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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98화 (298/337)

나 혼자만 마탑주 298화

생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일단 내 인터뷰 영상 및 선전포고는 마탑의 부활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동시에 천공성을 차지하겠답시고 깡패처럼 찝쩍대던 몇몇 국가들도 깔끔하게 물러났다.

프랑스는 여전히 질척대며 고소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정서진의 로펌팀이라면 좋은 승부가 될 거라고 본다.

프랑스도 결국은 알베르가 있던 시절, 세계를 호령했던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지금은 명분도, 정치도, 힘도 부족하다.

하예린은 천공성을 돌려받았고, 내가 고용한 기술자들이 천공성 재건에 들어갔다.

또한 그녀는 협회로부터 정식 천공성주임을 인정받았으며 공인 헌터자격까지 받았다.

사실 이번 재앙에서 비전투계에 불과한 그녀가 악마와 싸우고 천공성을 움직인 건 심각한 위반행위긴 하지만, 협회장인 홍연이 깔끔하게 잘 처리해 주었다.

나대용 사건으로 일어난 잡음도 마찬가지. 그 대가로 나와 그녀는 거래를 하나 했다.

그 외에도 마탑 내부의 인선도 마무리됐다. 4층 기상설계국은 김사랑이, 6층 마나광산은 소심희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정서진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 7층에서 일할 학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핵심 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니, 순조롭게 일이 풀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나는 지금 뜬금없이 놀이동산에 와 있다.

치열한 주차전쟁 끝에, 힘들게 빈자리를 찾아 차를 대놓고 빠져나오는 길이다.

카니발랜드.

수원에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테마파크다.

오버레이 사태 이후에는 안전성 이슈 때문에 이런 야외 놀이 시설들은 점점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였는데, 이상하게 이 카니발랜드만큼은 현재까지 단 한 건의 균열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다.

안전하다는 이미 지 덕분에 카니발랜드는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압도적인 차이로 테마파크 부분방문객 순위 1위를 달리는 중이다.

뭐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고, 아침부터 수원까지 내려오느라 피곤할 뿐이다.

나는 하품을 쩍쩍하며 걸었다.

"엄마! 빨리 빨리!"

"저기 줄 선다! 빨리이!"

아이들이 부모를 보채며 달려가고 있다.

가족 단위, 커플 단위 방문객들이 무척 많다. 아침부터 껴안고 난리부르스를 추는 커플들의 애정행각을 보며 나는 홀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카니발랜드 입구. 중세시대처럼 우뚝 솟은 성곽을 배경으로 안내원들이 티켓을 체크하고 있었다.

개관시간보다 조금 늦게 와서 여유가 있었다.

'난 어디로 들어가야……'

주위를 훑어보고 있는 내 시선에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레드톤 양털 재킷에 트임 포인트가 있는 체크스커트, 그리고 검정 스타킹과 스니커즈를 신었다. 거의 뭐 여친룩의 정석과도 같은 차림이다.

그녀는 홀로 벽에 기대어 팔을 쓸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와, 예쁘네. 남자친구 기다리는…' 라고 의식의 흐름이 흘러가고 있던 도중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 색이 어두워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무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 눈에 띄던 붉은 머리카락은 어떻게 숨겼는지 살짝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검은색이었고, 황금빛 눈동자도 색깔 렌즈를 낀 듯 평범한 갈색이었다.

"아."

그때 눈이 딱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녀가 수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 어. 그래."

앞에 오기만 했는데 은은한 장미향이 감돌았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와주실지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너 말이야."

나는 그녀의 차림을 눈으로 빠르게 훑고는 물었다.

"이거 진짜 임무 맞지?"

"임무가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시크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그녀를 보니, 갑자기 싸늘한 느낌이 전신에 퍼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협회 소속 헌터윤슬아의 통화 내용이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유신 헌터님은 오전 11시까지 일상복 차림으로 카니발랜드에 와주시면 되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이건 주제넘은 조언일지도 모르지만…….

-뭔데요?

한층 줄어든 윤슬아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조심해 주세요. 연이 일할 땐 진짜 살벌하게 하고, 공과 사 구분 못하는 사람 끔찍이 싫어해요. 동기인저도 몇 번을 굴렀는지 몰라요.

"선배?"

홍연의 목소리에 나는 급히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럼 같이 가시죠."

그녀가 등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이상적인 그림으로 바람에 흩날린다.

우리는 함께 매표소 앞으로 걸어갔다.

"카니발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객님."

직원이 상냥한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좌우로 휘휘 흔드는 인사를 선보였다.

나는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성인 둘이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직원이 우리를 힐긋 바라보더니 말했다.

"커플 할인 20% 적용해 드릴까요?"

……뭐?

"네, 부탁드릴게요."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놀라서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홍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뚫고 있었다.

"8만8천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졸지에 커플 할인으로 결제를 마치고, 우리는 플라스틱 팔찌 같은 것을 받았다.

디자인 구리다. 반쪽짜리 하트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바코드 비슷한 뭔가가 붙어 있었다.

"남성분은 왼쪽에, 여성분은 오른쪽에 착용해 주세요. 반대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팔찌를 착용하며 설명을 들었다.

"커플 팔찌는 전자코드가 반반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센서 통과하실 때 두 분이 손을 잡고 입장하시면 자동인식됩니다."

카니발랜드 마케팅팀 두고 보자.

"그럼 설명드린 방법으로 입장하실게요."

앞에 센서가 부착된 기계가 보인다. 홍연도 이럴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모습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손을 뻗었다.

"빨리 하자. 뒤에 사람들 기다리고 있잖아."

"……."

그녀는 조금 주춤하더니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잠시 후, 센서에 녹색불이 들어오며 문이 열렸다.'카니발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하는 음성이 들렸다.

우리는 문을 통과하자마자 뻘쭘해져서 손을 놓았다.

안으로 들어오니 분위기가 색달랐다.

화려한 색감의 마계수들로 정원을 구성해 판타지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고, 길목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손을 흔들며 고객들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뽀까쮸다! 뽀까쮸!"

"민기야! 때리면 안돼!"

나는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인형탈 알바들에게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연아. 어디로 가야……"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쪽에 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린이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푸롱푸롱 푸피피가 보였다.

"와아! 와아!"

아이들이 앞장서서 푸피피에게 안기고 있는 가운데, 홍연은 그들을 부러운 듯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슬그머니 가서 말했다.

"푸피피 좋아하는 사람은 정신연령이 유아 수준 인증 아냐?"

"아니거든요."

그녀가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올해 새로 오픈한 푸피피 채널 구독자 수 70만 돌파한 거 모르시나보네요."

"그거 어차피 인형탈 안에는 냄새나고 털 수북한 아저씨가……"

"푸피피는 푸피피입니다."

너무 단호하게 말해서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내 데바의 눈은 인형탈 너머 알바생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어, 음…… 똥배가 툭 튀어나온 몸매에 인중부터 턱 아래까지 털이 수북하게 난 아저씨다.

날개를 파닥파닥 흔들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지만 정말 싫은 표정이었다.

불 지옥에서 허우적대는 죄인의 모습이 저런 걸까.

"갈까?"

"네."

간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녀는 좀 처럼 푸피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말했다.

"……그냥 가서 인사라도 하고 와."

"지금은 놀러 온 게 아니니까요. 가시죠."

나를 보고 말해라 이 아가씨야.

"우리가 뭐 당장 일하러 갈 것도 아니고, 이대로 지나치면 미련이 남아서 계속 생각날걸?"

"……."

그녀의 얼굴에 짙은 망설임이 묻어나왔다. 나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해주길 원하는지 알고 있다.

"뭣보다 괜히 잡 생각 때문에 임무에 지장 생기면 안 되잖아."

그녀의 눈이 즉각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갔다 와."

사진을 찍은 아이들이 잠시 흩어진 틈을 타, 그녀가 푸피피에게 접근했다.

긴장되는지 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두 팔을 어정쩡하게 벌리며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푸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나는 숨죽여 웃었다.

털보 아저…… 아니, 푸피피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한 남자였다. 그가 두 날개를 펼쳐 그녀를 폭 안아주었고, 홍연은 세상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런 애가 막 칼 들고 마인이고 사람이고 다 썰고 다니던 그 괴물 협회장과 동일 인물이라니……. 믿기 힘들 지경이다.

'그래도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 같네.'

아무튼 꿈에 그리던 푸피피와의 허그를 완수한 그녀는 홀가분한 얼굴로 내게 뛰어왔다.

"선배. 가시죠."

"그래."

그녀가 내 얼굴을 힐긋 살피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표정이 어두워지셨습니다."

"내가?"

"네."

그녀가 턱을 짚으며 '흠'하는 소리를 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두팔을 벌렸다.

"선배도 안아드립니까?"

"됐네요!"

테마파크라서 그런지 주변에 볼거리는 참 많았다. 캐릭터 탈은 기본이고, 곳곳에서 춤사위가 벌어지고 쇼가 시작됐다.

내가 삐에로 분장의 남자가 추는 봉산탈춤의 오묘함에 빠져 있는 사이 홍연이 다가왔다.

"선배! 이거 어떻습니까?"

"……."

그녀는 앙증맞은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이 녀석 사실 즐기고 있는 거 아냐?

"……어, 음. 그래.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묻는 건 잘 어울리는 게 아니라 분장으로 써의 역할을 여쭙는 겁니다."

"분장?"

그녀는 내 머리에도 자신과 똑같은 토끼 귀 머리띠를 씌웠다.

"이래야 평범한 커플 같잖아요."

"그, 근데 커플 연기를 꼭 해야 하는 거야?"

"커플 입장권을 사버렸으니 어쩔수 없지 않습니까. 의심받지 않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녀가 손목에 찬 팔찌 입장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랑은 싫으십니까?"

순간 서릿발 같은 한기가 몸속으로 사무쳐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빨리 가요."

그녀는 활짝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는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임무를 위해서, 오늘 하루만 커플행세하겠습니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몸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정신보다 몸이 바짝 긴장해 버린다.

뒤늦게 자각했다. 지난 5년간, 아니, 체감 30년간 연애고 뭐고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런가, 명확히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거 진짜 임무 때문에 하는 거야?

"선배."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웃음 지었다. 갑자기 주위에 꽃이 휘날리는 배경이 깔리는 것만 같다.

"식사는 하셨나요?"

얘 왜 이러는 거냐고 대체!

윤슬아의 충고와, 홍연의 미소 사이에서 나는 미친 듯이 갈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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