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83화
하아. 하아.
홍연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꽂은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 사이로 힘겨운 숨결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그때 땅에 박은 검이 미끄러지며 그녀의 몸이 실 풀린 인형처럼 휘청했다.
"괜찮으십니까?"
황급히 달려온 오호승이 그녀의 몸을 받아주었다.
"예, 고맙습니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오호승의 가슴을 밀어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프로스트도 이제 한계네요."
금속 상자에 들어간 프로스트는 혀를 내밀고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미동이 없었다.
주위의 다른 헌터들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몬스터들의 공세는 끊이질 않았다.
-여기는 팬텀! 전방에 400기의 몬스터들이 추가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녀가 이어마이크로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당황한 오호승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정말로 한계이십니다!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곤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오호승이 뻗은 팔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그는 결국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놈들이 다시 온다!"
망원경으로 전황을 살피던 헌터들이 소리쳤다.
전갈형 몬스터, 5랭크의 타뮬러스가 지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바다에서 헤엄치듯 모래 속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하며 다가왔다. 지나가는 방향마다 기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장갑 사이의 관절을 노려!"
"지금이다, 쏴!"
헌터들의 마력소총이 불을 뿜었다.
무수한 총탄들이 파공음을 터뜨리며 날아갔지만,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몬스터들은 거의 없었다.
전갈들이 모래를 헤집고 근처까지 접근해 왔다.
"효, 효과가 없습니다!"
"여기까지군."
무수히 다가오는 모래 구덩이들을 향해, 팬텀의 길드 마스터 허일이 해머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 나갔다.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
"……대, 대표님?"
허일이 함성을 지르며 단신으로 몬스터들에게 뛰어들려는 순간.
스릉!
세상이 붉은 선으로 절단되었다.
어떤 원거리 공략으로 공략할 수 없었던 외피를 가진 타뮬러스들이 거짓말처럼 두 갈래로 갈라졌다.
단 일격에 수백이 전멸.
"벌써 죽을 생각입니까? 허일 2급."
허일이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홍연이 검을 내리고 미소 짓고 있었다.
허일이 비틀어진 미소를 흘렸다.
"……멋진 마무리까지도 허락하지 않으시는군."
"당신은 중요한 전력입니다. 살아서 함께 보스전까지 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치직!
-여기는 아일라 안세현! 도움이 필요합니다!
홍연이 이어마이크에 손을 올리며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다음 전장으로 이동하는 그녀는 옮기는 걸음걸음마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허일이 입을 열었다.
"블랙잭의 말을 신경 쓰고 계십니까?"
홍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몇몇 사람들에게 미움을 살지언정, 협회장님이 가고 있는 방향은 틀림없이 옳습니다."
허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우리가 물러서면 대한민국은 멸망합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허일은 한탄했다.
"……대체 왜 저렇게 혼자 짊어지기만 하는 거야?"
홍연은 정신없이 아군 진형을 돌아다녔다.
수십여 명의 인명피해가 나야 막을 수 있는 것을, 그녀는 검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몸을 혹사시키고, 체력이 바닥난 것을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 발버둥쳤다.
-역시 이 미친 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어떻게 좀 해봐!
-그러고도 당신이 지휘관이야?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그녀는 기꺼이 감수했다.
그리고 힘겹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둘렀다.
세상이 갈라지고 몬스터들이 갈라진다.
피가 흩뿌려지고 그녀는 다음 장소로 향한다.
"전진합시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책임지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5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목표를 잃은 그녀는, '지킨다'는 것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최고 헌터로서 국민을, 동료를, 조국을 지킨다.
이 신념은 옳다.
하지만 모순에 부딪힌다.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선소수의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희생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세상의 순리.
하지만 홍연은 인명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엇나가는 자들은 냉정하게 배제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주워 담으려고 했다.
다수를 지키고, 희생당할 소수까지 지킨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할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순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재산이 지켜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렇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모순인 만큼 자신이 더 열심히, 온몸이 부서지도록 싸웠다.
만약. 이번 '목표'마저 부러지면 그녀 자신의 마음이 꺾일 것 같았기에.
"하아아아아앗!"
붉은 검격이 세상을 긋는다.
몬스터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전진합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 혼자라면 충분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빠져나가다 못해 혼자 보스를 수색하다가, 운이 따라준다면 보스를 찾아 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이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녀의 목표도 소멸되는 것이다.
더 이상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앞으로."
그러니 그녀는 기꺼이 이 사람들과 죽을 생각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그리고 언제나 그녀에게 감화된 사람들이 나온다.
자신들을 죽음의 장소로 내몬 장본인이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신념을, 그녀의 의지를. 눈이 시뻘게진 헌터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화력을 쏟아붓는다.
"협회장님을 지켜라!"
"정신 차려! 움직여!"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헌터들이 이를 악물고 나아간다.
오로지 저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사냥꾼의 뒤를 따라.
"전진!"
디바이스의 화력이 퍼부어지며 잡다한 몬스터들이 파괴된다.
폭연을 뚫고 나오는 고랭크. 몬스터들은 홍연이 직접 뛰어든다.
한 손으로 휘두르는 가벼운 횡 베기에, 수백 미터가 넘는 몬스터의 상체가 무른 두부처럼 갈라진다.
바닥으로 내려와 사선으로 참격.
사선의 범위에 들어가 있는 몬스터들이 갈라지며 피를 쏟는다.
"흐읍!"
검을 옆으로 눕힌 그녀가 힘껏 발을 내디디며 허공에 내질렀다.
주위로 찌르기 잔상이 휘몰아치는 듯하더니, 고랭크 몬스터들의 머리가 퍽퍽 터져 나간다.
숨이 차오른다.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내가 멈추면 뒤가 전멸한다.
그녀가 악에 받친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들었다.
엄호하려던 헌터들은 다른 고랭크 몬스터들에게 가로막힌다.
홀로 몬스터 진형 한복판에 들어간 그녀의 몸이 시뻘건 소용돌이로 변한다.
콰콰콰콰콰콰!
몬스터들이 갈가리 찢기며 육편이 바람에 흩날렸다.
소용돌이 아래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계속해서 달리며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른다.
그야말로 전신의 모습.
하지만 고독했다.
모두와 함께 싸우고 있음에도 지독한 고독감이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쩌엉!
모래를 튀기며 돌발적으로 휘둘러진 방망이를 그녀는 검을 세워 막아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이 팔을 타고 휘몰아쳤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바닥에 내려온 그녀가 허리를 틀며 검을 휘두르자 몬스터가 두 갈래로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쩌억!
그러나 측면에서의 기습을 피하지 못했다. 그녀가 검을 놓치며 바닥에 쓰러진다.
촤르르르륵!
이번에는 모랫바닥에서 새까만 머리카락이 같은 것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큭!"
그녀가 몸을 버둥거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내 모랫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낸 털 뭉치 같은 괴물이 입을 쩍 벌려 그녀를 집어삼켰다.
-꾸루룩!
잘근잘근 씹어대던 괴물의 이빨 사이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온다.
쩌어어어어어어엉!
괴물의 몸이 내부에서 폭사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온 홍연이 손바닥을 펼친다.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팔을 휘두르자.
세상에 기다란 할퀸 자국이 그어지며 몬스터들의 몸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다.
"으으으…!"
바닥에 착지한 그녀가 달려든다.
다시 한번……!
퍽!
어디가 당했는지도 모를, 전신으로 치미는 통증과 함께 그녀의 몸이 고꾸라졌다. 슈트의 보호 역장도 완전히 박살 났다.
-크르르륵!
이마에 산양의 뿔이 솟아난 거체의 몬스터, '오버시어'는 8랭크 악마형 몬스터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빠르게 그녀의 복부에 괴물의 다리가 틀어박힌다.
그녀가 헛구역질하며 바닥을 나뒹군다.
"하아. 하아."
덜덜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키는 사이, 다가온 오버시어가 팔을 휘두르고 있다.
터업!
바위만 한 괴물의 주먹이 그녀의 작은 손에 가볍게 막히고.
쩍!
번개처럼 날아간 반대쪽 주먹에 괴물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졌다.
주먹을 쳐올린 그녀의 몸이 이내 기울어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 오버시어들과 대형 몬스터, 그리고 크고 작은 수 많은 몬스터들이 끝없이 몰려 들었다.
오버시어의 손에서 솟아난 마력 칼날이 그녀의 목을 향해 휘둘러 지고 있다.
'…….'
두뇌는 끊임없이 막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체념했다.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다.
결국 나는 끝까지 패배자였고, 패배자로서 죽는다.
어울리는 최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순간 그녀는 눈을 똑바로 떴다. 다가오는 검 끝이 망막에 맺혔다.
그리고.
화아아아아아아아악!
목도했다.
전율적인 푸른빛의 섬광이 퍼져 나가는 모습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다가온 오버시어의 팔은 물론, 상체가 원형으로 날아갔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대형 몬스터들의 머리통이 거짓말처럼 터져 나가고 있었다.
고통에 발버둥 치던 몬스터들이 쿵쿵 자리에서 쓰러진다.
수백이라는 숫자가 깨끗하게 그 자리에서 증발했다.
"벌써 포기할 생각이었어?"
어떤 목소리에.
그녀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단색의 슈트틀 입은 남자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 머리카락, 저 눈동자, 저 삐딱한 미소까지, 모든 게 꿈결 같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5년 만이야."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의 뒤로 펼쳐지는 마법진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