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303화
우리는 천천히 지상에 내려왔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뻗어나갔다.
굳이 에아에게 생명 반응 체크를 부탁하지 않아도, 아직 놈이 살아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자, 데려왔어."
내가 그녀를 내려주며 말했다.
"전투 쪽은 맡겨도 되지?"
"물론입니다."
홍연이 앞으로 나오며 검을 쥐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흉측하게도 생겼네.'
알렉산드로는 마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양처럼 울퉁불퉁한 살덩이 사이에 팔다리가 보였고, 움푹파인 눈구덩이에는 각각 여섯 개씩의 눈이 달려 있었다.
입 대신 수염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살덩이가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고 있다.
-조심하십시오. 탑주.
에아가 경고 했다.
-미지의 힘을 보유한 마인입니다.
마인의 수염이 움직였다. 주위의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균열이 열리고,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온다.
홍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균열을 조종하는 마인이라니, 들어본 적 없어요."
"거물급인 건 확실하네."
왜 그동안 카니발랜드만 균열 사태가 나타나지 않은 건지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저놈은 반드시 여기서 잡아야 해."
"네, 무조건."
적당히 홍연한테 맡기고 빠질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여기서 놈을 확실하게 죽인다.
"다들 나와."
케일 (Cheir).
소마 (Soma).
옵스 (Ops).
카디아 (Cardia).
네 개 속성의 7공정들이 허공에서 회전했다. 내가 가슴에 마법진을 그려 넣는 것으로 모두 내 몸으로 빨려 들었다.
<김유신 오리지널 - 디포메이션 마에스터>
등 뒤로 눈부신 푸른 날개가 펼쳐진다. 날개는 깃털로 분해되어 허공에 휘날리고, 몇 장은 내 몸에 붙는다. 깃털들은 섬유 재질로 변해 불꽃 같은 청색 슈트를 수놓는다.
마치 히어로의 변신과정 같은 모습이다. 옆에서 보고 있는 홍연의 표정이 볼만 했다.
손가락 끝을 세웠다. 마나 대신 깃털 한 장이 손끝에서 창조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솟아난 무수한 깃털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날아갔다.
깃털들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형태변화를 시작했다. 깃털의 색이 하얗게 변하더니 크기가 굵직해지며 몸체와 손잡이가 생겼다.
그것은 내 애검인 스펙터의 모습으로 변했다.
7공정으로 만들어진 100개의 스펙터가 강강수월래처럼 원을 그리며 회전했고,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진짜 스펙터까지 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선배. 옵니다."
알렉산드로가 균열로 불러모은 몬스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 위로 치켜든 팔을 내렸다. 시위에 걸려 있는 활처럼 흔들리던 스펙터들이 순백의 꼬리를 그리며 쏘아져 나갔다.
퍼억! 콰드득! 우득!
스펙터들이 몬스터들의 몸에 박히며 핏물을 터뜨린다. 전면의 몬스터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물러나는 사이, 다른 몬스터들이 비집고 앞으로 나온다.
나는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옆으로 꺾었다.
촤아아악! 촤악!
검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몬스터의 목을 베고 들어가 다른 몬스터의 심장을 관통하고, 알아서 빠져나와 또 다른 몬스터의 팔을 자른다.
100개의 검들이 서로 다른 궤적과 움직임으로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병사들이 싸우는 것과도 같다.
나는 깃털 몇 가닥을 뽑아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깃털들은 분해되어 구성요소로 재조립되더니 화로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내 새로운 깃털 하나를 뽑아 화로에 떨어뜨렸다.
<플레임 타우로스>
화로 안에 들어간 깃털이 불살라졌다. 그러자 100개의 모든 스펙터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더니, 몸체에 동시다발적으로 플레임 타우로스 마법진이 그려진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몬스터들이 폭발에 집어삼켜지고, 다시 한번 스펙터들이 스스로 움직여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한다. 스펙터를 부수려는 몬스터들의 공격은 공허하기만 했다.
펄럭!
그때 폭발 연기를 뚫고 박쥐 날개를 단 비행형 몬스터가 단독으로 날아왔다.
'로드 가고일?'
카타클리즘 재앙에서 천공성을 운용할 때 공격해온 몬스터다. 역시 알렉산드로가 배후에 있었던 것 같다.
스르르르릉!
돌진하던 로드 가고일의 몸에 무수한 금이 그어지더니, 이내 몸체가 직사각형으로 분해되어 떨어진다.
"선배."
홍연이 굽힌 무릎을 펴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알렉산드로가 몬스터를 무작위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폭발 연기 속에서 몬스터들이 좌우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민간인들을 공격해서 우리의 시선을 끌고, 그사이 자신은 도망칠 생각이다.
"내게 맡겨."
나는 오른쪽에 낀 이어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사미아. 부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헌터.
즉각 내 주위로 워프게이트가 열리더니, 비행선들이 슝슝!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당구장 테이블만 한 크기의 비행선들은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추월하고는 아이언 골렘의 형태로 변신해 내려왔다.
도합 스무 기의 아이언 골렘이다.
-골렘 전 기 AI가 탑재됐습니다. 컨트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싸울 수 있습니다.
'그거 좋네. 그럼 에아는 계속 스펙터에 신경 써줘.'
나는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고 있던 스펙터들 중, 스무 자루를 빼돌려 골렘들 쪽으로 날려 보냈다.
공중에서 2차 형태변화가 이어졌다. 큼지막한 장창의 형태로 바뀐 스펙터들이 골렘들의 손안에 들어온다. 중갑기사가 된 아이언 골렘들이 거칠게 돌파하여 몬스터들의 몸에 장창을 쑤셔 박는다.
"이걸로 급한 불은 껐고."
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아아아아아아악!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홍연의 검격 한 번에 걷힌다.
내가 몬스터들의 숫자를 줄여놓자 순식간에 중심으로 파고들어 간 그녀는, 바로 몇 미터 앞에 알렉산드로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알렉산드로는 좌우에서 있는 몬스터 중한 마리를 홍연에게 보냈다. 얼굴에 이목구비가 없고, 전신에 진홍빛 섬광이 번뜩이는 인간형 몬스터였다.
꾸우우우웅!
그녀의 검과 몬스터의 주먹이 부딪히자, 의외로 홍연이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저건?'
-데이터에 없는 타입입니다. 최소8랭크 이상의 이레귤러 추정! 단신으로 대재앙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괴물입니다.
두 주먹을 앞세우는 몬스터의 자세는 마치 격투술을 연상케 했다. 홍연이 이를 악물고 달려 들었고, 몬스터도 잔상을 그리며 뛰어든다.
채재재재쟁!
검격과 주먹이 잔상이 수없이 부딪치며 온 천하에 불똥을 터뜨린다.
그때 오른쪽에서 대기하던 녹색의 몬스터가 하늘로 뛰어올랐다.
몬스터의 몸통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더니 이내 10층 건물 크기의 거대한 드릴로 변해 홍연에게 떨어졌다.
진홍색은 뒤로 물러났고, 홍연은 내려오는 드릴을 향해 검을 세웠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각!
그녀가 딛고 있는 바닥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10층 건물 크기의 드릴에, 너무나도 작아 보이는 홍연은 검 한 자루만 쥔 채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위험해.'
내가 나서려는데 주위의 허공이 후웅! 후웅! 소리를 내며 일그러진다.
-탑주! 진홍색 이레귤러가 옵니다!
나는 데바의 눈으로 마력의 흐름을 캐치하고 고개를 젖혔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의 주먹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눈 위로 내질러진다.
이레귤러의 주먹이 뻗어 나간 전면으로, 트위스트 놀이기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미친……!'
기구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진홍색 괴물이 뻗은 주먹을 회수하는 것보다 빠르게, 나는 놈의 상체에 바짝 붙어서 다리를 차올렸다.
<데바스타>
그대로 내 오른발이 놈의 턱에 명중했다.
아니, 명중했다고 생각했다.
검은 연기 속에서 몬스터가 팔을 내려 내 발을 받아낸 모습이 보인다.
몬스터가 그대로 내 오른발을 쥐었지만, 나는 즉각 몸을 띄워 왼발을 차올렸다.
투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데바스타.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다.
녀석의 턱이 젖혀지며 오른발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린다.
그 사이에 거리를 벌렸고, 몬스터는 한번 휘청거리더니 나를 노려본다.
눈구덩이 같은 건 없었지만 내 쪽으로 살기를 보내고 있는 건 명백했다.
"좋아."
나는 팔을 뻗어 진짜 스펙터를 손안에 불러들였다. 스펙터의 겉면에 깃털이 올라오더니 마법진으로 변모했다.
"한번 제대로 붙어봐?"
[…….]
몬스터가 주먹을 불끈 쥐며 뛰어오는 그때.
쩌억!
다시 원래의 색깔로 돌아온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홍연의 드롭킥이 몬스터의 안면에 꽂혔다.
몬스터는 지면을 부수고 수백 미터를 날아갔다. 제자리에 착지한 홍연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어, 너 위기인 줄 알았는데."
"제가요?"
그녀가 뒤를 가리켰다.
아까 드릴로 변해서 내리꽂던 녹색의 몬스터는 바닥에 엎어진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 몸에서 액체 같은게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검이 깨진 건 조금 아깝네요."
그녀가 칼날이 반만 남은 검을 보이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게 썼나 봐요."
"어련하겠어."
잠시 숨을 돌리는 사0], 진홍색의 몬스터가 다시 하늘을 날아서 녹색의 옆으로 왔다. 우리도 뒤를 돌아보며 그들과 마주했다.
꾸득!
두 몬스터의 몸이 액체처럼 변해마구 뒤섞였다.
꾸드드드드드드득!
혼합된 두 색의 살덩이가 솟구치더니 이내 거대한 보라색 몬스터로 변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합체네."
"그러네요."
"우리도 뭐, 합체해서 싸워야 하나?"
"……저질스러운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알렉산드로가 보낸 몬스터들을 베고 있던 스펙터들이 한자리로 모여들어 다시 강강수월래를 돌았다.
나는 그 중간에 깃털을 날렸다. 깃털은 마법진이 되었고 백 자루의 스펙터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우우우우우웅!
"연아."
그녀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도 마법 한번 써보고 싶지 않냐?"
"……네?"
오른팔을 머리 위로 세워 들었다.
마법진에서 점성 있는 푸른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대검 하나가 흘러나왔다.
깃털처럼 표면이 삐쭉삐쭉 튀어나온 그것이 빛살처럼 날아와 내 손 안으로 착 들어왔다.
"빌려 줄게."
내가 대검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사실 이건 검이라기보다는, 4속성의 마법을 모두 담은 마법 덩어리.
검의 모습을 한 마법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대검을 받았다.
검을 받자 무게에 깜짝 놀랐는지 그녀의 다리가 위태롭게 한번 휘청거렸다.
"들 수 있겠어?"
"얕보지 마십시오!"
그녀가 이를 악물고 힘껏 대검을 휘둘러 어깨에 올렸다.
그사이 적녹이 합쳐진 몬스터가 주위의 건물들을 짓밟으며 우리에게 뛰어 들어왔다.
홍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래요. 한번 써볼게요.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