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85화
어두운 밤하늘에 무수한 붉은 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고, 길고 검붉은 궤적을 남기며 사선으로 내려온다.
불타는 유성이 낙하하는 모습에, 지켜보는 몬스터나 인간이나 공포감이 싹트는 건 마찬가지였다.
청의를 입은 유신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휘말리기 싫으면 제 옆으로 오세요."
그 말에 헌터들이 유신 쪽으로 바짝 다가온다. 천하의 홍연마저도 얼른 유신의 옆에 붙어 소매 끝을 붙잡고 눈을 굴렸다.
뒤이어 종말의 공세가 시작된다.
사방에서 대지가 뒤흔들리는 충격음과 함께 화염의 산이 연거푸 올라온다.
시야는 순식간에 360도 어딜 봐도 화염. 유신과 헌터들은 화염산의 중심 서 있는 격이 됐다. 몬스터들의 몸은 흔적도 남지 않고 불살라진다.
가히 전위적인 광경.
범위에 특화된 5공정 마법들이 도시 하나를 무너뜨릴 위력이라면, 7공정의 아마겟돈은 나라나 대륙을 멸할 정도였다.
'……선배.'
유신은 덤덤히 던전의 몬스터들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되돌렸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유신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가짜 같아?"
"……."
비로소 냉정을 되찾은 그녀의 두뇌가 상황 파악을 위해 회전했다.
실력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그리고 그 어떤 사태라도 가뿐히 해결해 버리는 기질까지 직감적으로 이남자는 김유신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
그렇다면 아까의 그 부끄러운 일도.
"아아…… 아아아아……!"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닌 게 된다. 그 사실을 자각한 홍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그래? 너 괜찮……"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두 팔을 휘저었다.
죽고 싶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물론 그런 홍연의 모습은 유신에겐 좋은 먹잇감이었다.
"네가 먼저 해놓고 왜 부끄러워 하는 거야? 이 입술 도둑……"
"으아악! 아아악!"
"혓바닥이……"
"제발 그만! 더는 말하지 마세요!"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헌터들은 또 한 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가 진짜 자신들이 아는 홍연이 맞나 싶었다.
언제나 싸늘하고, 냉정하고, 피도 눈물도 없고, 배신자라면 망설임 없이 죽이고 대통령이라도 두들겨 패는 그 협회장과 지금 이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게 보고도 믿기 힘들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오호승과, 김승현을 비롯한 몇몇 남성 헌터들은 묘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 사랑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작은 미련마저도 눈물을 삼키며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유신이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던전의 주인이 많이 화난 모양이야."
"그러네요."
홍연 또한 유신이 보는 곳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만이 넘는 몬스터가 일거에 증발한 뒤, 땅이 떨리고 하늘이 진동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마치 지각변동이 일어나듯, 지면의 중간이 통째로 갈라진다.
'온다.'
그 시뻘건 내부에서 보라색의 마른두 팔이 튀어나와 지면을 짚는다.
쿠우웅!
지면을 짚은 두 가느다란 팔에 힘줄이 드러난다. 이내 몬스터가 몸을 끌어올리며 거대한 악마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칠을 한 듯 하얀 얼굴에, 인간과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은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리고 입꼬리까지 올라간 검은 입술까지.
이레귤러 9랭크.
통칭 '흰 얼굴의 악마'.
갈라진 틈 사이로 상체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상당한 크기였다.
-우우우우우우우!
악마가 울부짖자, 지면의 갈라진 틈곳곳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우욱!"
구덩이의 아래를 본 어느 헌터는 헛구역질까지 했다.
갈라진 틈에서 몬스터들, 끔찍한 살덩어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이들의 진짜 본진은 사막이 아니라 지하에 있었다.
"……이제는 놀랄 힘도 없다."
헌터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전의가 무너진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물론 딱 두 사람.
"연아, 계속 싸울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유신과 홍연은 몸을 풀며 싸울 태세 만만이었다.
홍연도 어느새 평소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검을 휘둘러 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기진맥진하던 체력이 회복됐는지 눈에도 총명한 빛이 돌아왔다.
그때 악마가 두 팔을 뻗었다. 요술을 부리듯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에 춤을 추었다.
"조심해!"
"공격이 온다!"
헌터들이 흩어질 준비를 하며 무기를 쥐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격은 오지 않았다. 대신 여기서 꽤 떨어진 거리의 허공에 구멍이 뚫렸다.
-혀, 협회장님! 한국과의 통신이 가능해 졌습니다!
"뭐라구요?"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 구멍은 바깥, 바로 한국으로 향해 있었다.
"이런!"
구멍 앞으로 갈라진 틈들이 생기더니 수백, 수천 마리들의 몬스터들이 앞다투어 넘어가기 시작했다.
"……망했다."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상정 못한 사태, 그럼에도 홍연은 침착하게 이어마이크를 켰다.
"여기는 협회장. 대한민국 상공 균열에서 레드게이트의 몬스터들이 쏟아지니 대비해 주십시오. 레드게이트 내부의 헌터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구 주위를 틀어막으세요."
"예!"
결국 일은 벌어졌다. 서울 하늘에서 열린 균열에서 무수한 레드게이트의 고랭크 몬스터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르르륵!
-캬륵!
인간의 무차별 학살을 명받은 몬스터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면에 안착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인구가 밀집해 있는 서울, 이제 대학살이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키리릭?
몬스터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간들이 도망치는 모습이 나와야 했지만, 그들의 사방으로 펼쳐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평야였다.
지면으로 내려온 다른 몬스터들도 주위에 아무 인간도 없자 분노를 터뜨렸다.
"거기 서울 맞아."
몬스터들의 시선이 위를 향한다.
모래의 옥좌 위에 떠 있는 한 여자가 턱을 괸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웅성웅성.
같은 시각,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이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맑은 하늘이 뿌연 모래에 뒤덮여 버린 것이다.
"이건 뭐…… 황사 같은 거야?"
"그냥 모래바람이 아니라 모래더미인데."
그랬다. 서울 시내를 거대한 모래장판이 천장처럼 뒤덮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서울에 떨어졌지만 시가지가 아닌 상공에 펼쳐진 모랫바닥에 발을 디딘 것이다.
"하아."
옥좌에 앉은 여인은 복잡한 심경으로 허공에 뚫린 구멍을 보았다.
"하여간 진짜 그 자식은 말 한마디 없이……"
아프리카의 통치자이자 세계길드의 수장.
공인 1급 파라오 메네스.
그녀가 손짓하자 지면 곳곳에서 산과 언덕이 일어났다.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물러섰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그 골짜기 사이로 물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강이 형성되어 언덕 아래에 있는 몬스터들이 휩쓸렸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나타난 여성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올리며 빙긋 웃었다.
"우리 대표님이 돌아오셨다니, 행복해라! 돈 냄새가 나네요."
공인 3급. 국제 헌터 길드 '크로우' 의 에이스 중 하나. 물의 마도사 김사랑.
치이이이이!
김사랑이 만든 강의 색깔이 어둠칙칙하게 바뀌더니 역한 냄새와 끔찍한 방울들이 올라왔다. 강에 빠진 몬스터들이 고통에 울부짖는다.
"더…… 워……"
강에 몸을 담그고 있는 또한 사람의 남자가 있었다.
공인 3급.'암약'의 길드마스터. 독의 마도사 조용희.
후우우우웅!
그리고 이번엔 하늘, 무려 거대한 용이 비행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용의 울음 소리에 서울 시민들은 긴장했지만, 김사랑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심희 언니도 왔구나!"
저 용이 바로 안드라스의 최종 진화형.
공인 2급이자 세계 최고의 글로벌길드 '가디언'의 에이스 중 한 사람.
변신 마도사, 골드 드래곤 소심희.
그녀가 입을 벌리자 금빛 섬광이 쏟아져 몬스터들을 초 단위 만에 일소시켜 버렸다. 드래곤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레스'였다.
그들의 등장에 통신에서는 난리가 났다.
-여, 여기는 N-47! 파라오 메네스와 소심희를 비롯해 마도사 김사랑과 조용희까지! 4명의 최상위 헌터들이 전장에 합류했습니다!
-뭐? 그 사람들이 왜 한국에……. 파라오는 갑자기 뭐야!
이 사실은 서울과 연결된 레드게이트 내부에도 전해졌다. 홍연과 헌터들은 대단한 지원군들의 이름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홍연이 유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냥 돌아왔다는 인사말만 남긴 것뿐이야."
"네?"
"이렇게 빨리 도우러 올 줄은 몰랐네."
"도우러 오는 게 당연하다."
유신은 자신의 옆으로 마력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텔레포트'의 감각. 유신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사미아."
사미아는 휠체어 없이, 두 발로 굳건히 선 채로 나타났다.
다리가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특수한 전용 슈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전보다 조금 더 피부톤도 밝아지고 인상도 환해졌다.
"5년간 애타게 기다렸다. 김유신 헌터."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 얼싸안았다.
"어쩐지 빠르더니, 다른 사람들도 사미아가 불러와 준 거예요?"
"그래. 그대가 한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내게 움직일 의사를 알려주더군."
-우우우우우우우우!
악마가 울부짖으며 방대한 마력을 일으켰다. 악마를 지키는 몬스터들이 모조리 허공에 뚫린 구멍으로 향한다.
유신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사미아는 수비에 집중해 주세요. 보스는 저희가 잡겠습니다."
"돌아오자마자 고생하는군."
"제 팔자라고 생각하죠 뭐."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부디 무사해 다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또 다시 그대를 잃을까 하는 점이다."
"걱정 마세요. 그때 같은 무리는 안 해요."
그녀는 믿겠다는 말과 함께 워프를 타고 사라졌다.
"선배, 옵니다!"
악마가 거대한 마수를 뻗쳐온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자세를 낮추었다.
"오랜만에 같이 싸우네."
"네!"
그녀가 미소 지으며 검을 똑바로 세웠다. 유신은 더더욱 자세를 낮추고 손바닥으로 지면을 짚었다.
"먼저 간다."
유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데뷔전의 피날레로 딱 적당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