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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93화 (293/337)

나 혼자만 마탑주 293화

어젯밤의 술자리는 지독했다. 얼마나 마셨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도 울렁거린다.

진한 숙취가 만드는 무기력감에, 나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중이다.

'……앞으로 내가 알코올 한 방울이라도 입에 대면 사람도 아니다.'

필름이 군데군데 끊겨 있었지만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정서진은 꽐라가 됐고, 진보라는 뜬금없이 야릇한 분위기 풍기고, 은솔은 나도 술 먹게 해달라며 칭얼대고, 술게임 벌칙은 왜 또 이렇게 수위가 높은 건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 있는 9층 마탑주의 방은 새집에 온 것처럼 깨끗했다. 원래 여긴 나대용의 개인용품들이 가득 해야 할 텐데 사람들이 신경 써서 치워준 모양이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탑주."

에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허공에서 내려온 그녀는 빨대를 꽂은 음료팩을 들고 있었다.

"드시지요. 숙취해소에 좋은 양배추 녹즙입니다."

"아, 고마워."

씁쓰레한 맛의 녹즙을 즐기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술기운 때문일까, 어젯밤 선전포고나 광란의 술자리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내게 마실 걸 건네준 에아는 침대옆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잔잔하게 미소짓는 모습은 새삼스럽게 아름다웠다. 역시 인간의 미모가 아니다.

"어제 나 실수한 거 없지?"

"네, 탑주."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서려다 과자 봉투 밟고 미끄러져 테이블 다 엎고, 음식 쏟고, 그게 또 아깝다면서 바닥에 엎드려 혓바닥으로……"

"으아악! 그만!"

"아무튼 그것만 빼면 실수한 게 없으십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다. 5년 만에 도수 높은 술들을 퍼마셔서 그런지 알코올에 면역이 없었다.

에아가 손가락을 슥 뻗었다. 다 마신 녹즙팩이 내 손에서 빠져나와 두둥실 떠올랐고, 물티슈 한 장이 다가와 내 입을 슥슥 닦았다.

"우읍!"

"빨대를 사용하는데 어쩜 그렇게 입 주위에 다 묻히고 드실 수 있습니까?"

"에아, 너무 거칠어."

그녀는 내 입술을 빡빡 문질러 닦은 다음, 티슈를 손 안으로 불러들여 녹즙팩과 함께 쓰레기통에 넣었다.

"에아."

"네, 탑주."

"앞으로도 계속 따라와 줄 거지?"

나와 의식체계를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내 계획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호문쿨루스는 주인의 명에 복종한다. 그뿐입니다."

"나 그런 소리 싫어하는 거 알면서."

"제가 말려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실 걸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사료됩니다."

내게서 홱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하는 그녀는 역시…… 5년 전 일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타이탄 건은 사과할게. 그건 확실히 내 잘못이야."

"……."

마르첼로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눈이 돌아가 버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알베르를 죽인다고 맹세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사고는 그뿐이었다.

그 맹세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과몰입, 일체화라는 특급 엔진들이 돌아가며 몸과 머리를 쥐어 짜냈고, 그 결과 알베르를 죽인다는 목적은 이루어냈지만 나도 의식불명이 됐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번 계획은 네 의견도 무조건 반영할게. 네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절대 안 할 거야. 오케이?"

"그럼 플랜B '핵미사일 협박 대작전'은 폐기해 주십시오."

앗, 그건 비장의 계획이었는데!

내 표정을 본 에아가 침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제가 말려도 귓등으로도……"

"아, 알았어! 그건 절대 안 할게!"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손을 한 바퀴 휘저었다.

그러자 내 주위를 홀로그램 화면 20개 뒤덮으며 똑같은 영상들을 내보냈다. 20명의 내가 '절대 안 할게!' 를 외치고 있었다.

"좋습니다.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이 녀석, 바뀐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전보다 나를 더 잘 다루게 된 것 같다.

"읏차차."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방을 돌아다녔다. 방향제를 뿌렸는지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아 참, 세계의 반웅은 어때?"

"난리가 났습니다."

에아가 허공에 뉴스 화면들을 띄웠다.

"전 세계에서 탑주의 복귀 소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네메시스 언급과 선전포고까지 해외 유력 언론사에서 대서특필했습니다."

"잘 됐네. 그러니까 진작에 연맹에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주면 좀 좋아?"

최후의 재앙 네메시스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는 대중들도 알고 대비해야 하는데 연맹이나 각국 정부는 사회와 국민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줄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당장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혼란이 무슨 상관일까.

카타클리즘 정도는 네메시스 앞에선 아이들 장난이다. 진짜 공포는 6개월 후에 나온다.

"당분간은 언론에서 뭐라 떠들든 걍 냅둬."

내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 대해 각 조직의 공식 발언이나 움직임을 기록해줘. 그래야 나도 명확하게 지침 잡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탑주."

그때였다. 마법진 엘리베이터가 번쩍이며 누군가 9층으로 올라왔다.

"오빠야!"

파자마 차림의 은솔이 두 팔을 벌리고 도도도 뛰어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헤헤! 오빠야 잘 잤어?"

"그, 그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솔아, 내가 어제 이야기했지."

"응?"

"너도 이제 다 컸잖아. 이렇게 서슴없이 스킨쉽하는 건……"

그 말에 은솔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오빠야는 솔이가 싫은 거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응! 그럼 됐어!"

그녀가 다시 활짝 웃으며 내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동시에 이건 아니라는 내 이성적 사고가 부르짖는다.

"안 된다니까!"

"왜애!"

그녀가 볼을 부풀리며 앙탈을 부렸다.

"난 오빠야 좋아하고 오빠야도 솔이 좋아하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넌 아직 미성년자……"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른 어른들이 뭐라 하는 건 상관없어! 지들이 음란마귀 껴서 색안경끼고 보는 거잖아! 그런 시선이 뭐가 중요한데? 오빠야가 날 키워준 이후로 계속 이래왔는데, 왜 남들의 시선 때문에 그만둬야 하는데?"

…… 역시 사춘기 소녀는 무섭다.

어떤 논리로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다. 강하게 말하면 상처입을 것 같고.

나는 공 120개 던지고 구원을 바라는 선발투수의 심정으로 에아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가 나섰다.

"그렇다면 은솔 수석은 탑주가 남들의 시선에 곤란해져도 괜찮다는 겁니까?"

"……으, 응?"

"탑주는 성인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저명한 사회인이죠. 은솔 수석의 개인적 욕망때문에 탑주에게 나쁜 소문이 생기고, 사람들이 탑주를 욕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런 건…… 잘못됐어."

"사람 간엔 서로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고 존중이라고 사료됩니다."

역시 에아다! 말 참 똑 부러지게 잘 한다니까!

"그럼 보는 사람 없을 땐 오빠야를 마음대로 해도 된단 거지?"

어째서 그런 결론이?

"그렇습니다."

넌 뭐가 그래!

"헤헤, 오빠야!"

그녀가 비비적거리며 애정행각을 퍼붓기 시작한다. 체념한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솔아, 우리 잠깐 일 이야기 좀 할까?"

"응!"

내게서 살짝 떨어져 나간 그녀가 귀엽게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나는 서류와 펜을 꺼냈다.

"일단 비어 있는 골렘공방. 그러니까 3층 관리자 자리 말인데, 앞으로는 솔이가 맡아줄 수 있을까?"

"응! 이제 오빠야가 돌아왔으니까 내가 맡을 거야!"

"그리고……"

나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들고 와서 말을 이었다.

"네가 만든 경비업체 에스폴은……."

"당연히 마탑 그룹에 합류시킬 거야!"

조심스럽게 제안하려고 했는데, 너무 빠르게 허락해서 당혹스럽다.

"에스폴에서 그리 쉽게 받아들여줄까?"

"흥! 내가 대표인데 지들이 뭘 어쩌겠어!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곳이야."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

"에스폴 이사님이랑 통화할 수 있을까?"

"응!"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바로 어딘가로 전화했다.

잠깐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마탑주 소식 들었지? 나 다시 마탑에 돌아갈 거야. 회사도 같이 들어가기로 했어."

그녀는 대뜸 선언해 버렸고, 곧바로 수화기에서 왁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순식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솔아! 싸우지 말고 날 바꿔줘!"

한바탕 욕을 퍼붓던 그녀가 씩씩거리며 휴대전화를 넘겼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왈가닥일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나는 은솔의 동업자에게 빠르고 명쾌한 어조로 비즈니스 모델을 설명했다. 좋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의 동업자에 대해 물었을 때, 은솔은 입을 삐쭉이며 이렇게 말했다.

'기계공학은 나보다 걔가 더 나아.'

5년 전, 초등학생 때 버려진 헌팅디바이스 조각들을 모아 포탑을 만들어 할렘가를 지킨 그녀다.

은솔이 인정할 정도라면 대단한 인재라는 건 확실하다.

나는 회사 인수는 물론, 그를 7층 관리자로 스카우트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알케미아의 유통루트를 이용해 귀사의 장비들을 전 세계에 판매할 생각입니다."

두 천재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대단했지만, 까놓고 말하면 사업수완은 별로였다.

방대해진 마탑의 자본과 물류를 사용하면 훨씬 더 큰 일이 가능했다.

-만약 마탑 소속이 되면…… 마탑에서 명령하는 물건만 만들어야 하나요?

"아뇨, 저희는 그런 간섭을 일체할 생각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만들고 싶은 걸 만드세요. 저희는 판매와 마케팅에 주력하겠습니다. 아, 물론 최 이사님이 생각만 있으시면……."

나는 슬쩍 밑밥만 깔아두었다.

"재미있는 공학 기술을 보여 드릴까 합니다. 한번 마탑에 방문해 주세요."

다행히 이야기는 좋게 끝났다. 자세한 이야기는 마탑에 와서 하기로 했다. 정서진이 알아서 잘 처리해줄 것이다.

"일어나셨습니까. 탑주님."

"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정서진 과 진보라가 9층에 올라왔다.

나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서진아. 어제 무반주 소셜댄스 잘 봤다."

"……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서진이 이마를 붙잡았다. 진보라와 은솔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그건 그렇고, 솔이의 에스폴 인수진행해 줘. 담당자랑도 이야기 잘 끝났어."

"알겠습니다. 세부사항은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으, 저 아저씨랑 이야기하기 싫은데."

은솔이 툴툴거리자 정서진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은솔 양. 어제도 학교 안 갔다고 들었습니다."

"아, 안 간다니까! 자퇴할 거야!"

"너 자꾸 언니 속 썩일래?"

아웅다웅하는 세 사람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그들은 진짜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사람들은 내 마인 수사에 대해 알고 있고, 내 나름대로 마인이 아니라는 확신이든 사람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인에 대한 언급은 절대 비밀이야."

세 사람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끼리도 이 문제는 이야기하지 말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티도 내지 마. 수사는 나 혼자서 진행할게."

"알겠습니다. 탑주님."

"하지만 상황은 좀 더 어려워졌네요."

진보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선배님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인도 더 바짝 긴장하고 경계하겠죠."

"그래. 그래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나는 등받이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에아, 사미아를 불러줘. 한 명 씩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나대용의 죽음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틀림없이, 마인은 마탑 멤버들 중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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