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77화
여기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 최고참을 불렀다. 아까 나한테 아이스 자벨린을 쏘려고 했던 마법사가 몸을 일으켰다.
"보라가 어디 갇혀 있는지 알아요?"
"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대서재로 올라왔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대서재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은 재앙이 터진 지금까지도 일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지나가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장시간 격무로 흐리멍덩해진 눈을 보니, 역시 정서진이 부하들 살벌하게 굴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에아."
나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동안 쭉 잠들어 있었던 거야? 휴면 상태라고 듣긴 했는데."
"맞습니다. 마탑주의 장기간 활동정지로 인한 강제 휴면 조치. 마탑주가 아닌 자가 호문쿨루스를 이용해 마탑의 권력을 잡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그런 것도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탑주는 전보다 더 강해지셨군요."
"흐흐,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날 잡고 이야기해 줄게."
그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오래 걸리지 않아 봉인된 서재에 도착했다.
서재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은 우리와 동석한 마법사를 보고는 퍼뜩 경례하며 비켜주었다.
"지휘가 꽤 높은가 봐요?"
내가 물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6층 관리자 신성연이라고 합니다."
"오, 관리자였어요? 이거 몰라뵀네."
"층에 대해 아무 권한도 없는 무늬만 관리자지만 말입니다."
뭐, 그렇긴 하지.
나대용이 15대 마탑주라지만 영지 창에 등록된 직책은 어디까지나 4층 관리자다. 관리자가 관리자를 임명해 층의 권한을 줄 수 없는 노릇이니 이런 식의 인사가 최선이었다.
"내가 복귀하면 진짜 6층 관리자 자리에 관심 있어요?"
신성연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제 실력으로 그런 중책은 부담스럽습니다."
"혹시 모르니 이름은 기억해 둘게요."
신성연은 말이라도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쪽입니다. 마탑주님."
신성연이 입구에 그려진 마법진에 손을 올려 보안을 해제했다.
우리는 함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바로 진보라의 모습이 보였다.
"……보라야!"
그녀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두 팔이 천장의 쇠사슬에 묶여 매달려 있었는데,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다.
거의 고문에 가까운 처사.
죽은 듯이 매달려 있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선배님."
식겁한 나는 얼른 달려가서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다.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그녀는 팔이 저린지 몸을 움츠렸다.
"괘, 괜찮아?"
"그럼요. 이렇게 매달린 지 얼마 안 됐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쓸어주며 신성연을 노려보았다.
"이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같이 동고동락한 동료를 이딴 식으로……"
"저, 저도 조제관님이 이런 처사를 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신성연은 정말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대용이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진보라는 그 사실을 숨기려다가 서재에 갇혔다.
나대용은 좀 더 정보를 얻기 위해 끈질기게 추궁했지만 진보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재앙 출전을 앞둔 오늘까지도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격분한 나대용은 그녀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떠났다.
'나대용……'
아직도 면접장에서 그를 뽑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스승님 스승님하고 졸졸 나를 따라다니던, 그 순박하고 정 많은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변해 버린 걸까.
역시 나대용은 내가 돌아오는 걸 원치 않는 걸까.
'정신 차리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지금은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이어마이크에 손을 올렸다.
"서진아. 마탑에 무사히 들어왔어. 계획대로 에아를 깨웠고 보라도 구했어."
-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량을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나는 진보라를 보며 말했다.
"마탑은 위험해. 아케인도 나대용의 마수가 뻗쳐 있으니 마찬가지고. 일단 재앙이 끝날 때까지는 가람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저도 이제 공인 3급……"
"그동안 계속 갇혀 있었잖아. 나중에 싸우더라도 하루 이틀 정도는 푹 쉬어."
나는 진보라의 몸을 부축하고는 신성연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평소처럼 행동해요. 나대용이 추궁해도 적당히 둘러대시고요. 어차피 그쪽도 재앙 공략 중이라 정신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에아. 너도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내서포트에만 집중해줘."
"탑주의 명을 따릅니다."
내 부축을 받고 일어난 진보라가 나를 보았다.
"그럼 선배님은……"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에아도 돌아왔겠다, 나도 이번 전쟁에 가세할 생각이야."
* * *
-레드게이트 발현 확인!
-게이트 오픈 10분 전!
TOP10 길드와 무수한 정규군 병력을 이끌고, 홍연은 최전방 파주에 와 있었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최정예. 이들이 무너지면 대한민국도 무너진다.
드넓은 벌판 너머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고, 흐르는 강 앞으로 태풍을 연상케 하는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곧 저기서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TOP10 길드는 홍연이 꽉 잡고 있어서 이탈자가 나오진 않았지만, 레드게이트 참전 지시를 받은 몇몇 길드들이 해외로 도피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명백했다.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레드게이트 공략은 위험했고, 마탑과 가람을 후방으로 뺀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해내야만 해.'
홍연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라면 이런 난관쯤은 쉽게 극복했을 거야.'
자신에게 협회장 자리를 맡긴 뒤, 그야말로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잠적해 버린 홍율.
세계에 마법이라는 학문을 뿌린 뒤, 천공성주와의 전투에서 의식불명이 된 유신.
그 두 사람이 사라진 뒤의 세상에 홀로 남아, 재앙과 맞서 싸워야 했던 그녀는 짙은 고독을 느꼈다.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야 많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고독했다.
"카타클리즘 쪽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홍연의 물음에 오호승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서울 세 곳, 지방 여섯 곳에 카타클리즘이 발현했습니다. 서울은 바로 교전에 들어갔고 나머지 지방 포인트도 마탑의 정예 마법사들이 움직여주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마탑이라면 믿을 만하다. 일부로 선발에 제외해 준 만큼 활약하길 바라며,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드게이트가 발현됩니다!
-충격에 주의해 주십시오!
시작됐다.
휘몰아치던 마력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시뻘건 포탈로 변했다.
길이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포탈의 등장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쿵! 쿠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드넓은 관문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몬스터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새까만 파도가 뭉그적거리며 다가오는 것만 같다.
홍연이 이어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침투조 전부대 돌격준비. 화력조 레드게이트 조준, 발사준비."
수 많은 장갑차의 포문이 위를 향하고, 헌터들은 각자의 헌팅 디바이스를 뽑아 들었다.
"발사."
수천 문의 포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새까만 연기와 함께 임진강 일대가 초토화되며 육편이 흩뿌려진다. 하늘에서는 공군의 폭격기가 날아다니며 무수한 폭탄들을 떨어뜨렸다.
몬스터들의 군단은 순식간에 인간의 화력이 일으키는 폭연속에 말그대로 파묻혔다.
-1 ~4랭크 몬스터들은 괴멸! 5랭크 이상의 몬스터들은 화력을 견디고 있습니다!
-다음 웨이브! 포탈에서 계속 몬스터들이 출현합니다!
예상보다 밀려드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다.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탄의 물량에는 한계가 있고,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진다.
-헌터들이 게이트로 파고들어 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공 몬스터 다수 발견! 상륙 작전의 성공 확률은 5% 미만에 가깝습니다!
참모들의 보고를 들은 홍연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전술핵 발사 준비."
철컥! 철컥!
전술핵 탄두를 실은 포대들이 레드게이트를 향해 조준했다.
오호승이 기겁하며 말했다.
"협회장님! 초전부터 핵은 너무 성급한 게 아닌……"
"어차피 쏘려고 가져온 것 아닙니까."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어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발사."
핵탄두들이 굉음과 함께 날아가 레드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
전술핵이 발사된 이후, 다시 화력세례가 몬스터들에게 쏟아진다.
-여기는 관측반! 몬스터들의 출현이 70%가량 줄었습니다!
핵의 효과는 확실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신체가 뭉개진 채 숨만 붙어 있는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 공세가 한 풀 꺾인 지금이 기회다.
"침투조 돌격 준비."
명령이 떨어지자 헌터들은 개인 슈트 위에 값비싼 방사능 방어 슈트를 한 벌 걸쳤다.
핵무기를 사용한 이상, 레드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헌터들의 수는 제한된다. 이 슈트를 지급받은 정예헌터들만 게이트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홍연 본인도 방사능 슈트를 걸치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승리를.'
그녀는 검을 가슴 앞에 세우며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하는 그녀나름의 의식이었다.
"여기는 사령관. 참전합니다."
그녀가 지면을 짓뭉개며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붉은 스파크가 파밧하고 튀어 오르더니 주위의 몬스터들이 충격파만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그녀는 공인 1급의 대헌터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누구보다 앞장서는 선봉장이었다.
적진으로 들어온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의 산이 반으로 갈라진다. 임남진이 이어마이크를 켜고 소리쳤다.
"지금이다! 침투조 전원 협회장님의 뒤를 따라 진입한다!"
"오오오오오오오!"
TOP10 길드를 포함한 최고의 정예헌터들이 그녀가 만든 길을 따라달렸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같은 시각 유럽.
함선 한 대가 바다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피곤해 죽겠다."
갑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헌터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의 옆에는 매니저로 보이는 여성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그래, 이번엔 어디라고?"
"루마니아입니다. 몬스터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협회에서 직접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매니저가 내민 태블릿 PC를 받아든 헌터가 영상을 실행시켰다.
도시 한복판에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며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었다.
"……심각하잖아!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협회는 뭐한 거야?"
"마인들의 국제공항 공격으로 주력헌터들이 자리를 비운 뒤에 벌어진 일입니다."
헌터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요즘 마인 새끼들 움직임이 부쩍 늘었어. 목적지는 어디지?"
헌터가 물었지만, 매니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저, 저길 좀 보세요."
헌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를 살폈다. 함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닷물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자연현상에 헌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이게?"
함선에 탄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허, 허억……!"
헌터가 헛숨을 들이켰다.
저 거대한 게 스스로의 힘으로 바닷속에서 올라왔다. 물이 폭포가 되어 쏟아지는 모습이 더 없이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