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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07화 (307/337)

나 혼자만 마탑주 307화

옆방을 빌렸다. 나와 한윤정은 단둘이 마주 앉게 됐다.

그녀의 분위기도 못 본 새 많이 바뀌어 있었다.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는데, 나이를 먹은 한윤정은 좀 더 과묵하고,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한국에선 고마웠어."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운을 띄웠다.

"그때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 이집트 일로도 바빴을 텐데, 이렇게 바로 넘어와 줘서 고맙다야."

"……."

그녀가 한 모금 마신 찻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고맙다는 말하려고 부른 거야?"

"음?"

"넌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아?"

……원망이라.

5년 전, 나는 알베르전을 앞두고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처음엔 함께 싸우기로 했지만 이집트 내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그녀는 내 도움을 거절했다.

나는 그녀 없이 알베르와 싸우러 갔고, 그 싸움에서 의식불명이 됐다.

만약 그녀가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아니, 한윤정이라면 틀림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평소엔 온갖 쿨한 척은 다 하고 다니지만, 사실 상처를 많이 받고 자조가 심한 타입이다.

"다 지난 일이잖아. 그리고 그때는 네가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고."

"바빠……?"

그녀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기억 안나? 네가 마인이 된 나를 구했어! 정말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비전투계에 불과했던 나를 파라오로 만들어준 것도 너잖아! 그런데 난……!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내 개인 사정 때문에 거절했어. 난 진짜……"

그녀가 손바닥으로 머리를 마구 쓸었다.

"구제 불능이야."

"……."

이런 심리상태의 한윤정은 위험하다. 그녀는 이미 한번 마인이 된 전적이 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그냥 내 생각을 말하자면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팔을 벌렸다.

"난 괜찮아. 진짜로. 리얼리."

"……."

"초임 파라오, 외국인, 거기에 낙하산. 내부 눈치 많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네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나도 별말 안 한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면."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네가 갔으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만이야."

"……."

"당시 최전성기였던 알베르는 정말로 강했어. 마르첼로도, 마리도, 샴도, 그냥 다 나가떨어지기 바빴지. 네가 왔어도 내가 타이탄으로 변하는 결말은 바뀌지 않았을 거야. 네 잘못이 아니니까 묵힌 감정이 있으면 좀 풀어버려."

그녀는 조그맣게 뭐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미안하다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말은 또 참 못 해요.

"자, 그럼 이제 우울한 이야기 그만하고 일 이야기로 넘어갈까?"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건 필과도 이야기된 내용이야."

나는 재앙 네메시스에 대해, 그리고 공략대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필의 반응은 어땠는데?"

"부정적."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봐도 이 계획은 현실성 제로야."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

그녀가 테이블 위에 스크린 패드를 놓고 버튼을 조작했다.

그러자 홀로그램으로 세계 지도 화면이 나타났다.

"지금 국제 정서가 선발대는 커녕, 파견도 잘 안 보내려는 추세란 건 너도 알지?"

"잘 알지."

"그리고 아프리카를 통치하는 입장에서 내 견해를 들려주자면……"

그녀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돌려 아프리카가 중앙에 오도록 했다.

"아프리카는 넓은 영토에 비해 헌터 전력이 가장 부족한 대륙이야. 네가 말한 그 탑들이 떨어지면 수 시간 내에 주요 도시들이 점거당하고, 전 대륙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겠지."

그녀가 홀로그램 지도에 빨간 버튼을 검지로 꾹 누르더니 지도에 대고 그었다. 붉은 선이 그녀의 검지를 따라 그려진다.

"그걸 그나마 커버해 주는 게 묘지기 파견이야. 묘지기 한 명 당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자, 이런 상황에 네가 묘지기 전력 상당수를 인류 공용 전력에 투입할 것을 요청했어."

그녀가 손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나는 오른쪽 눈썹을 긁적거렸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것 같네."

"있을 것 같은 게 아니라 대다수가 못 받아들이겠지!"

"그러는 너는 어때?"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

"……."

최선을 다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 이번에도 혼자 가야지 뭐."

"……."

"네 사정이 가장 중요하니까."

얼굴이 확 붉어진 그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아, 알았어! 알겠다고! 나 개인적으로는 참가할게!"

"오케이, 아프리카의 통치자. 메네 스 1급 헌터 참가 확정."

내가 수첩에 그녀의 이름을 꾹꾹 눌러썼다. 그녀가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너."

"뭐가?"

"엄청 치사한 거 알지? 아깐 날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솔직히 좀 감동했는데…… 사람의 죄책감을 협상의 도구로 사용해? 내 감동 물어내 새끼야!"

그녀가 근처에 놓인 휴지를 던졌다. 나는 고개를 꺾어 피하며 말했다.

"자, 아직 협상 안 끝났어요. 묘지기들은?"

"안 된다고! 이 미친 놈아! 내 개인적 일탈에 묘지기들까지 동원하는 건 많이 힘들단 말이야! 아님 최소한의 완충장치 같은 걸 마련해 주든가!"

"알겠어."

더 이상 전력을 요구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억지다. 한윤정도 저렇게 확실히 선을 그을 정도니까 뭔가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야, 말 나온 김에 말인데."

주위를 휘휘둘러 보던 그녀가 사뭇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미아 그 여자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다시 우리 관리자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한윤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지금 아프리카 상황 꽤 복잡한 거 알지?"

현재 이집트의 정책은 하나로 줄여 말할 수 있다.

One-Africa.

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통일을 꿈꾸고 있다.

그런 이집트의 행보에 반발하며 유일하게 독립을 선언한 세력이 바로, 사미아가 속해 있는 탄자니아를 중심으로 한 동아프리카 전선이다.

수 많은 협상들이 결렬된 뒤 두 쪽 모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다. 이집트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다.

"잘 알지."

"근데 굳이 그 여자를 관리자로 받아들인 건 뭐야? 그리고 관리자 한다고 했으면 한국으로 갈 것이지. 왜 또 동아프리카 사령관 자리는 유지하는 건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선배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사미아만큼 워프공학에 뛰어난 인재가 없어. 곧 있을 네메시스를 막으려면 유능한 5층 관리자는 필수야."

쿵!

그녀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으르렁거렸다.

"야! 진짜 이럴 거야? 나는 파라오자리 내려놓을 각오하고 공략대에 참가하는 건데! 내가 중요해? 사미아가 중요해?"

"에이, 유치하게 왜 이러시나. 그리고 공략대는 참가한다고 나한테 생색낼 게 아니라 참가를 안 하면 지구가 멸망해요."

그녀가 분한 듯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아으, 김유신 진짜……! 그때 일만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묶어놓고 두들겨 패는 건데!"

"그럼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질게."

내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프리카 통일 그거 꼭 해야 하는 거야?"

"어."

"왜?"

"그게 지금 이집트가 나아가는 방향이고, 가장 중요한 숙원이니까."

그녀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국가적 이기주의를 위해 힘써야 할 의무가 있는 이집트 파라오야. 세계적 공익보다는 나라의 이익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상대가 너니까 아무 말 안 한 거지, 엄한 사람이 들먹였으면 바로 대가릴 터뜨려 버렸을 거야. 알아?"

"그러니까 내 질문은 아프리카 통일이니 염병이니 그걸 네메시스 재앙 전에 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녀가 한 템포 물러나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소강상태가 진행되다가 그녀가 말했다.

"다음 주에 탄지니아를 칠 생각이었어."

"미쳤네."

"날림으로 결정한 게 아니라 무려 3년 동안 준비한 계획이야."

그녀가 고개를 쭉 빼며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빌게. 탄자니아에서 발 빼."

"너야말로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마탑의 선전포고 소식은 들었지? 네메시스 전에 전쟁이니 뭐니 쓸데 없는 거로 싸우는 것들은 내가 용납 안 해. 더욱 이 너희들의 타깃이 우리 동료가 속해 있는 나라라면 마탑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겠지."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너 X발 보자 보자 하니까 지랄이 너무 심한데? 니가 용납 안 하면 뭐 어쩔 건데?"

나는 빙그레 웃었다.

"카이로를 점령한다. 묘지기들은 모조리 붙잡아서 개목걸이 채우고 네메시스에 밀어 넣을 거야."

"오, 그래?"

그녀의 입가가 비틀렸다.

쿠구구구구구구구!

"한번 해봐."

아무것도 없는 방안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집무실 바닥에 모래가 쌓여가기 시작한다.

"내가 못 할 것 같냐?"

콰콰콰콰콰콰콰콰!

이번엔 내 몸에서 푸른 마력이 솟구친다. 모래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순도 높은 마력이 채워진다.

내 오른눈에는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달칵!

"무, 무슨 일 입니……! 허어억!"

경비병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거대한 마력의 파장에, 그들은 안을 들여다보자마자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파라오님! 마탑주님!"

"여기서 두 분이 싸우시면 본부가……!"

"자, 자."

짝. 짝. 짝.

박수를 치며 방 안으로 냉큼 방 안으로 들어온 건 사무총장 필이었다.

"에헤이! 뒤에 후배들도 보는데 1급 분들끼리 왜 그러십니까. 자, 진정들 하시고."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나와 한윤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말로 풀죠! 대화. 대화가 평화의 지름길입니다! 제가 직접 중재하겠습니다."

한윤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세웠다. 창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안에 있던 모래들이 깔끔하게 밖으로 사라졌다. 나도 마력을 갈무리해서 허공에 흩뜨렸다.

주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너희는 나가봐."

"예!"

경비들이 물러나고, 필이 우리의 가운데에 앉았다.

"그럼 무슨 일인지……"

"자,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네메시스가 끝난 뒤로 유보하고, 일단은 재앙에 집중하자."

그녀가 웃었다.

"바보야, 전혀 대화가 진전된 느낌이 아닌데?"

"만약 네가 동아프리카 전선을 공격하면, 우리는 이집트에 설치해 둔 모든 필드마법을 철수시킬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묘지기들에게는 표어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묘지기는 이집트를 지킨다.'

폐쇄적이고, 언제나 자국 내의 일에만 집중하던 이집트가 갑자기 왜 이렇게 외부의 일에 신경 쓰고 세력확장에 나설 수 있게 된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묘지기들이 활동하던 나일강 일대의 무수히 많은 통제구역들이, 4층의 필드마법으로 차단해서 관리가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자연히 이집트와 묘지기들은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만큼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마탑이 필드마법을 풀어버린다면 이집트는 다시 5년 전 과거로 돌아간다.

"나대용 때는 뭐, 사미아를 견제하느라 싼값에 필드마법을 팍팍 깔아준 것 같지만 이제는 정권이 좀 바뀌었거든?"

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필드마법 사용료 정상가로 올려 받을 거야."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야 이 씹!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어?"

"음, 아니지. 당장 다음 달에 전쟁을 일으킨다는데, 내가 지금 이거 터뜨리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야……! 야!"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흔들었다.

"내가 지금 김사랑 씨한테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이집트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거야. 어쩔래?"

"이이……! 이이이이……"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던 한윤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과연 어떤 끔찍한 욕설을 할…….

"이 치사뽕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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