쭉 밀고 나가야지, 그리고……"

머릿속에 그 총통의 능글맞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레벨업을 해야 할 때가 온것 같다."

* * *

[시련의 마법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탑으로 복귀한 나는 7층 꼭대기에 올라왔다. 8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시련의 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마탑의 최상층인 9층 '마탑주의 방'은 처음부터 개방되어 있었으니까 이게 마탑의 마지막 시련인 셈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8층 시련에 대해, 안톤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내 운명을 저주한다.]

고작 이 한마디가 끝.

8층 시련은 무엇을 테스트하는지, 어떤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지, 단한 줄도 나와 있지 않았다.

저 문장을 끝으로 안톤의 일기도 끝이 났다.

'괜히 불안하게.'

나는 시련의 마법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어둠이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만 같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가자, 에아."

-네, 탑주.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도전한다."

두 다리가 붕 떠오르는 부유감과 함께 내 몸이 시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동안 나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

누가 나오든 뭐가 상대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잠시 후, 두 다리가 지면을 딛는 게 느껴지자 천천히 눈을 떴다.

폐허였다.

에렌델 양식의 건축물들이 무너져 있고, 하늘에는 잔해들이 무중력 상태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때.

"어서 오게."

깜짝이야.

귀에 익은 목소리에 등을 돌리자, 아는 얼굴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안톤 대선배님!"

내 반응을 본 안톤이 팔짱을 꼈다.

"자네는 나를 알고 있군?"

역시 진짜는 아니다.

4층 시련 때, 안톤은 자신의 분신을 시련에 심어두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경우인 것 같다.

"당연히 알죠. 대선배님의 도움으로 이전 시련들을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이번에도 대선배님의 과제를 수행하는 겁니까?"

안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8층 시련을 설계한 건 내가 아니라 초대 마탑주님이라네. 하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시련을 진행하면 후배들이 혼란스러워할 것 같아서 말일세, 내가 친절하게 첨언을 곁들이기로 했지."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안톤이 턱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질문하나 하지. 자네는 '마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6층 시련 도중 에렌델에 갔었을 때 안톤에게 직접 들었던 물음이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재앙이 시작될 전조입니다."

안톤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제대로 알고 있군!"

마나는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힘이다.

하지만 행성이 일정 수명에 이르면 대기 중에 마나가 생성되기 시작하는데, 아직 규명되지 않은 현상인 '의지'가 마나를 재료로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안톤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마나 때문에 재앙이라는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플레이어라는 '백혈구'가 생성된다. 그리고 마탑은 외부에서 수혈되는 '백신'이다.

"그동안 우리는 마탑에 대해서만 주로 이야기했을 걸세. 그럼, 이제 플레이어 쪽을 한번 이야기해 볼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세상에 재앙을 만들어내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그에 반대되는 의지도 있다네. 그게 뭔지 알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행성. 세계가 재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의지일세. 세계도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 그런가요? 저는 체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탑주.

그때 에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발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톤도 기척을 감지 했는지 그쪽을 보고 있었다.

"왔군."

"뭐가 왔다는 거죠?"

"8층 시련은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단 한 차례의 '보스전'만 진행된다네."

시작하자마자 바로 보스전이라고?

갑자기 긴장감이 훅 몰려든다.

"어떤 보스인데요?"

"나도 모르네."

안톤의 대답에 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8층의 보스는 행성마다 바뀐다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탑은 지금부터, 이 행성을 멸망시킬 존재를 보여줄게야."

섬찟한 기분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에이, 말도 안돼요! 그럼 저 혼자서 11랭크 네메시스를 상대하란……!"

"네메시스가 아닐세."

아직은 거리가 멀었지만 데바의 눈으로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몸집은 크지 않았다. 딱 인간 정도의 실루엣. 어둠을 뚫고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것이 뭔지 알아차렸고.

"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몸에 달라붙는 헌터 슈트 차림에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

다름 아닌.

"홍…… 연?"

그녀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하게 식은 얼굴로 검을 세운 채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는 홍연이었다.

"……대선배님."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눌러 담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세상이 홍연에게 멸망한다는 소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네."

안톤이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탑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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