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84화
부릅떠진 홍연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틀림없이, 틀림없는 유신의 모습이었다.
"선…… 배?"
목소리가 갈라졌다. 몸이 떨림으로 주체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원망스럽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길 결심한 마지막 순간에, 왜 이 사람의 모습을 보여줘서 미련을 가지게 하는 걸까.
마지막을 정하는 것도 내 권한이 아니라는 걸까?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미리 말해둘게."
무릎을 굽혀 홍연과 시선을 맞춘유신은 대뜸 그녀의 뺨을 잡아당겼다.
"나 가짜 아니다?"
"……."
헐레벌떡 그녀를 쫓아온 헌터들은 그 모습을 목격하고 경악했다. 숨멎은 비명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자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이건 뭐, 죽으려고 작정했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유신은 한술 더 떴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홍연이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반응이 없자, 유신은 아예 두 뺨을 눌러 그녀의 입을 금붕어처럼 만들었다.
'이런 미친!'
뒤에서 소리 없는 비명들이 여럿터져 나왔다. 두 손을 모으고 명복을 비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홍연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유신의 팔을 매만졌다.
"정말로 선배인가요?"
"응."
그녀가 천천히 무릎으로 기어와 유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
입을 맞추었다.
유신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홍연은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마주한 곳에서 그녀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갈구하고 있었다. 공허하게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신은 이에 반응했다.
그녀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덮어포근히 끌어안고는, 자신 쪽에서 더욱 밀착했다. 이번엔 홍연 쪽이 놀란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놀라다 못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어, 잠깐. 근데 저 사람 김유신 닮았지 않냐?"
"진짜네."
"닮은 게 아니라 똑같은데요? 본인아냐?"
"5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뭐래."
헌터들 간의 의견도 분분한 가운데.
쿠구구구!
모래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다시금 긴장 상태로 돌아오며 손에 쥔 무기에 힘을 주었다.
"하아."
몬스터들의 기척을 느낀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유신의 가슴을 살포시 밀어냈다.
"……대체 왜."
"응?"
그녀가 무릎을 꿇은 채로 팔을 휘둘렀다. 발톱이 허공에 길게 남으며 몬스터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대체 왜!"
적광기를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손으로 불러들인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크게 휘둘렀다.
세상이 갈라지며 몬스터들이 피를 분수처럼 쏟아낸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 사람을 이렇게 보여줘 놓곤, 이제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는 검격에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진다.
주위의 헌터들은 물론, 유신도 얼이 빠졌다.
'……지가 먼저 키스까지 해놓곤 아직도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긴 평소 홍연의 부끄러움 많은 성격을 생각해 보면, 자기가 먼저 남에게 기습키스를 날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하다.
그냥 환상이라 생각하고 저지른 모양인 것 같았다.
"하아아."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팔을 내렸다.
뒤를 돌아보기 힘들었다. 돌아보면 꿈에서 깨어 있을까 봐.
잠시 후, 결연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한 번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
물거품처럼 사라질 줄 알았던 유신의 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유신이 삐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나중에 집에서 이불 좀 차겠다?"
"……."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협회장님! 몬스터들이 계속 옵니다!"
정말로 몬스터들은 끝도 없었다.
그녀의 방대한 마력을 느낀 근방의 몬스터들이 출구가 아닌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세요. 제가……"
홍연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시야가 여섯 갈래로 흩어지면서 몸에 힘이 풀렸다.
진작에 한계에 봉착한 상황, 검을 바닥에 박고 무릎을 꿇은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넌 쉬고 있어."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홍연은 걸어나가는 그의 등을 수 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아. 실력 발휘 한번 해보자 에아.'
-네, 탑주!
유신의 오른쪽 눈에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가 팔을 뻗으며 말했다.
"일할 시간이야, 케일(Cheir)."
허공에 마력이 모여들며 원형의 금속판이 형성되었다.
카각거리며 회전하는 그것은 허공에 달린 문처럼 보였다.
"그건……?"
"7공정에 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유신의 물음에, 홍연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 아뇨."
"7공정 마법의 개성은 '창조'야."
금속의 마법진의 표면이 불룩거리더니 이내 그 안에서 물건이 튀어나와 유신의 손으로 들어왔다. 매끈한 디자인의 은색으로 빛나는 자동권총이다.
"원소를 기반으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지."
유신이 다가오는 몬스터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해머가 공이를 때리고 탄약이 격발되어 날아가 몬스터의 이마에 정확히 틀어박힌다.
이내 총알이 폭발하며 몬스터의 머리가 터졌다.
"창조의 힘으로 바로바로 원하는 물건을 뽑아낼 수 있고, 원할 때에는 원소의 힘으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해."
유신의 손안에 있는 권총이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돌아가 사라졌다. 홍연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언어 그대로의 '창조'.
이론상으로는 영구적인 물건도 창조할 수 있지만, 연필 하나 만드는데 4개월이 걸린다.
비효율적이라서 하지 않는 것뿐이지 신의 영역에 필적한 대마법이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탑주. 400M 전방에 8랭크 몬스터, '샌드 히드라'가 나타납니다.
그녀의 말대로, 모래가 솟구치며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뱀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버시어에 이은 또 다른 8랭크 몬스터의 등장에 헌터들의 표정에는 절망감이 아른거렸다.
'저거라면 따라 할 수 있겠는데.'
7공정은 창조의 힘, 그 기반은 정신력을 중심으로 한 창의력, 상상력등 전부 정신 파트 쪽이다. 그래서 마탑의 7층 시련도 본인의 의식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신은 7공정 마법진을 움직여 바닥 아래에 깔았다. 그러고는 마력을 쏟아부어 마법진을 열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마법진의 크기가 급격히 확대되더니, 시뻘건 용암으로 이루어진 히드라가 튀어나왔다. 머릿수는 18개로 정확히 두 배가 많다.
불타는 히드라가 몬스터 히드라의 목을 물어뜯었다. 이빨이 살점에 틀어박힐 때마다 불꽃으로 바뀌어 몸속에서 폭발한다.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무너지고 있다.
"대충 7공정은 이런 느낌이라고 보면 돼."
"아……"
홍연과 헌터들은 거대 히드라들의 전투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에아의 목소리가 유신의 귓가에 울렸다.
-탑주,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3만을 넘어섰습니다.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뭐, 힘들게 창조의 힘을 손에 넣었는데 모조품이나 만들어내는 건 너무 재미없잖아?"
"……네?"
유신은 새로운 마법진들을 꺼냈다.
"소마 (Soma), 옵스 (Ops), 카디아(Cardia)."
각각 얼음, 바람, 대지계통의 창조마법진이다. 이내 '케일'도 이들의 옆에 서는 것으로 유신은 네 개의 7공정 마법진을 등지고 섰다.
준비 완료. 유신은 손가락에 마나를 묻혀 자신의 가슴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5년 전, 알베르와 싸울 때 썼던 '타이탄' 마법과 기반 수식은 흡사하지만, 이번 건 창조마법이 기반이다.
결국 5년 전 타이탄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이런 기술도 없었을 거라고 유신은 생각했다.
<김유신 오리지널 - 디포메이션 마에스터>
허공에서 회전하던 7공정 마법진들이 유신의 가슴에 자리한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내 그의 등 뒤로 3미터가 넘는 길이의 마나 날개가 펼쳐진다. 하나하나가 촘촘한 청색 깃털로 이루어져 있다.
"……날개?"
지켜보던 홍연의 눈이 커졌다.
"7공정은 이미지가 제일 중요하거든."
유신이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좋은 싫든 그 사람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콱 박혀 버린 모양이야."
주위로 아름다운 빛의 깃털들이 휘날리는 모습은 확실히 마경이라 부를만 했다. 이내 흩날리던 깃털이 유신의 몸에 닿자, 부드럽게 섬유의 형태로 분해되어 몸을 뒤덮는다.
'변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발끝부터 머리까지 유신은 화려한 청색의 슈트로 갈아입었다.
이것이 마에스터의 기본 형태.
"이 마법이 유지되는 동안, 나는 마나를 일으키지 못해. 대신."
유신이 손가락을 뻗었다. 검지 끝에서 마법진 전개 과정이 생략된 청색의 깃털이 '창조'되었다.
"마법 효과를 담은 깃털을 일으킬수 있어."
마에스터 마법은 유신을 일종의 '원천 마력계 능력자'로 바꿔놓는다.
마나로 직접 마법진을 펼치는 게 불가능해지고 오로지 깃털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유신은 깃털을 손가락으로 집고는 가볍게 손목의 스냅만으로 날렸다.
후우우우웅!
순청의 꼬리를 남기며 뻗어 나간깃털이 전면의 몬스터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 위력 그대로 일직선상에 들어오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꿰뚫고, 마지막으로는 대형 몬스터의 몸뚱이에 다트처럼 박혔다.
어마어마한 물리력. 그러나 물리력만으로는 대형 몬스터를 뚫을 순 없다.
"이 깃털에 담긴 건 '프로메테우스' 두 개야."
화르르르르륵!
몬스터의 몸에 박혀 있던 깃털이 순식간에 쌍둥이 화염 거인으로 변해 몬스터와 주위의 다른 소형 몬스터들까지 집어삼켰다.
유신은 다음 깃털을 뽑아 날렸다.
"여기 담긴 건 슈퍼쉘."
이번에 날아간 깃털은 벼락을 동반한 초대형 뇌우를 만들어냈으며.
"이번 건 볼케이노 그라운드야."
다음으로 날아간 깃털은 몬스터들을 뚫고 바닥에 박히더니, 그곳을 중심으로 화산을 일으켰다.
"이, 이게 무슨……"
헌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쪽에는 초대형 토네이도가, 다른 한쪽에서는 지반이 융기하며 마그마가 흘러내린다.
5공정 마법은 한번 쓰면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시전에 부담이 컸지만, 마에스터 상태를 유지 중인 유신은 그런 제약에서 크게 벗어났다.
깃털은 고강도의 물리력을 가진 마법진의 일종이다. 깃털로 마법을 담으면 마나 소모량, 시전시간, 연산감속의 효과까지 있다.
그야말로 유신에게 특화된 초고율의 물량 난사 모드다.
-탑주! 몬스터의 수가 10만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나와야 재밌지.'
유신이 본격적으로 힘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에 난 날개가 깃털의 형상으로 분해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올라간 깃털들은 버프 효과를 가진 '증폭의 진'과 '가속의 진'으로 바뀌어 탑처럼 고층으로 겹쳐진다.
어느새 유신의 머리 위로는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저기로 그냥 돌멩이를 던져도, 전술 무기에 달하는 화력으로 변해 날아갈 것이다.
"포대 완성. 다음은 탄환."
유신이 두 팔을 벌렸다. 그의 몸에서 깃털들이 자라난다. 수백의 깃털들이 하늘로 끝을 올린 채 대기했다.
-반경 300km의 모든 몬스터들을 감지했습니다.
에아가 몬스터 위치를 표시한 창을 유신의 눈앞에 띄웠다. 유신은 깃털에 직접 투하 위치를 심어두었다.
"가라."
모든 깃털들이 마법진들을 통과해하늘 위로 솟구친다. 깃털이 마법진을 통과할 때마다 들리는 천둥 소리에 헌터들과 몬스터들은 동요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에스터 상태에서만 쓸 수 있는 유신의 오리지널 7공정.
<아마겟돈 (Armageddon)>
어두운 밤하늘에 무수한 붉은 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