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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90화 (290/337)

나 혼자만 마탑주 290화

"지금 이 순간부터 마탑주는 당신입니다. 나대용 씨."

"……."

그 말에 나대용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오른팔에 모인 전격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대용의 표정에는 동요가 가득했고 두 동공은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저, 정말입니까?"

"네."

딱 봐도 나대용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무슨 약 같은 걸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게 필요한 건 시간. 그렇다면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이용해야 했다.

유치한 소꿉놀이에 어울려 주는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당신의 방식은 과격해서 화가 나지만…… 그래, 좋아요.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었습니다."

"……스승님!"

그의 얼굴에 숨김없이 한 감정이 떠오른다.

아둔해 보일 정도로 솔직한 '환희'다.

"난 이제 지쳤어요."

천천히 대화의 템포를 끌어올린다.

"5년이라는 공백기가 참…… 길긴 길었던 모양입니다. 내 신경은 무딘칼날처럼 닳아졌고, 힘도 활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눈 뜨자마자 전장으로 끌려온 것도 진짜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당신이 내 역할을 대신하겠다면 환영할 일이죠. 실제로 5년간 마탑주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왔지 않습니까?"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저를……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당신이 마탑주로서 헤쳐온 5년간의 커리어를 그 누가 인정해 주지 않을까요."

그는 '맙소사'를 연발하며 기쁨을 표출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모습이다.

그사이 슬쩍 곁눈질로 홍연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이 없었지만, 눈만큼은 아직도 나대용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이 순간을 평생 꿈꿔왔었습니다! 행복합니다 스승님!"

나대용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비록 그 말이 살기 위해 내뱉은 낭설일지라도, 저로선 기뻐 몸서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망할, 다 알고도 저러는 거였냐.

"뭐, 스승님은 이렇게 절 인정해주셨지만…… 제 동료들은 달랐습니다."

나대용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지난 5년간 제가 동료들에게 무슨 취급을 받은 줄 아십니까? 허구한 날 김유신! 김유신! 김유신!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 절하했습니다!"

목에 힘줄이 섰고, 얼굴은 시뻘게 졌다. 그는 수 초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김유신이 살아 있었더라면! 김유신이었다면 이렇게는 안 했을 텐데! 네가 김유신인 것처럼 행동해라! 5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모두의 머릿속엔 김유신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왜! 왜 내 노력은 돌아봐 주지 않는 거지?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거냐고!"

쿠르르릉!

마른하늘에 다시 번개가 쳤다.

"그래. 난 마나의 아이도 아니고, 정식 마탑주도 아닙니다! 그래도 모두에게 인정받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어요! 필사적이었다고요! 하지만 돌아오는 건 냉정한 시선과 스승님에 대한 더 짙은 그리움뿐이었습니다! 스승님은 그 지독한 절망감을 이해하십니까? 당신의 그늘에 고통스러워하던 내 심정을 단 일 할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냔 말입니다!"

"……!"

쿵!

나대용이 발을 내디뎠다.

"당신은 내 영웅이고 우상이었습니다. 그 시절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쿠르르르르르릉!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져야만 합니다. 전설은 전설인 걸로 충분합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성격을 알고 있다. 외형적이고, 자부심이 강하고, 의욕이 넘친다.

그럴수록 열등감의 먹이가 되기 쉽다.

집착은 열등감이 되고, 열등감은 광기로 변질됐다. 그런 마이너스 감정들이 나대용 같은 사람을 이토록 망가뜨려 놨던 걸까.

"죄송합니다 스승님."

콰릉!

나대용이 발사한 전류가 나를 향해 쏟아진다.

나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전면에 워프게이트가 활짝 열린다.

전격은 워프게이트를 타고 들어가 나대용의 머리 위의 워프게이트에서 쏟아진다.

"큭!"

전격에 맞은 그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린다.

"워프……? 분명 좌표 혼동 마법이……"

"그건 그렇지."

나무가 자욱한 어둠 속에서 차박차박 걸음 소리가 들렸다.

"원격 워프는 안 되지만, 이런 코앞에서의 워프는 굳이 좌표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대용 헌터."

"사미아……!"

나대용이 이를 빠득 갈았다.

바로 그때, 바람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미사일 두 개가 날아왔다.

쿠우우우우웅!

맹렬한 폭발이 나대용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내 낮은 상공에서 비행하던 전투기의 몸체가 열리더니, 팔다리가 튀어나온 아이언 골렘의 형태로 바뀌어 바닥에 착지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골렘의 가슴 부근이 열리며 은솔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 어두운 숲에서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편에는 정서진과 진보라.

왼편에는 김사랑과 조용희.

현 마법부장관인 차도연도 등장해내 옆에 섰다.

후우우우우우우웅!

그리고 상공에서 등장한 거대한 생명체, 황금의 비늘과 멋들어진 뿔이 달린 그것은 주위를 한 바퀴 선회하다가 속도를 낮추어 내 뒤에서 착지했다.

안드라스로 변한 소심희였다.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내 쪽으로 육중한 머리를 내린다.

나는 그녀의 콧등을 고요히 쓸었다. 기분 좋은 듯 입에서 크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탑주님."

정서진이 장갑을 끼며 말했다.

"선배님! 괜찮으시죠?"

진보라가 손을 휙휙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폭발 연기 속에서 비틀거리는 나대용의 모습이 보인다.

"크흐흐, 결국 다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나대용이 붉어진 눈으로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좋으시겠습니다? 응? 니들이 그토록 바라고 빨아 재끼던 김유신이 나타나서 좋겠어! 스승님이 오니까 땜빵에 불과한 나 같은 바로 손절 때리는 거지? 으흐흐흐! 하하하하하!"

드래곤이 으르렁거리자 나는 그녀의 콧잔등을 쓸면서 진정시켰다.

"나대용 씨."

정서진이 걸어 나왔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무시하지도, 차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탑주님이 의식을 잃은 뒤,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던 대용 씨의 노력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가식 부리지 마! 쓰레기들!"

얼굴이 시뻘게진 나대용이 삿대질을 해댔다.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특히 그 눈!"

나대용의 손가락이 정서진을 가리켰다.

"당신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다 안다고! 내가 바본 줄 알아?"

"……나대용 씨."

"겉으로는 마탑주 대우해 주는 척만 하면서 내가 말만 꺼내면 한숨 푹푹 쉬고! 인상부터 쓰고! 조금 있다가는 김유신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지! 니들이 날 이렇게……!"

"이봐요."

이번엔 진보라가 앞으로 나왔다.

"피해의식도 그 정도면 병적인 거 알아요?"

"흐흐흐! 피해의식? 그렇게 날 몰아갈 셈입니까? 선배."

진보라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당신이 우리에게 한 짓은 쏙빼고 말하는데? 말 나온 김에 확실히 말해둘게요. 당신은 김유신이 아니야."

"……."

"당신은 김유신의 후계자라는 위치에 환상이 있었어. 처음엔 분위기 나쁘지 않았잖아? 구심점을 잃은 마탑을 재건하기 위해 모두 힘을 내서 일했어. 그런데 당신, 어느 순간부터 말이야."

그녀가 나대용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과 본인 스스로를 동일시하더라?"

"……."

"당신은 선배님이 받았던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어. 호칭, 일 처리, 의복, 심지어는 사적인 관계까지 전부. 당신이 스스로를 선배님이라고 여기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도 자신을 선배님으로 여기도록 할 것을 요구한 거야. 그런 요구……."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진짜 기분 더러웠어. 알아?"

차도연도 거들었다.

"당신의 그 불합리한 요구를 거절했다고 마탑주 대우를 안 해줬다느니 뭐니 우는 소리 하는 거라면 그것만큼 바보짓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도 은솔에게 사정은 들었다.

마탑주 업무를 하며 나대용도 스트레스가 쌓이기는 했을 것이다.

동료들도 공식 마탑주가 없는 채로 구멍 뚫린 운영을 해야 했기에 과거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했었을 수도 있다.

푸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사람이고, 힘든 시기였을 테니까.

하지만 나대용의 반응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격했다.

은솔의 말에 따르면, 나대용은 사소한 말투나 행동 하나하나까지 지적 했다.

왜 나를 마탑주라고 부르지 않느냐. 왜 나는 김유신처럼 대해주지 않느냐. 김유신은 이렇게 일 처리를 해줬으면서 왜 나만 다르냐.

다들 그런 나대용의 행동에 지쳐가고 있을 때 문제가 터졌다.

가람과의 계약기간이 끝난 사미아가 탄자니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짙은 향수병을 앓고 있었고, 내 죽음과 나대용의 폭정으로 지쳐 있었다.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대용은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고, 격분했다.

관리자의 힘까지 받았으면서 마탑에서 나가겠다는 건 '배신행위'라고 말한 것이다.

사미아는 워프게이트의 힘으로 탄자니아와 마탑을 돌아다니며 관리자의 역할은 계속 수행하겠다고 밝혔지만 나대용의 생각은 달랐다.

-당신도 내가 김유신이 아니라서 그런 겁니까?

그때 사미아는 나대용이라는 사람에 완전히 질리고 말았다. 이대로 떠나면 배신으로 간주하겠다는 말에도 사미아는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도 묵힌 감정이 폭발해서 말했다.

-내가 충성을 맹세한 건 당신이 아니라 김유신 헌터다.

그 말이 시발점이 되어 나대용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사미아의 이탈 이후, 나대용은 병적으로 관리자들과 동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대용은 친구처럼 격식 없이 어울리던 4층팀과도 문제를 일으켰다.

어느 순간부터 나대용은 자신에게 마탑주로서의 최대한의 예의와 격식을 차릴 것을 요구했고, 갑작스러운 태도전환에 4층팀은 당황하고, 어색해했다.

하지만 나대용은 엄격했다.

-지금 그 말투는 뭡니까. 마탑주에 대한 반항입니까?

-내가 김유신이었어도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사소한 격식 문제 때문에 징계를 가하거나, 후배들이 다 보는 앞에서 차도연을 무릎 꿇린 적까지 있었다.

이에 차도연도 완전히 질려 버렸고, 마탑을 떠났다. 다른 4층 멤버들도 하나둘씩 마탑을 떠났고 나대용의 속앓이는 깊어졌다.

이미 속이 곪아 터진 그는 원인을 타인에게 돌렸다.

-다들 내가 김유신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지?

나대용이 자신의 뜻을 강요할 때마다 동료들은 나를 그리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당신이 뒤에서 더러운 짓을 꾸미고 있었단 것도 다 알아."

가만히 듣고 있던 은솔이 입을 열었다.

"오빠야랑 마나의 아이의 목숨을 노렸고, 죄 없는 사람들까지 아무렇지 않게 죽였어. 당신은 마탑주 어쩌고 하기 전에 그냥 인간으로서 선을 넘은 거야! 알아?"

"……."

나대용의 몸에서 마력이 물씬 흘러나왔다. 서울 하늘이 점점 먹구름으로 뒤덮인다.

"……역겹고 가증스러운 위선자들. 다수가 사람 한 명 바보 만들기 쉽지, 어?"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듯했다.

전격계 5서클 마법이 내려온다.

"너희야말로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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