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82화
천공성을 탄 유신은 강원도를 찍고 경기도로 넘어왔다.
"예린아. 이제 마나 얼마나 남았어?"
-앞으로 한 발 남았어요! 근데 이거 쏘면 동력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
"오케이, 그럼 바로 파주로 넘어가자."
카타클리즘 쪽은 급한 불은 껐다.
남은 구역은 가람을 비롯한 헌터 팀이 나서면 충분할 것이다.
이제 문제는 레드게이트.
여길 막지 못하면 카타클리즘에 좋은 성과를 낸 게 전부 허사로 돌아간다.
홍연이 무리해서 버텨주고 있다.
어서 도와주러 가야 했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아.'
하예린이 천공성을 운전해줬고, 관리자들이 잘 싸워준 덕분에 마나를 아낄 만큼 충분히 아꼈다.
이제는 온전히 레드게이트에 쏟아부어야 할 때다.
유신은 이어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이제 제가 직접 레드게이트에 들어갈 거예요. 임남진 헌터님께 미리 보고드리고, 출입 절차 좀 밟아달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유신은 보고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서진, 진보라, 은솔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예전처럼.
처음엔 5년 뒤 혼자 뚝 떨어진 기분에 고독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때 나 지금이나 중요한 건 바뀌지 않았다. 그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진보라가 유신의 시선을 느끼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정서진과 은솔도 미소 지으며 그를 보았다.
"이제 레드게이트에 가시는군요."
"그래."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상황이 꼬였어. 레드게이트에 핵을 쐈다나 봐."
세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에 들어가려면 방사능 슈트가 필요한데 여분이 없다더라. 나도 임남진 헌터님 꺼 빌려 쓰기로 한 거고. 너희는 게이트 밖에 대기하면서 몬스터들을 막아줘. 수비조 측도 지금 헌터가 심각하게 부족하대."
정서진과 진보라가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응, 왜?"
"사실 여기 오면서 어떻게 하면 선배님을 붙들어놓을지 고민했거든요."
진보라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5년 전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요."
유신은 쓰게 웃었다.
이제 관리자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이제 그런 막무가내 짓은 안 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고. 뭐, 딱 한 가지는 너희들한테 약속할게."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내 쪽으로 향하게 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난 돌아올 거야. 5년도 참았는데 하루 정도는 참아줄 수 있지?"
진보라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했잖아요. 말 귓등으로도 안 들으실 거라고."
"오빠야!"
그때 은솔이 다가와 유신의 어깨에 뭔가를 매달아 주었다.
"어, 이거 윙골렘 맞지?"
"응! 선물이야."
그녀가 헤헤 웃었다.
"사실 윙골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오빠야 말고는 없어서 그동안 개발을 안 했거든. 급하게 만드느라 충전을 많이 못했어. 오래쓰진 못할 거야."
"와, 진짜 고마워! 안 그래도 꼭 필요했는데."
윙골렘 장착이 끝나자 유신은 마력을 보내 날개를 일으켜 보았다. 깔끔한 외형의 청색 날개가 펼쳐진다.
"잘 쓸게, 솔아."
"응! 꼭 무사히 돌아와!"
은솔이 다가와 유신의 몸을 꼭 안아주며 애교를 부렸다.
유신이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가 헤실헤실 웃었다.
"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서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진보라가 그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뭘 그렇게 혼자 심각해요?"
"쓰다듬는 건 좋지만 쓰다듬어지는 쪽은 별로인 걸까요."
"……아, 또라이 새끼 진짜."
* * *
레드게이트 앞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방사능이 먹히지 않는 몬스터들이 제일 먼저 쏟아져 나왔고, 그다음으로는 방사능에 감염되어 신체가 부서지며 등장하는 몬스터들도 있었다.
-사격 개시!
다시 한번 군의 화력이 한바탕 쏟아졌지만, 자욱한 폭발 연기를 뚫고 5랭크 몬스터들이 방어진으로 들이 닥친다.
최전방에서 지켜보던 임남진이 무전기를 입에 댔다.
"헌터팀 B-35 교전 개시."
-예!
마력검을 든 헌터들이 쏜살같이 뛰어나가 고랭크 몬스터들을 베어 넘겼다. 커다란 몸뚱이가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에 깔렸다.
-부사령관님! 적의 물량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군의 남은 탄 잔량은 30%! 다음 전술핵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임남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조금만 더 대기하도록."
레드게이트에 들어갈 헌터가 한 명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히든카드가 될 지도 모르는 인물.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려 줄 수는 없었다. 방어선이 헐거워지고 있다.
"대체 언제 오는……"
"저 찾으셨어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임남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자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유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유신은 엉거주춤 선 채로 웃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네."
"엄청 기다리셨던 것 같네요. 상황은요?"
임남진은 즉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레드게이트 내부는 문제가 심각해. 다들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지만 보스는 찾아 내지도 못했지. 언제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세."
"홍연은요?"
"무사하네. 협회장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밀렸을 거야."
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저 하나 들어간다고 전황이 막바뀌는 건 아닌데요. 뭘"
임남진은 묘한 미소를 흘렸다.
"미궁던전을 겪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하."
"저기 방사능 보호 슈트가 있네. 내 사이즈라서 조금 클 거야."
유신은 녹색의 슈트를 걸쳐 입은 다음 앞을 보았다.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게이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와, 진입하기 쉽지 않겠는데요."
"그럼 쉽게 만들면 되지 않겠나?"
임남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배웅해 주겠네."
그가 앞으로 걸어갔다. 임남진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그 또한 홍율 시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사실상 수비조 헌터 전력의 30%는 임남진에게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했다.
"내가 길을 열겠네."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면 되나요?"
"그랬다간 자네도 휘말려. 조금 떨어져서 걷게."
그렇게 말한 임남진이 두꺼운 코트를 휘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쩌적! 쩌저적!
바닥을 디딜 때마다 지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가뭄처럼 갈라진다.
임남진을 본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캬아아아아악!
오우거종의 몬스터가 망치 같은 팔을 휘두른다.
쩍!
그러나 임남진의 몸에 닿는 순간 손톱은 깨지고 손가락에서 팔꿈치까지 석화되어 버렸다.
몬스터가 팔을 붙잡고 괴로워한다.
-키리릭!
-케에에에엑!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달려들지만 소용없었다.
임남진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몬스터는 머리가 돌이 되어 부스러졌고, 쇠도끼를 휘두른 몬스터는 도끼날부터 자루까지 과자처럼 박살 났다.
뚜벅. 뚜벅.
그는 묵묵히 적진을 걸었다. 공격하는 몬스터들이 역으로 괴로워하며 나가떨어진다. 어떤 공격도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임남진의 몸이 닿는 곳마다 몬스터들은 석상이 되어버리고, 갈라져 부서진다. 5랭크 이하의 몬스터는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압도적인 퍼포먼스.
빠르지는 않지만 착실히 걸어서 그는 레드게이트 가까이 왔다.
몬스터들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 들었고 어느새 임남진은 몬스터들의 살점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됐다.
-전군 사격 개시.
그때 임남진의 목소리가 전군의 무전에서 들렸다.
-예, 예? 하지만 부사령관님은?
사격 개시.
레드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는 포문들이 일제히 불을 뿜는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불의 징벌은 임남진과 몬스터들을 한꺼번에 휩쓸어 버렸다.
쿠구구구구구구구!
넘실대는 불꽃과 산더미만 한 연기가 솟구친다. 뒤로 물러나 있던 유신은 인상을 굳혔다.
'아무리 임남진이라지만, 이건 좀 위험하지 않나?'
그때였다. 이어마이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네. 들어오게.
유신은 망설임 없이 리프부츠를 밟고 달려갔다.
자욱한 연기의 세상 끝에서 보인 모습은,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이 돌이 되어 퍼질러 있는 모습과, 빌딩만 한 거대 몬스터를 한 손으로 제압한 임남진의 모습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게이트를 가리켰다.
"협회장을 부탁하네."
유신이 씩 웃었다. 하여튼 세상은 넓었다.
"다녀올게요."
공인 2급의 에스코트 덕에, 유신은 거의 마나소모 없이 레드게이트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 * *
레드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유신이 들어온 입구부터 수백 미터까지, 피폭당한 몬스터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몇몇 몬스터는 살아움직이고 있었고, 방사능에 저항할수 있는 고랭크 몬스터들은 성큼성큼 걸어서 출구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옷이 제대로 적용되는 거면 좋겠네.'
헌터 슈트의 방어 역장처럼, 방사능 보호 슈트도 스위치를 ON으로 해두자 녹색막 같은 것이 몸을 둘러쌌다. 내부에 정화 기능도 있어서 숨 쉬는 것도 문제없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유신은 윙골렘을 켜고 날아올랐다.
몇몇 몬스터들이 유신을 발견하고 원거리 공격을 가했지만, 윙골렘을 최고속도로 높여 가뿐히 따돌릴 수 있었다.
피폭지역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던전은 지평선너머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이 넓은 공간의 각지에서 몬스터들이 레드게이트 출구로 몰려들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넓은 황무지를 내달리는 몬스터들의 모습은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
일단은 뭔가 작은 단서라도 필요했다.
유신은 데바의 눈의 기능을 확장하고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마침 레드게이트로 향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왜 입구 쪽으로 돌아오는 거지? 패잔병인가?'
유신은 빠르게 그쪽으로 날아갔다.
"어, 어어?"
"누가 온다!"
헌터들은 잔뜩 경계하며 유신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유신은 두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부사령관님이 보낸 통신팀 헌터입니다."
그가 임남진에게 받아온 부사령 배지를 흔들며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호, 혹시 정식 퇴각 명령입니까?"
"극비라서 말씀드릴 순 없지만, 퇴각은 아닙니다."
헌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는 여러분은 어디 가십니까?"
차량은 15대 정도, 호위 헌터들은 50명 정도다. 그들은 슬금슬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각한 부상자가 다수 있어서 치료를 위해 돌아가려 합니다."
역시 패잔병이었나. 유신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도와 드리고 싶지만 임무가 있어서요. 본대의 위치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유신은 통신병으로부터 던전 내에서 위치 좌표를 표시해주는 기기를 받았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근데 출구 쪽도 몬스터가 많아서 빠져나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그냥 협회장 곁에 붙어 있는 게 안전하지 않나요?"
유신의 물음에 몇몇 헌터들은 슬슬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지금 사태가 많이 악화됐습니다."
"악화됐다고요?"
"이 던전은 클리어할 수가 없는 던전이에요. 협회장님의 힘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체력이 무한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헌터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클리어할 수가 없는 던전이라.'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어디있을지도 모르는 보스를 찾아 내야만 하는 상황이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그녀가 아니다.
홍연의 성격으로 미루어본다면 어떻게든 찾아 내겠다며 무리수를 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 저기……"
그때였다. 낯선 여성 헌터가 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 불렀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리도 절뚝거리는 게 부상이 심해 보였다.
"김유신 헌터님. 맞죠?"
유신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윙골렘에 집중하느라 물의 장막을 꺼놓고 후드를 눌러쓰긴 했는데, 설마 이런 와중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더 숨길 것도 없으니 솔직히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연이는……"
말문을 열던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틀림없이 여기서 죽을 생각이에요."
"……."
"이제는 심적으로도 한계가 온 것 같아요. 제발 부탁드려요. 연이를 구해주세요!"
협회장인 홍연을 '연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녀의 측근인 모양이다.
그녀의 절박한 표정을 보니 홍연의 상태도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네, 저한테 맡기세요."
유신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윙골렘을 작동시켜 공중으로 떠올랐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