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87화
시민들은 지금 이 바로 각종 매체에서 질리도록 강조했던 '1급 대피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1급 주의보! 1 급 주의보가 발효됐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비상구를 통하여 신속히 건물 밖으로 탈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방송 스피커에서 비상 상황임을 알렸다. 다급해진 시민들은 앞다투어 지하 대피로와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아파트, 빌딩, 공원, 지하철 등 각종 도시 구조물들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들이 딛고 있는 도로와 콘크리트 타일들이 흐릿해지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황량한 적색의 모래로 변하고 있었다.
"이, 이건……!"
베테랑 헌터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이 지형은 틀림없이 레드게이트였다.
-서, 서울 전역이 던전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침투조의 보고 파일과 동일, 서울이 레드게이트화 됩니다!
사태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수한 빌딩 숲의 대도시가 황량한 붉은 사막으로 바뀌고 있다. 덩달아 모래 속에서 레드게이트의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기는 B-50! 타뮬러스 7기 발견!
-여기는 Z-6! 오버시어 1기를 발견했습니다!
대한민국 멸망의 순간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의 민간 피해는 있을 수 없다!
-시민들을 서울 밖으로 피난시켜! 당장!
서울 주둔 헌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직은 카타클리즘 초기였고, 100% 지형의 교체가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서울과 던전의 중간 형태.
당장은 리젠되는 몬스터의 수가 적어서 막을 만 했지만, 겁에 질린 인파들이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바람에 헌터들이 몬스터를 딱 집어서 사살하는 게 어려웠다.
전장과 비전장이 구분되지 않는 난전의 현장이다.
[국민 여러분! 침착해 주십시오!]
그때 서울의 동원 가능한 모든 스크린에서 이덕배 대통령의 얼굴이 나타났다.
[우리 대한민국은 저력 있는 나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해 주시기를 저, 이덕배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에 몇몇 시민들은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재 외곽지역의 교통 장애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부디 정부의 통제를 따라주십시오! 우선 외곽지역의 인원부터 먼저 빠져나간 뒤, 도심지 인원이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도심은 헌터들이 지키고 있으니 더 안전합니다!]
이덕배가 대기 지역을 발표했지만, 당장 내가 살기 바쁜 시민들의 귓가에 그런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외침은 공허하기만 했다.
[여러분! 동요하지 마십시오! 저도 서울에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을 한 분도 남김없이 모두 보낸 뒤에, 이 이덕배가 최후의 일인으로서 나갈 겁니다! 정부는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몇 시민들은 눈치챘다.
서울 전체에 카타클리즘이 발현된 상황.
빌딩과 건물들이 흐릿해지며 사라지려는 가운데 이덕배의 집무실은 흐릿한 기색도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울에 있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새끼가!"
"집어치워!"
시민들은 격분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게 대체……'
한편, 하예린은 천공성의 시선으로 엉망이 된 서울을 살피고 있었다.
도시 전역에서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 여길 봐도 사람, 저길 봐도사람. 도로를 차지한 사람들이 벌떼처럼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고, 그뒤를 몬스터들이 쫓는다.
죄책감에 몸이 떨렸다.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아저씨 말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뭐라고 이런 싸움에 끼어들었을까.
……이유?
눈이 부셨으니까.
부러웠으니까.
함께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전투한 뒤, 떳떳하게 웃고 떠드는 김유신과 동료들의 모습이, 그 유대감이 부러웠다.
나도 저기에 끼고 싶었다.
나도 함께 웃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공인 헌터도 아닌 뭣도 없는 고등학생 주제에.
내가 뭐라고-
[사도가 깨어났습니다. 출입자를 감지합니다.]
'……뭐?'
생전 처음 보는 플레이어 메시지에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천공의 사도가 출입자의 적합성을 판정합니다.]
[이름 하예린. 마력적합성 SS. 동질도 A.]
[출입자는 적절한 개체로 판정.]
[출입자는 성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플레이어 메시지가 아니라 천공성의 목소리였다.
[천공의 사도는 출입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이게 그냥 평범한 제안이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한 내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다.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 유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그는 다시 마탑주로 복귀할 것이다. 세계의 톱이 될 것이다.
자신과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사람.
마탑주의 수업을 들었던 것도 그저 추억으로.
이제는 그와 헤어져야 한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반칙 같은 힘이라도, 내 것이 아닌 힘이라도.
그의 곁에 계속 있기 위해선 내가 바뀌어야 했다.
"받아들이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공성의 코어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초록빛을 일으킨다. 그 마력이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치 신체가 재구축되는 고통, 거대한 이질감, 하예린은 몸을 비틀고 뒤흔들며 괴로워했다. 벽에 머리를 박으며 신음을 흘렸다.
버텨야 한다.
어떻게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채우는 이질감과 싸웠다.
* * *
신당역 대피소.
지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주위의 헌터들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외쳤다.
"자, 자, 서둘러 주세요! 빨리!"
대피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중에는 카임의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유신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던 '오정호'도 있었다.
"아 씨! 이게 무슨 꼴이야?"
그의 어깨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몬스터가 나타나 시민들을 위협했을 때, 호기롭게 마법을 썼다가 역으로 다치기만 했다. 뒤따라온 공인헌터들에게 욕만 더럽게 얻어먹었다.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사냥터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조심해!"
누군가의 외침에 오정호는 고개를 들었다. 건물들 너머로 하얀 얼굴의 거대한 몬스터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태어나서 저런 건 처음 봤다.
크기도 크기지만 이마의 굳은살이나 입술의 주름까지, 인간과 똑같이 생긴 이목구비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든 여기서 도망쳐야 했지만.
"으아아앙!"
그런데 옆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아까 앞에서 뛰어나가던 꼬마가 무릎이 까진 채 울고 있었다.
"에이 씨!"
알량한 정의감 따위는 아니었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이를 향해 달리면서 2공정 라이트닝 글레이브를 시전해 악마에게 날렸다.
파직!
그러나 악마의 몸에 닿자 작은 스파크가 튀는 게 전부였다.
악마가 팔을 내렸고, 오정호는 울고 있는 아이를 껴안은 채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악마가 만든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너무 거대했다.
'X발! 여기서 죽는……!'
쿠우우우우웅!
굉음.
바람.
그리고 끼기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가. 쫌!"
오정호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날개를 가진 소녀가 악마의 팔을 막고 있었다.
에메랄드 빛깔의 눈을 가진 소녀의 모습, 그건 영락없이…….
"하, 하예린?"
끼기긱!
한쪽 날개를 뻗어, 소녀는 악마의 팔을 받아낸 채 힘 싸움했다. 이내 꺾여 있던 날개를 크게 펼치며 악마의 팔을 뒤로 쳐냈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날개에서 녹색 돌풍이 뻗어 나갔다. 악마의 몸이 크게 기우뚱하며 밀려났다.
'뭐야 저게. 진짜 하예린이라고?'
저주받은 아이. 툭하면 마인이라고 괴롭힘이나 당하던 같은 반 열등생이 저 거대한 몬스터를 날려 보내는 이 광경을 친구들 앞에서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멍해 있던 오정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후방으로 몬스터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예린! 뒤야!"
그녀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예린 오리지널 - 에어 차크람>
그녀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원형의 바람 칼날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휘두르자 몬스터들의 몸이 가뿐히 두동강 난다.
지켜보는 오정호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못 본 사이 그녀 혼자 저 먼 천상계의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와, 개멋있…… 어?'
쿵!
몬스터들을 잘만 썰고 다니던 하예린이 빌딩 벽에 머리를 박았다.
"악!"
그러곤 우스꽝스러운 비명과 함께 떨어졌다.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열려 있는 쓰레기통에 쏙 들어갔다.
"비행 어려워어어어!"
'…….'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오정호는 무릎이까진 아이를 안아들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으이 씨!"
그녀가 벌떡 쓰레기통에서 뛰쳐나왔다. 머리 위 이상적인 위치에 바나나 껍질이 올라가 있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우우우우우우!
악마가 그녀를 발견하고 도약했다.
"왔다아."
긴장한 얼굴의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흑빛 궤적을 그리며 내려오는 악마의 팔이 그녀의 날개와 부딪쳤다.
쿠우우우우웅!
양쪽 날개로 성공적으로 가드한 그녀가 바로 깃털을 날려 보냈다. 섬광처럼 날아간 깃털들이 악마의 몸에 연달아 꽂혔다.
"이제 그만 쫌!"
그녀가 차크람을 들지 않은 왼팔을 세웠다.
"떨어져!"
왼팔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깃털의 마력이 무게로 치환되며 악마가 공중에서 떨어진다. 사막이 되어 가는 바닥에 처박히며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우우우우!
지면에 떨어진 악마가 격분하며 입을 쩍 벌렸다. 순식간에 마력이 입 안으로 모여들더니 파괴의 섬광이 뻗어 나갔다.
이에 하예린은 미소 지으며 오른팔을 펼쳤다.
"발사."
창공이 번쩍이더니 대기하던 천공성에서 한 줄기 빛이 쏘아졌다. 악마의 섬광과 천공성의 포격이 격돌하며 주위의 빌딩들이 찌그러졌다.
-쿠루룩!
악마가 힘에 겨운 소리를 냈다. 이내 천공성의 포격이 악마의 섬광을 뚫고 들어가 가슴 한복판에 맹렬한 폭발을 터뜨렸다.
"하아. 하아."
자욱이 피어오른 연기를 보며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어, 엄청 지쳐.'
이 힘을 얻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너무 무리했다. 천공성주의 힘은 거대했지만, 아직 받아들인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
화아아아아악!
그때 연기 속에서 악마의 팔이 다가왔다.
하예린이 반응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길어진 팔이 그녀의 두 날개를 붙잡아 바닥에 넘어뜨렸다.
"큭!"
그녀가 다급히 손에 든 차크람을 날렸지만 악마는 입을 벌려 칼날을 씹었다. 마법이 해제되며 충격을 받은 그녀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우우우우우우!
하얀 얼굴의 악마가 이빨을 보이며 하예린을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어휴, 이빨 썩은 거 봐."
-……?
다가오는 악마의 얼굴이 우악스러운 손에 붙들렸다.
"저리 치워."
쾅!
마치 트럭에 치인 것처럼 악마의 몸이 날아갔다.
하예린은 눈을 크게 떴다. 주위에 빛의 깃털을 뿌리며 등장한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저씨!"
"설 수 있겠어?"
"네!"
유신의 손을 잡고 일어난 그녀가 우물쭈물 말했다.
"죄, 죄송해요! 아저씨가 빌려주신 성을 마음대로…… 좀 이따 반납할게요!"
반납이란 말에 유신이 푸핫 웃었다.
"반납은 무슨, 처음부터 이런 의도로 준 거야."
유신은 이카루스를 펼친 그녀의 모습을 한번 감상하고는, 미소 지으며 어깨를 두들겼다.
"축하한다. 새로운 천공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