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76화
-탑주님. 카타클리즘이 시작됐습니다.
"응. 나도 도착했어."
나는 상계동에 와 있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
이렇게 빨리 마탑에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어마이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서진아. 나대용의 위치는?"
-인천에 발생한 카타클리즘을 막으러 이동했습니다.
"오케이."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상계동은 5년 전, 유령도시처럼 썰렁했던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이 일대가 전부 연구단지와 마법관련 시설들이 유치되며 재개발됐고, 새 건물들이 쭉 들어섰다. 서울시에서도 상계동을 '마법 연구지구'로 지정했다.
그리고 상계동의 전면에 보이는 통제구역.
'와.'
예전의 그 성의 없는 철조망이 아니었다. 높고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위에는 천장도 있다. 통제구역 전체로 실내로 만들어 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통제구역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의 입구는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나는 정서진이 내어준 카드를 내밀었다.
마탑의 관리자급만이 발급할 수 있는 출입 허가증.
경비들은 출입증을 보고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스응.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좌우로 문이 열렸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와우.'
여기가 그 통제구역이라니, 믿을 수 없다. 그냥 쇼핑하러 어디 큰 건물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실내에 들어온 것처럼 난방이 되어 있었고, 지금은 재앙 중이라 비어 있지만 각종식당과 점포들이 쭉 펼쳐져 있었다.
나는 공항에서 자주 보던 움직이는 발판 위로 올라갔다. 걷지 않아도 바닥이 빠르게 움직여 목적지까지 이동했다.
한때 여기가 그 통제구역이라는 증거를 찾기 어려웠는데, '데바의 눈'을 활성화시켜서 벽 너머를 보니 알수 있었다.
'……아하.'
벽 너머에 울창한 숲과 몬스터들이 있었다. 기둥이나 다른 칸막이로 되어 있는 부분들 너머로는 바로 통제구역이라고 보면 된다.
벽에 붙어 있는 시설 지도를 보니, 필드 마법으로 몬스터의 영역은 최소화하고 인간의 영역을 크게 늘린 모습이다.
'대단한 발상이긴 해. 이것도 정서진 작품인가?'
잠시 후 발판이 멈추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에 투명한 문이 있었는데, 문이 좌우로 열리자마자 찬 바람과 함께 연기가 실내로 흘러들어왔다.
여기부터가 안개결계 지점. 시설은 통제구역 입구부터 딱 안계결계 부근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시설에서 나와 안개를 뚫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걷자, 마침내 탁 트인 공간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긴 언제 봐도 아름답다니까.'
웅장한 마탑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예전과 다를 바가 없이 그대로였다.
이쪽은 경비병력도 없었다. 전부 재앙에 파견됐거나, 혹은 경비가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탑의 문양이 있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적어도 마탑은 외부인 침입 염려는 없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마탑의 정문에 손바닥을 댔다.
화아악!
끌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마탑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넘어질 뻔했다.
"누구냐!"
황금 로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서진 관리자님의 지시로 왔습니다. 2층에서 수령할게 있어서요."
정서진에게 받은 공문을 꺼내서 책임으로 보이는 마법사에게 내밀었다.
마법사는 그 공문을 받아 읽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지이익.
그러고는 공문을 반으로 찢었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몇 번이고 잘게 찢어서 바닥에 떨어뜨린 그가 적의가 물씬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전원 공격 준비."
처억! 척!
어두웠던 로비 곳곳에 불이 확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조명이 아니라 나를 포위한 마법사들의 마법진이 내는 빛이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마탑주님의 명령입니다. 지금 이시간부로 마탑에 침입하는 자는 누구든지 붙잡을 것. 설령 그 사람이……"
마법사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관리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
"관리자분이 보낸 사람? 그 정도야 당연히 체포 대상입니다."
하예린이 납치당할 뻔한 그 날, 정서진은 진보라에게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물론 그녀가 답장을 보내오긴 했지만 정서진은 이상하다고 했다.
-원래 진보라 씨는 제 메시지엔 읽씹이 기본이거든요.
이상함을 느낀 포인트가 불쌍했지만…… 아무튼 진보라가 위기에 빠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진보라는 그날 이후 마탑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라는 어딨죠?"
내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자 몇몇 마법사들이 인상을 썼다. 내 앞의 마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요양이 필요해 잠시 쉬고 계십니다."
"감금했다는 소리를 고즈넉하게 하시네."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주위를 포위한 마법사들의 마법진을 쭉 훑어보았다.
다양한 속성들이 있었지만, 역시 하예린이 말한 5대 속성들이 가장 많았다.
"기왕 돌아온 김에, 대출혈 서비스로 컨설팅 좀 해줄까요?"
"……뭐?"
나는 바로 앞의 마법사가 펼친 마법진에 손을 댔다.
그가 흠칫하며 마법을 발사하려고 했지만, 당연히 발사되지 않는다.
"불필요한 수식들이 좀 보이네요."
마나를 흘려보내 마법진에 간섭했다. 외부의 힘에 저항하듯 파직거리던 마나들이 내 마나가 들어오자 환영한다는 듯 날뛰며 동화되었다.
"이, 이럴 수가!"
마법사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마법진에는 기본적으로 저항 수식과 보안 수식이 들어가는데, 나는 그걸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무력화시켰다.
이제 내 입맛대로 마법진의 수식을 바꿔 나갔다. 불필요한 수식을 지우고, 간략화한 다음, 위력을 더 해주는 수식을 추가했다.
그리고 옆으로 살짝 비켜서서, 마법진의 끝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아이스 자벨린>
쏜살같이 날아간 서리의 창이 벽에 박히며 큰 소리를 냈다.
마법사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원래 그가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빨랐으리라.
나는 얼빠진 마법사를 지나쳐 걸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깨어날 시간이야. 에아."
화아아아악!
눈부신 광채가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다. 마법사들이 주춤거리며 눈을 가렸다.
마치 여신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은빛 머리의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호문쿨루스……"
"어, 어떻게? 분명 잠들어 있었을텐데!"
나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사뿐히 바닥을 딛고, 화사한 미소가 나를 향한다.
"안녕, 에아."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14대 마탑주를 뵙습니다."
"……!"
모두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나대용은 본인 스스로를 15대 마탑주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14대라는 숫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사, 상관없어!"
뒤쪽에서 무전을 받던 마법사가 소리쳤다.
"마탑주님의 명령이다! 쏴!"
잘 훈련된 마법사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펼쳐진 마법진에서 빛이 일어나며 마법들이 발사되었다.
그러자 에아가 눈을 부릅떴다.
우웅!
날아오던 마법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중간에 딱 멈춰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녀의 의지가 내 머리와 연결되는 것이 느껴지며, 체내의 마나가 쭈욱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동시에 내 주위로 무수한 황금빛 화살들이 펼쳐진다.
"탑 안에서 탑의 주인을 공격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황금빛 화살들이 날아가 멈춰 있는 마법들을 격추하고 파괴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에아가 내 힘을 사용해 주는 기분은.
"저, 저건 레피드 에로우!"
"그럼 정말로……"
나는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물의 장막이 벗겨지며 맨 얼굴이 드러난다.
오른눈에서는 푸른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일어난다.
"아……"
곳곳에서 탄성이 들린다.
뒤이어 나는 체내의 순도 높은 마력을 폭발시켰다. 마탑 안이 거대한 마나의 흐름으로 충만해지는 동시에,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을 압박했다.
백번 천번의 해명이나 설명보다, 마법사라면 마법사의 방법으로 대화하는 게 더 잘 먹힐 때가 있다.
"공격! 계속 공격해!"
무전기를 든 마법사가 소리쳤고.
"마탑주에게 복종하십시오."
에아가 말했다.
방금 내 퍼포먼스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린 마법사들은, 에아가 했던 것처럼 하나둘씩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탑주를 뵙습니다!"
모두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운데, 무전을 받고 있는 단 한 사람만 우뚝 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가 버럭 소리쳤다.
"이 사람이 정말로 김유신이라고 해도, 우리를 받아준 건 나대용 마탑주님이다! 그분의 은혜를 저버릴셈이냐!"
"음, 맞는 말이긴 해."
나는 에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미소 지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에아랑 보라를 되찾고 싶어서예요. 당신들이 나를 떠받들든 말든 아무 상관 없어요."
"……."
"사실이 그렇잖아요? 지금은 당신들이 말한 15대 마탑주의 시대고, 나는 5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왕좌가 넘어가 버린 건 어쩔 수 없죠. 그런 부분은 인정합니다. 다만……."
나는 천천히 마탑의 기둥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내 손에서 푸른 혈관 같은 것이 뻗어 나가며 마탑 전체로 이어져 나갔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탑의 마나가 나와 동화되는 것을 모두가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건 이 탑의 소유권. 15대 마탑주를 섬기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지만, 당신들은 불법 입주자고 집주인은 납니다."
"예. 그렇습니다."
에아가 말했다.
"제가 증명합니다. 탑의 선택을 받은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오로지 14대 마탑주뿐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안그런가?"
"……."
그러자 마침내, 하나 남은 마법사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빠른 판단이 맘에 드네요."
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여기 있던 일은 비밀입니다."
나는 허공에 영주창을 띄워놓고, 마법진을 두세 개 펼쳤다.
곧바로 금제 마법에 변화를 주었다.
"그 어떤 수단과 경로로도 이 사실을 유출할 시, 당신들은 죽어요."
모두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금제를 보고 있었다. 금제가 수정되며 따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질 것이다.
맘 같아선 조건들을 더 추가하고 싶었지만, 금제 마법의 효력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적어서 일단은 비밀엄수 조건만 담기로 했다.
이걸로 나는 간단히 마탑을 장악했다.
아니, 돌려받은 셈이다.
"보고 싶었습니다 탑주."
그리고 드디어 내 파트너와도 재회했다.
이제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