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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97화 (297/337)

나 혼자만 마탑주 297화

하예린은 애증의 모교와 작별하고 밖으로 나왔다. 교문 밖에는 벌써 기자와 스카우터들이 쫙 깔려 있었다. 들통나지 않고 저길 지나가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는 마력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한 쌍의 날개가 솟아오르자 땅을 딛고 날아올랐다.

"엇! 저, 저기……!"

"하예린 학생!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스카우터들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지만 그녀는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보다 오늘은 어디서 잘 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자취방 앞에는 스카우터들이 진을 치고 있다. 천공성 또한 헌터 협회가 임시 보호 중인 상태.

천공성의 선택을 받은 하예린이 성주라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현재 천공성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다시 한번 국보 중의 국보인 천공성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고, 하예린을 불법침탈자 취급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하예린을 헌터 위원회에 고소하면서도, 뒤꽁무니로는 그녀에게 귀화를 제안했다. 무려 차기 헌터 협회장 자리를 카드로 내걸었다.

그 밖에도 천공성이라는 먹음직스러운 케이크에 수 많은 하이에나들이 달려 들었다.

러시아, 터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등 흑해 주변국들은 프랑스의 천공성 소유권은 5년 전에 소멸했으며, 흑해를 영해로 두고 있는 자신들에게 소유권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도 그런 주장을 펼치면서도 하예린을 전면 부정하지는 못하겠는지, 귀화 혹은 스카우트를 요구했다.

천공성 쟁탈전의 열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등 천공성과 전혀 상관없는 국가들도 하예린 회유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예린 영입에 앞서나가기 위해 프랑스와 러시아에서는 발 빠르게 던전 지원 명목으로 자국 헌터들을 한국에 파견했고, 흑해 주변국들도 앞다투어 헌터들을 보내며 한반도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최악의 상황엔 이들의 이해관계가 정면충돌하는 것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이에 한국의 헌터협회에서 천공성을 조사 명목으로 압류한 상황.

뭐 그런 이유 외에도, 일개 고등학생에게 핵무기 미사일 버튼을 넘겨주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일이 잠잠해지려면 천공성주인 하예린 본인이 어떤 제스쳐라도 보여야 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있다.

결국 고민 끝에, 하예린은 휴대전화를 꺼내서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순간에 진심으로 도움을 구할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도와주세요.]

다른 설명 없이 그 한마디의 메시지만 보냈다.

잠시 후 답변이 왔다.

[맨날 가던 훈련장에서 봐.]

맨날 가던 훈련장이라면 뻔했다.

그녀는 이카루스의 속도를 높여 야차산으로 향했다.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야차산에 도착한 그녀는 유신과 함께 훈련했던 공터로 걸어갔다.

아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예린은 바위에 앉아 불빛이 만연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찍 왔네."

"아!"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벼운 운동복과 슬리퍼 차림의 유신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소식은 듣고 있었어. 못 본 사이 유명인 다 됐더라? 천공성주님."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부담스러워요."

"음?"

"사실 제 내면은 크게 바뀐 게 없는 것 같은데……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속성 뽑기 실패한 그냥 그런 마법사 훈련생이었는데…… 역대급 신인이니 차기 협회장이니 그런 소리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져요."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해해."

그러곤 고개를 돌려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서울의 야경을 응시했다.

"나도 옛날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어. 돌아가는 상황에 휘둘리면 모든 게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지거든. 이럴 때일수록 나 자신에 집중하는 게 중요해."

"나 자신……요?"

"응."

유신이 그녀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나 돌아가는 상황 따윈 아무래도 좋아. 가장 중요한 건 네 생각이지.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하예린이 눈을 감았다.

가식과 허상은 치우고, 나는 진심으로 뭘 하고 싶은 가.

그렇게 고민하자 훨씬 더 명확하게 보였다.

"아저씨. 저 마탑에 들어가고 싶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야?"

"네."

그녀가 벌떡 일어나 유신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도 이젠 그냥 제자가 아니라, 아저씨의 동료로 당당히 인정받고 싶어요!"

유신과 만나고 나서 모든 게 바뀌었다.

힘들었던 시련 훈련, 천공성 운전에, 함께 악마와 싸운 것까지 평생 최고의 순간 들이었다.

그런 일들을 겪은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그저 모든 게 권태롭기만 했다. 무엇도 가슴을 뛰게 하질 않았다.

천공성주의 자격이나 의무 따위 알바 아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음."

유신이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그것을 애매한 반응이라고 받아들인 하예린은 덜컥 겁이 났다.

설마 거절하는 건….

"그래 주면 나야 영광이지."

"……아!"

"잘 부탁해. 천공성주."

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혹시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뛰어왔다. 그러곤 유신의 손을 붙잡아 마구 흔들었다. 그의 팔이 짤짤짤 흔들렸다.

"아, 아파."

"진짜죠? 진짜죠! 저 마탑에 들어갈 수 있는 거죠?"

"당연하지. 네가 탑에서 해줄 일도 명확해."

천공성의 이카루스는 원천 마력계가 아니다. 따라서 날개를 달아도 마법을 쓸 수 있다.

물론 마법과 고유 능력은 혼용이 힘들지만, 하예린이 개발한 오리지널마법. 윈드 차크람의 경우는 달랐다.

서클로 연결하는 마법이기 때문에 한번 시전해서 꺼내 놓으면 마음껏 휘두르면서도 이카루스의 컨트롤까지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카루스 능력자의 특화 마법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공중전이 가능한 마법사 양성. 두 유적의 시너지는 대단할 거라고 생각해."

"좋아요!"

하예린은 유신과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로 이 느낌. 바로 이 들뜨고 가슴 뛰는 느낌을 원했다. 흑백 같던 이 세계가 생동감 넘치는 풀컬러로 돌아온 기분이다.

"일단 번거로운 소송문제부터 해결하자."

유신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말했다.

"……어, 그걸 해결할 수 있어요?"

"그냥 다 큰 어른들이 애처럼 억지 부리는 것뿐이야. 천공성을 손에 넣을 기회니까 그냥 막 떡밥을 던지고 보는 거지. 내가 움직이면 바로 수그러들 놈들이야."

통화 연결음이 들리더니 잠시 후 정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예린이가 마탑에 오기로 했어."

-아! 그거 잘 됐군요.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지?"

-알케미아와 연동된 국내외 20개 로펌을 전부 동원하겠습니다.

"좋아. 그 전에 천공성주가 마탑에 들어오기로 했다고 언론에 전부 뿌려 버려."

유신은 그녀를 품게 된 이상,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언론에 뿌리는 이유는 과시다. 마탑에서 먹었으니까 감히 침 묻힐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마탑이 관여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지간한 길드들은 전부 꼬리를 말고 떠날 것이다. 프랑스가 귀찮게 할 수 있지만, 그 정도야 정서진이 막을 수 있다.

통화를 종료한 유신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천공성도 슬슬 재건해야지. 솔직히 지금은 천공성이 아니라 천공섬이잖아."

"그, 그렇죠. 그런데 지금 협회에서 압류해 버려서……"

"그것도 나한테 맡겨."

유신이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예린은 호기심을 갖고 기다렸다.

설마 또 인맥인가? 이번에는 뭐지?

"어, 연아. 나야."

연이가 누구야?

라고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퍼뜩 한 이름이 떠올랐다.

'혀, 혀혀혀협회장?'

그녀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 무서운 사람의 이름을 저렇게 막 불러도 되는 걸까? 지켜보는 그녀가 괜히 겁이 났다.

"우리가 천공성 먹기로 했어. 압류한 거 풀어주라."

'으아악!'

하예린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게 그렇게 말한다고 될 문제가……!

-네, 선배. 그렇게 할게요.

이게 된다고?

"포기가 빠르네. 혹시 너희도 노리고 있었어?"

-차기 마법부장관 자리를 보장하는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뭐야, 도연 씨 떡하니 있잖아."

-차 장관도 선배가 빼갈 것 아닌가요?

유신은 뜨끔했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그건 도연 씨의 마음에 따라 달렸지."

-그럼, 천공성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해외에서 온 헌터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주의해 주십시오.

"걱정 마."

그때 수화기 너머로 방문이 벌컥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습니다, 협회장님! 마탑에서 천공성과 계약을……!

-저도 당사자에게 듣고 있습니다. 나가보세요.

-시, 실례했습니다.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유신은 낄낄 웃었다.

-역시 행동력이 빠르네요. 선배.

"내가 좀."

-대신 우리와 한 약속은 잊지 않으셨죠?

"물론이지. 내일 봐."

그녀와 몇 차례 이야기를 주고 받은 유신은 통화를 종료했다.

지켜보던 하예린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협회장 아니죠?"

"맞는데."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예린아."

"네."

"크흠. 이제 같은 식구가 됐으니까 하는 말인데……"

유신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박물관에서 했던 이야기 말이야."

"아."

그녀에게 정체를 숨겼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인 수사 때문이었지만, 사실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다.

박물관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전 김유신 싫어해요.

사실 유신은 그 말을 은근히 신경쓰고 있었다.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풀고 가고 싶었다.

"왜 날 싫어했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닌데."

그녀는 민망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아저씨가 면접에서 우리 아빨 떨어뜨렸거든요."

"뭐?"

유신이 벙찐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하예린의 아버지는 공인 4급 헌터였다고 한다.

그는 유신의 첫 번째 마법사 면접에 참가했지만.

-기준 미달로 탈락이십니다.

첫 번째 면접이라면 나대용을 비롯한 4층팀을 뽑았을 그때였다.

"아빠는 시티즌 길드 소속이었고, 탈락 통보를 들었을 때 엄청 민폐 부리셨을 거예요. 우리 아빠지만…… 고집불통에 가부장적이고 꽉 막힌 성격이거든요."

"아, 잠깐 설마……"

유신의 머릿속에한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니들이 뭔데 날 심사해!' 라고 소리치며 당시면접 최고의 민폐 케이스였던 그 사람.

"그분이 설마……"

"네, 지금 아저씨가 떠올리고 있는 사람이 맞을 거예요."

유신은 바짝 긴장한 채 머리를 굴렸다.

그다음엔 어떻게 했더라? 바로 시티즌 길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티즌 길드원들이 달려와서 그를 면접장에서 데리고 나갔었다.

"그 면접 뒤, 우리 아빠는 시티즌에서 잘렸어요."

당시 시티즌 길드는 알케미아와의 포션 거래가 무척이나 중요했고, 유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꽉 막힌 성격으로 길드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하예린의 아버지는 계약 중단 통보를 받았다.

시티즌에서 쫓겨난 그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나이가 차고 기량이 쇠퇴할 시점의 늙은 헌터에게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 진단을 받을 정도로 증세는 심해졌다. 야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절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언제나 처럼 술에 거나하게 취해 돌아온 그는, 잔소리를 하는 하예린의 어머니를 폭행했다.

어린 하예린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이후 하예린의 어머니는 이혼 절차를 밟았고, 하예린과 동생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두 딸을 홀로 키우느라 하루하루 힘든 생계를 이어나갔다.

하예린은 아버지는 물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유신도 원망했다.

이유는 별로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과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싶었다.

세상을 원망하는 것보다 대상을 한 명 정해놓는 편이 더 명확했으니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유신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예린아. 나는……"

"알아요. 아저씨가 의도한 게 아니고, 아저씨 잘못도 아니라는 걸."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그냥 어린 마음에 투정부리고 싶었던 거겠죠. 만나보지도 못한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나누는 것처럼요."

"……."

"아저씨는 제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주셨고 제 삶을 바꿔준 사람이에요. 아빠가 김유신 덕을 못 봤다면, 저는 김유신 덕 좀 보죠 뭐! 내친김에 제가 말썽쟁이 아빠도 좀 도와주면 되잖아요?"

유신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잠깐 손 좀 줘볼래?"

하예린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유신은 그녀의 손목 위에 손가락을 댔다.

"마탑의 문양이야."

그녀의 손등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졌다.

최고 마법사의 상징. 그녀는 자랑스러운 듯 손등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전 배꼽에 하려고 했는데."

"제발."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으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많이 뜬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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