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88화
"축하한다. 새로운 천공성주."
"아……"
하예린의 눈이 감격으로 그렁그렁 해졌다. 유신은 그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머리 위에 바나나 껍질은 패션이야?"
얼굴이 확 붉어진 그녀가 얼른 바나나 껍질을 던져 버렸다.
유신은 고개를 돌려 악마를 관찰했다.
'흠.'
방금 타격이 제대로 들어간 걸 보니 여기선 그 방어막 같은 기술은 못 쓰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 잘 됐다.
"조심해 제자. 저거 끈질겨."
"네!"
유신과 하예린은 동시에 오른팔을 뻗었다.
"여기서 모든 힘을 다 퍼붓는 거야."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날개가 동시에 펼쳐졌다.
악마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을 신호로, 두 날개의 무수한 깃털들이 수천 갈래의 섬광이 되어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콰콰콰콰콰콰!
하예린의 깃털은 악마를 짓눌렀고, 유신의 깃털은 명중한 즉시 마법이 되어 폭발했다. 중간중간 섞여 있는 프로메테우스들이 일어나 2차로 악마의 몸을 휘감았다.
"하여튼 세상만사 한 치 앞도 모르겠다니까."
공격을 퍼붓던 유신이 중얼거렸다.
"천공성주와 같은 편이 되어 싸우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하예린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카루스의 빛이 한층 더 커졌다.
"그 김유신과 같이 싸우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맹공은 거의 10분이 넘게 이어졌다. 소모된 깃털만 수천 장에 달했다. 이제 악마의 몸은 바닥에 틀어박힌 채 폭발 연기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모든 공격을 쏟아부은 하예린은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짚었다. 마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달하며 그녀의 이카루스도 사라져 있었다.
"괜찮아?"
"네,네."
유신의 청의도 사라지고 있었다.
마에스터의 지속시간이 끝나고, 다시 원래의 헌터슈트 차림으로 돌아왔다.
'에아, 어때?'
-아직 생명 반응이 느껴집니다.
유신은 혀를 찼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쿠우웅!
폭발 연기 속에서 악마의 팔이 모랫바닥을 붙드는 게 보였다.
이제 서울의 모습은 거의 90% 이상 사라졌고 붉은 사막이 서울 전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악마의 앞에는 자줏빛 역장이 보였다.
처음에 홍연과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바로 그 힘. 서울이 자신의 영역이 되며 놈이 가지고 있던 힘도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에아, 미리 사과할게."
-네. 결국 쓰시겠군요.
"상대가 이런 난적뿐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유신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블루 엘릭서를 꺼내 입으로 들이켰다. 동시에 악마가 바닥을 움켜쥐더니 도움닫기와 함께 돌진해 왔다.
"아저씨! 위험해요!"
하예린이 외쳤다. 물론 유신은 데바의 눈으로 그 움직임을 완벽히 포착하고 있었다.
오른 다리가 소름 끼치는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신발 밑창에는 꿈틀거리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허리와 다리가 비틀어지며, 이상적인 자세의 발차기가 달려온 악마의 안면에 꽂힌다.
<데바스타>
굉음과 함께, 악마의 몸이 그대로 뒤로 꺾여 날아간다.
"지금부터 암흑 마법 봉인 푼다."
쿠쿠쿠쿠쿵!
악마가 모래 언덕을 박살 내고 바위를 몇 개나 부수며 날아갔다. 다리를 접은 유신은 바닥에 깔아둔 마법진을 디뎠다.
마법진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며 이번엔 그의 몸이 검은 연기와 함께 돌진한다.
후우우웅!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진 악마의 위로 유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공격 찬스였으나, 유신은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의 시선과 움직임을 분산시키며 새로운 마법진을 악마의 위로 깔았다.
"마지막은 양보할게."
<가속의 진>
<증폭의 진>
적색과 녹색의 마법진이 20층으로 겹겹이 쌓인다. 바로 그 위로 붉은 섬광이 일직선으로 내달린다.
<적무>
콰아아아아아아악!
홍연의 검이 악마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스파크 튀듯 휘몰아치는 적광기가 거센 후폭풍을 일으켰다.
악마가 고통에 울부짖는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유신의 이어마이크로 들렸다.
-마지막은 양보할게요.
그녀가 악마의 가슴에 박아 넣은 검은, 다름 아닌 유신의 스펙터였다.
"언제 가져간 거야?"
유신이 픽 웃으며 오른팔을 세웠다.
<케일 (Cheir)>
화염계 7공정 마법을 시전했다.
스펙터의 검 끝에 금속판의 마법진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조그만 탄피같은 것을 우르르 쏟아내기 시작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탄피들은 창조와 동시에 쉴 새 없이 굴러 가 몬스터의 내장, 혈관, 근육 등으로 옮겨갔다.
"이제 됐어."
유신이 신호하자 그녀가 스펙터를 뽑으며 물러났다. 사용자가 아니라서 스펙터의 무게 보정이 없는 지 꽤 힘들게 옮겼다.
그리고 악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부는 비만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캬아아아아악!
악마가 뛰어드는 것보다 빠르게,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악마의 배가 한계치까지 불룩해지더니, 이내 신체 내부에서부터 대폭발이 일어났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후폭풍이 몰아친다. 다른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게 에아가 주위에 쉴드를 펼쳤다. 후끈거리는 열감이 온몸에 확 와닿았다.
"흐으으."
유신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생명 반응을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저, 저기……!"
"막이 깨지고 있다!"
카타클리즘의 보스 몬스터가 소멸했다.
변이된 공간을 유지하고 있던 매개체가 사라지니, 서울시 전체를 뒤덮은 카타클리즘의 막이 유리 파편처럼 깨져 나가고 있었다.
"서울이 돌아온다!"
"오오오!"
황량한 붉은 사막에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시민들이 환호성을 쏟아냈다.
헌터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무전기에 귀를 기울였다.
치직!
-여기는 A-5! 이레귤러 소멸 확인! 레드게이트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다들 방심하지 마. 마지막까지 몬스터 피해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서울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시민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 넓은 공터에 대기시켜.
-통신양호.
서울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대한민국을 몇 번이고 멸망의 위기로 몰아간 레드게이트는 결국, 이것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부사령관님! 오셨습니까!"
"그래."
임남진이 어깨를 두들기며 현장에 도착했다.
이레귤러가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식에 당장 헬기를 타고 서울로 달려온 길이었다.
"조, 조금 쉬시지 말입니다."
임남진의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본 헌터가 기겁하며 말했다.
"됐고, 협회장은 어디…… 음?"
한 무리의 인파가 웅성거리며 현장에 몰려들어 있었다.
임남진은 성큼성큼 사람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오늘의 영웅들이군.'
유신과 홍연이 서로에게 기댄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옆에는 엎드려 자고 있는 하예린도 있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이들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지, 진짜 김유신이야?"
"에이, 설마."
찰칵찰칵 휴대전화 카메라 셔터가 울렸다.
"자, 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헌터들이 사람들을 몰아냈다. 임남진은 부하 헌터에게 엠블런스를 부르도록 했다.
'이번에도 해냈구나, 김유신.'
카타클리즘부터 레드게이트까지.
사실상 이번 재앙은 유신의 독무대였다.
* * *
차의 덜컹거리는 흔들림에 눈이 떠졌다.
주위를 살펴보니 대형 승합차의 내부였다.
뒤통수가 아프다.
운전수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과속방지턱 좀 살살 밟아줬으면 좋겠다.
-탑주. 일어나셨습니까?
에아의 상냥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깜빡 졸았네. 얼마나 잔 거야?'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두 시간 정도 주무셨네요.
'재앙은?'
-레드게이트는 올 클리어. 카타클리즘도 마지막 제주 지역을 제외하면 전부 클리어됐습니다. 공략도 순조로워서 두 시간 뒤면 올 클리어 소식을 전해 들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행이다. 이제 다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운전수 옆 조수석에 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침대처럼 좌석등받이를 끝까지 뒤로 젖힌 채 누워있었다.
"지금 막 반포대교를 지났습니다. 곧 병원에 도착할 겁니다."
헌터 슈트를 입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 어깨 쪽에 협회 마크가 보였다.
"그런데 누구세요?"
"아, 기억…… 안 나십니까? 저는 공인 3급 오호승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헌터님 아카데미 시절 때 좀 뵈었는데……"
어, 그랬나? 잘 모르겠네. 전혀 기억이 없다.
"서울은 어때요?"
"하하! 직접 창밖을 보시죠."
그의 말대로 창밖을 보았다.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사막에서 다시 우뚝 솟은 빌딩 숲이 보였고, 도로엔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다.
뒤편에는 한강도 보이고 하늘에는 구조 헬기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다.
서울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부 김유신 헌터님 덕분입니다."
"저 혼자 한 일도 아닌데요 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옆 좌석에서는 홍연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체력 상태는 좋아 보였다. 레드게이트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싸워놓고 저런 회복력이라니.
괴물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잘 자네.'
그녀는 고른 숨 소리를 내며 몸을 한 차례 뒤척였다. 얘는 뭐 자는 모습마저도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예린이는요?"
"같이 싸우던 학생이라면 몸 상태가 불편해 보여서 헬기에 태워 먼저 보냈습니다."
하긴 천공성주로 각성하자마자 힘을 펑펑 쏴댔으니 몸이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 하다.
누구 닮아서 저렇게 무리하는…….
-스승을 닮았군요. 안 좋은 것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
에아와 이런 저런 만담을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아저씨. 일어났으면 의자 좀 세워주시죠?"
이제 보니 내 뒷좌석의 여자가 무척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홍연을 만나기 전에 봤던 여성 헌터다. 이름이 윤슬아라고 했던가.
"미안합니다."
내가 의자를 되돌리자, 윤슬아는 뒷좌석에서 건너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홍연의 상태를 살피던 그녀는 몇몇 기계들의 수치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음."
그때였다. 홍연이 힘겨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여, 연아!"
윤슬아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야! 괜찮아? 몸은 어때?"
홍연은 멍한 눈으로 윤슬아를 바라보았다.
"……저,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생뚱맞게 무슨 꿈?"
"김유신 선배가 돌아와서 같이 싸워줬어요."
뭐래는 거야.
……얘도 참 못 말린다. 아직도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윤슬아도 곤란한 웃음을 흘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저 너무 이기적이죠?"
그녀가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천장을 가렸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인데…… 세상일이 그렇게 내 좋을 대로 될 리가 없는데……."
"멀쩡한 사람 죽이지 말지?"
그녀가 더 감성에 빠져들기 전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린 홍연은 뒤늦게 옆 자리에 앉은 나를 발견했다.
"아?"
지금까지 본 그녀의 표정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