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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01화 (301/337)

나 혼자만 마탑주 301화

저녁이 되자 마인은 식사를 하러 갔다. 우리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건물 테라스에 마련된 야외 레스토랑. 우리는 적당히 마인을 감시할수 있을 만한 구석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곧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니 간단한 음식들을 주문한 다음, 반짝반짝 빛나는 카니발랜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마침 이 테마파크의 백미인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케이크나 동물 모형을 본떠 만들어진 축제차량 위에 카니발랜드의 캐릭터들이 춤을 추고 노래한다.

길목마다 빼곡히 자리한 사람들도 캐릭터들의 춤을 따라하며 즐겼다.

노래가 무척 신났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였다.

"선배."

"왜?"

"고맙습니다."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 임무 같이 와줘서 고맙다고?"

"아뇨. 언니를 구해달라는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요."

갑자기 왜 몇 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건 프로스트 때 일 아니야?"

"네. 그때 언니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드려서요. 선배가 의식불명이 됐을 때 쭉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럼 받아줘야지."

내가 잔에 음료수를 채우고는 높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쨍!

우리는 잔을 맞부딪치고 각자의 입으로 가져갔다.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딱 선선한 날씨에, 자리도 명당이고 음식도 맛있다. 게다가 퍼레이드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니, 마인만 아니었으면 최고의 밤이었을 것이다.

"말 나온 김에 오늘은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줄게."

내가 말했다.

"5년 만이잖아. 더 하고 싶은 이야기 없어?"

"……."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이야긴 어떤가요? 전 사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어요."

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다.

"언니가 한참 헌터로서 일하고 있었을 때, 비각성자였던 저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어요.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콩쿠르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냈죠."

"오, 의외의 재능이네."

"그런데 '각성'은 정말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찾아왔어요."

그녀가 천천히 잔을 흔들었다. 주스가 찰랑 거리는 모습이 묘하다.

"저는 플레이어로 각성했지만 헌터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피아노가 너무너무 좋았으니까요. 제 고유 능력인 '수호자'는 학습 능력이 극의에 달하는 능력이에요. 이 능력 덕분에 피아노 실력을 짧은 시간 동안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어요. 하만……"

"하지만?"

그녀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제 음악은 죽은 음악이 되어버렸어요."

"……응?"

"제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어요. 네 음악에는 아무런 감정도, 여운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냥 기계가 연주하는 것만 같다고. 심상을 담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재능이 완전히 상실된 거예요. 프로 피아니스트로서는 사형선고였죠. 그때가 제 첫 방황기였어요."

"……."

그녀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퍼레이드 차량들이 지나가며 신명나게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 결국 헌터가 됐어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고, 내 꿈을 포기하고 선택해야만 했던 길이었어요. 그런데 이쪽 일도 무기 몇 번 슥슥 휘두르다 보면 다 끝나 버리는 거 있죠? 아무런 성취감도 기쁨도 동기도 없는 나날의 연속. 저는 제 능력을 저주라고 생각했고, 타성과 권태에 빠져 있었어요."

…… 처음 알았다. 그녀가 가진 힘이 그녀의 꿈을 희생시켰단 사실을.

"제 고민을 들은 사람들은 말했어요.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세상엔 너보다 못한 사람들 천지라고, 최강의 능력을 받았으면 인류를 위해 그 의무를 다하라고. ……저라고 이 능력을 원해서 받은 게 아닌데."

"이해해."

"그러다가."

그녀가 나를 보았다.

"아카데미에서 선배를 만났어요."

"아하. 그 발차기 사건……"

발차기 사건이라는 말에, 그녀는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듯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남들 다 보는 자리에서 저는 두번이나 선배에게 깨졌죠. 물론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어요. 세상엔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많고, 내가 다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어요."

"……."

"그러다 보니 욕심이 나는 거 있죠? 저도 선배처럼 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어요. 제가 강해질 때마다 선배도 더 강해져 있었고, 그 사실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았어요. 그런데……"

활기 넘치게 이야기하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선배가 의식불명이 됐죠."

그녀는 목이 타는 듯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가 세 번째 방황기였어요. 마인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죽이고, 감정 없는 피아니스트처럼 움직였어요. 꿈에 그리던 헌터 협회장이 됐고, 공인 1급이 됐지만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리 기쁘지 않았어요. 그냥 이제는 대헌터가 됐으니까 사람들을 지키는 의무감으로 살아왔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렌즈 속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빨아들이듯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방황이 끝난 것 같아요."

"왜?"

그녀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꼭 말로 해야 해요?"

가슴이 두근거린다.

퍼레이드 행진의 음악들이 윙윙거리는 이명처럼 들린다.

몬스터랑 싸우는 것도 아닌데, 왜시간이 서서히 느려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왜 집중력이 극도로 올라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상체가 기울어진다. 그녀도 상체를 기울였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우리는 홀린 듯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아름다웠다.

몇 번을 봐도.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고.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

그녀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이어마이크에서의 보고를 듣더니 말했다.

"선배. 메인 타깃인 알렉산드로 카를루스가 나타났습니다."

* * *

지휘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우리는 신속히 움직여 현장 근처까지 도착했다.

-아쉽네요 탑주. 사실 기대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크흠, 조용히 해.'

아까는 나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분위기가 사람을 홀린다더니.

"선배. 이쪽입니다."

이미 협회에서 잠입 루트를 쫙 준비해뒀다. 홍연은 환풍구를 톡톡 두들겨 보더니, 능숙하게 해체했다.

좁고 더럽긴 했지만 환경을 가릴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기어가야 했다.

'…….'

고개를 들면 다소 민망한 그림이 나오는지라, 나는 애써 대화를 이어나갔다.

"근데 우리가 빠지면 그 2급 위험도의 마인은 어떻게 해?"

"지금 막 임남진 선배님이 현장에 도착해서 커버 들어갔습니다."

"아하, 그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지."

환풍구에서 빠져나와 기둥 뒤에 몸을 밀착한 우리는 관계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신속히 반대 방향으로 뛰어 내려갔다.

"생각보다 알렉산드로의 움직임이 빨라요."

그녀가 달리며 말했다.

"아마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복잡한 카니발랜드에 차가 들어올 수나 있나?"

"지금은 퍼레이드 타임이니까요. 모든 길목에 교통통제가 되어 있으니까 차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그녀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오후 8시 5분, 퍼레이드는 9시에 끝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시간 안엔 모든 일이 일어나겠네. 사람들도 퍼레이드까지만 보고 나가려 할 테니까 너무 늦어지면 차로 빠져나가기 힘들겠지."

"네."

마침내 우리는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터널 같은 곳이었는데, 적당한 엄폐물이 보이지 않아서 아예 벽을 타고 천장의 파이프 위까지 올라와 몸을 숨겼다.

데바의 눈을 확장시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남자가 이석훈.'

카니발랜드의 대표이자 마인과 결탁하고 있다는 의혹을 가진 남자.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생각보다 젊었다.

그의 주위엔 열 명의 경호원들이 서 있었는데, 데바의 눈으로 확인해보니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중 다섯 명은 마나가 흐르는 검을 가졌다. 헌팅 디바이스를 사용하는 헌터라는 소리다.

저쪽도 시간이 별로 없을 터, 접선하려면 지금 뿐이다.

슬슬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흐른다.

-탑주, 왔습니다!

에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헤드라이트가 비치며 차량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세 대의 새까만 세단이 일렬로 멈춰 서고, 차 문이 열린다.

"저 사람입니다."

홍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1급 위험도의 알렉산드로. 사실상걸어 다니는 국가급 재앙이다.

두 사람이 악수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이 보인다. 홍연이 증거를 잡기 위해 군용 카메라를 들어 이 모습을 촬영했다.

"선배, 준비됐죠?"

"그래."

내가 침을 삼키며 대답하는 그때, 번뜩이며 날아온 한 줄기 섬광이 그녀의 카메라를 박살 내며 지나갔다.

"쥐새끼가 있군."

알렉산드로가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인들과 이석훈의 경호원들이 살기를 흘리며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었다.

"뭐, 됐네요."

태평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홍연이 박살 난 카메라를 내던졌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칩이 껴 있었다.

"메모리 칩은 챙겼습니다."

"나이스!"

그녀가 아공간 주머니 속에 칩을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한민국 헌터협회장 홍연입니다."

그녀가 공인증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구질구질한 설명은 안 해도 되겠죠. 국가 특별 안보법에 따라 당신들을 전원 체포합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폭력이 관여될 여지가 줄어들 겁니다."

"죽여."

알렉산드로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가 팔을 뻗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촉수 같은 것이 뻗어져 우리가 있던 파이프를 박살냈다.

나와 홍연은 늦지 않게 점프했다.

"그럼 머릿수부터 맞춰볼까?"

-알겠습니다 탑주. 골렘 온라인.

바닥과 벽에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골렘 도면이 펼쳐지고 마정석이 올라온다. 그러고는 주위의 소재를 이용하며 골렘으로 변한다.

5년 뒤의 은솔이 설계한 골렘볼에서 골렘이 만들어지는 속도는 고작 3초에 불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인들과 이석훈 일행을 포위한 골렘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달려 들었다.

"쏴! 쏴!"

겁먹은 이석훈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마력탄이 쏟아지지만 골렘들의 몸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비켜.]

알렉산드로 일행 몇몇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흉측한 몬스터로 변해 골렘에게 뛰어갔다.

콰콰쾅!

괴물과 골렘의 육탄전이 벌어지는 사이, 알렉산드로는 이석훈의 가방을 빼앗아 들고는 자신의 가방을 건네고 차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석훈 또한 도망칠 구멍을 찾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리고 있었다.

"포기하십시오."

홍연이 앞으로 걸어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에게 뛰어들던 마인의 상반신이 V자 모양으로 파인 채 날아갔다.

"이미 협회의 헌터들이 건물을 빈틈없이 포위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 홍연의 황금빛 눈동자가 살벌한 예기를 뿜었다.

"절대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녀를 본 알렉산드로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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