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94화
내가 자리를 비운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마인 수사문제도 있고, 그간 만나지 못한 멤버들을 한 명 씩 얼굴 보면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제일 먼저 9층에 올라온 사람은 사미아였다.
"……나대용 헌터 일에 대해선 나도 마음이 좋지 않구나."
그녀는 이번 일로 상처를 많이 받은 듯 보였다. 자신이 탄자니아로 돌아간 게 나대용이 엇나가게 된 중대한 방아쇠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대용 헌터와는 평소에 친하셨나요?"
그녀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4층팀 여성 멤버들과는 자주 어울렸지만, 나대용 헌터는 좀 부담스러워서 말이다."
"……하하, 좀 오버텐션이긴 했죠."
차분한 사미아와 오버하는 나대용.
두 사람은 성격부터가 물과 기름이었다.
"그럼 마탑에선 누구랑 가장 친했어요?"
"차도연 헌터, 소심희 헌터와 자주 지냈다."
나는 사미아로부터 다른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정타는 아니었지만 단서들이 깨작깨작 쌓이고는 있다.
처음 진행하던 마인 수사와는 다른 방식이다. 내가 내 죽음에 대해 남에게 묻는 것도 웃기고, 진보라와 정서진의 경우처럼 진솔한 대답을 기대하는 것도 힘들 것 같다.
"자, 그럼 질문은 여기까지만 하고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올게요. 저는 사미아가 마탑에 남아주셨으면 좋겠지만…… 본인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겠죠. 탄자니아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긴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동아프리카 전선의 사령관이 됐다."
"알고 있습니다."
"마탑에 남고 싶은 내 마음은 진심이다. 다 완성하지 못한 워프 파트에도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완전히 등질 수는 없다."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지. 나는 깍지를 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첫 해외 파견지인 탄자니아에 개인적인 애착도 있고, 세계길드의 일원으로서 아프리카 전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미아가 5층 관리자로서 남아준다면, 마탑은 동료의 국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공식적인 협력관계가 되는 거죠."
사미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는가?"
"반드시 한쪽을 양자택일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다만 두 가지 격무를 모두 수행해야 하니까 사미아의 각오가 중요합니다."
"어느 쪽도 놓칠 수 없다면,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눈을 빛냈다.
"언제나 신세만 지는구나. 김유신 헌터."
"신세 지는 건 저죠."
사미아는 다시 5층 관리자 확정.
마탑에 잔류하기로 했다.
텔레포트 능력자는 무척 희귀하고, 그들 중에서 워프 수식에 능통한 자들은 더더욱 희귀하다.
그녀는 사실상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다. 네메시스를 위해서도 무슨 수를 써서든 눌러 앉혀야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부른 사람은…….
"안녕하세요! 대표님!"
김사랑이다.
실내임에도 패션 선글라스를 썼고, 복장도 마이웨이가 물씬 묻어나오는 하와이안 셔츠에 청치마 차림이다.
한 손에는 프렌차이즈 커피를 들고 있다.
"오랜만입니다. 사랑씨."
내가 끌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이야기 못했네요. 어떻게 지냈어요?"
"최고죠! 제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글로벌 길드 크로우 소속의 헌터, 공인 3급 김사랑.
크로우는 영국 소속이긴 한데, 글로벌 길드의 특성상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파견된 장소는 미국의 플로리다주였다.
우선 그녀에게도 나대용에 대해 먼저 물어보았다.
"착해빠지고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요. 옛날에는요."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팔짱을 꼈다.
"그 사람 때문에 마탑을 박차고 나갔으면서 이런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이상하긴 해요."
"뭐가요?"
"짧은 시간에 사람이 너무 심하게 망가졌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아 뭐, 5년이란 세월 동안 다들 조금씩 바뀌긴 했죠. 근데 나대용씨는 사람이 어벙할 정도로 착해빠졌어요. 물론 대표님에 대한 집착과 열등감, 스트레스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사람이 집착쟁이로 바뀌는 건 이상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제기할 만한 의문이네요."
"그래서 처음엔 전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녀가 굳은 얼굴로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사실 나대용은 마인이 된 게 아닐까?"
"……."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며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보세요."
"그러니까, 현대에서 그런 극단적 심리상태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마인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저도 이런 저런 조사를 해봤다구요."
그래,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는.
"하지만 대용 씨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마인으로 변하지 않았죠. 결국 그냥 다 제 망상이었나 봐요."
나로서도 생각이 깊어지는 대목이다.
아무튼 질문은 이 정도로 마치고 비즈니스 문제로 넘어갔다.
"사랑씨는 지금 크로우에서 일하시는 중이시네요."
"넵!"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저는 사랑씨가 마탑으로 돌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돌아오신다면 기꺼이 층 하나를 내어드리죠."
그녀에게 관리자 자격을 주겠다는 소리다. 권력은 물론 LV10 특성들이 달라붙는, 플레이어라면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파격적 제안.
하지만 관리자 떡밥을 던졌는데도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절 영입하고 싶으시면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요."
"뭔데요?"
그녀가 오른손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돈! 우리 연봉협상이나 하죠!"
……오우.
"살아보니까 세상엔 돈이 최고더라고요! 크로우에서 받는 연봉 이상을 주실 수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나는 웃음을 흘리며 눈썹을 긁적였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지 않나?
가면허 시절, 파이어캐논 한번 보여주자 감격해서 펑펑 울음을 터뜨리던 그 순수한 김사랑은 대체 어디로…….
"헤헤, 오랜만에 재회했는데 너무 솔직한가?"
"아뇨. 솔직하니 좋네요. 헌터가 자선사업도 아니고 연봉은 중요하죠."
그녀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5년 전에 느낀 게 많아요. 20대의 저는 우리 마탑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 행복한 생활이 쭉쭉 이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세상도, 친구도, 그리고 마탑도 다 변해 버렸어요."
"……."
"그런데 돈은 안 변하더라고요!"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였다. 마치 띵! 소리가 나며 눈에 달러 표시가 생긴 듯하다.
"전 돈과 사랑에 빠졌어요! 돈은 변하지도 않고, 언제나 만족스럽고, 영원히 제 곁에 남아줘요! 그냥 진짜 다 필요 없고 돈이 최고라니까요? 꺄하하하하!"
"하하……"
아무튼 연봉협상이 진행됐다.
나는 통 크게 그녀에게 가디언에서 받는 연봉의 두 배를 제의했다. 인재가 없을 뿐이지, 돈은 썩어날 정도로 많다.
"2배 받고 위약금 지급까지 가시죠!"
"……그건 제가 할 대사 아닙니까?"
아무튼 김사랑도 돈발을 세워서 마탑에 눌러 앉히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어떤 층의 관리자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일했던 4층을 가장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걸로 3층, 4층, 5층은 어떻게든 메꿀 것 같고.'
현재 마탑 층의 근황은 다음과 같다.
제1층 : 포션조제국 / [포션조제관: 진보라]
제2층 : 대서재 / [서기관 : 정서진]
제3층 : 골렘공방 / [수석 엔지니어 : 은솔]
제4층 : 기상설계국 / [설계국장 :없음] - 직위를 부여해 주십시오.
제5층 : 차원관 / [차원지기 : 사미아]
제6층 : 마나광산 / [광산관리관 :없음] - 직위를 부여해 주십시오.
제7층 : 마도공방 / [마도공학자 :없음] - 직위를 부여해 주십시오.
제8층 : ???
제9층 : 마탑주의 방 / [마탑주 :김유신]
나대용 시절에는 사실상 1층과 4층 정도만 운영되는 정도였지만 내가 복귀하고 정서진, 은솔, 사미아는 관리자에 복귀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건 4층과 6층, 그리고 이번에 개방한 7층.
'김사랑, 소심희, 조용희가 나누어가지면 되려나.'
일단 마탑에 복귀했으니 모든 층에 관리자들을 꽉꽉 채워 넣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인력은 기존 마탑 마법사에 아케인까지 충분하니까 관리자만 정해지면 모든 층을 제대로 굴릴 수 있게 된다.
"에아."
내가 부르기 무섭게 허공에서 에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7층 안내를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같이 갈 사람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소심희 씨한테 올라오라고 해줄래?"
* * *
나는 제7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있다.
과연, 의식세계에서의 시련 클리어가 제대로 적용됐는지 다음 층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어야 할 차원의 마법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대, 대표님!"
그리고 소심희가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자주 봤던 메타모포시스 상태가 아닌, 원래의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녀는 어깨까지 머리를 길렀고 금발로 염색도 했다. 다만 뿌리염색을 안 한 지 오래된 듯 정수리 쪽은 거 뭇거뭇하다.
전체적으로 5년 전보다는 더 산뜻해진 모습인데, 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같이 올라갈까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로요?"
"첫 7층 구경이요. 소심희 씨랑 함께하고 싶습니다."
"여, 영광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7층으로 넘어왔다.
"오오!"
"와!"
어떤 층이든 처음에 들어오면 크게 놀라곤 했는데, 이번 제7층 '마도공방'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방중앙에 있는 화분에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있는 모습이다. 나무는 천장까지 뻗어 있었고, 녹색과 보라색잎들이 잔뜩 나 있었다.
다른 곳을 둘러 보면 흔히 실험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특히 벽에 쭉 진열된 대형 시험관들의 모습은 음침하기까지 했다. 어떤 시험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체 부위 일부가 들어 있었다.
"제7층 마도공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마도공방은 흔히 마법계의 공학이라고 불리는 '마도학'을 연구하는 곳인데,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아티팩트.
생체공학.
"아티팩트는 마법 아이템 같은 거지? 생체공학은 뭔데?"
에아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어, 설마……?"
"네. 호문쿨루스를 비롯해 다양한 마법 생명체와 관련된 연구를 말합니다."
에아가 만들어진 곳이라니! 나는 더욱 흥미가 생기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캐비닛에는 각종 문헌과 연구자료들이 빼곡하게 보관되어 있었고, 벽곳곳에 에렌델어로 적혀 있는 원소주기율표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다.
'……어렵다.'
마법적 지식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론과 원리들이 잔뜩 있다. 이건 진짜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어때요? 소심희 씨."
책장에서 마도학 연구 파일을 뒤적거리고 있던 그녀가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하, 하나도 모르겠어요."
은근슬쩍 그녀에게 7층 관리자를 떠맡길 생각이었는데…… 이건 안되겠다.
그동안의 층들은 포션이나 골렘, 워프처럼 직접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는 층들이 많았는데, 이번 7층 마도공방은 달랐다.
그야말로 '연구'에 특화된 층이었다. 제대로 시간을 들여야 효과를 볼 수 있을 듯했다.
'이번 층은 꽝인가……'
당장 6개월 뒤가 네메시스라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웠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유난히 저 커다란 나무에 시선이 갔다.
"에아. 이건 무슨 나무야?"
대서재의 책에서 몇 번 본 것 같기도 하다.
"생명의 나무입니다. 세계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하죠."
에아는 생명의 나무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은 에렌델 이전의 세계에 존재했던 것으로, 한 행성을 통째로 지탱하는 근원이었다. 이 나무 위에서 생명이 태어났고, 먹을 것이 자랐으며,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행성 또한 재앙을 피하지는 못했다. 행성은 쑥대밭이 되었고 살아남은 마탑의 일원들은 생명의 나무 일부를 가져와 마탑에 배양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이 생명의 나무는 마도학 파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마탑에서 가장 높은 가치의 물건입니다."
"대체 얼마나 가치 있는 건데?"
에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현대의 유물 가치로 환산하자면 SSSSS급 유물 정도 되겠군요."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