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74화
[재앙 카타클리즘, 재앙 레드게이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신속히 보호 구역으로 대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재앙의 구체적인 정보가 국민들에게 알려지며 기나긴 피난 행렬이 시작됐다.
협회장 홍연의 계획대로 헌터계 주력은 레드게이트로 향한다.
그만큼 국내 전력이 비기 때문에 사람들을 서울과 경기권으로 모아서 방어 영역을 좁히고, 인명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었다.
"올라가면 우리 집은 어쩌는데? 보상해 주는 거야?"
"조상 대대로 가꿔온 땅을 버릴 바엔 차라리 여기서 죽겠소!"
"정부는 국민의 땅과 재산을 보호하라!"
온 국민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반 협회 성향의 언론사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부정적인 기사들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피해액 3, 000조 예상.]
[레드게이트를 막아도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괴멸한다.]
[재산 보상 약속 없이 일방적인 피난 통보. 무능한 정부와 협회.]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재앙 총사령관인 그녀의 귀에도 들어가고 있었다.
"협회장, 여론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
레드게이트 예상 지역인 파주의 지휘관 텐트 내부, 집행부의 수장 임남진이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던 홍연이 눈을 떴다.
"비상계엄 선포, 최고 단계의 전투준비태세가 발령되어 있습니다. 여론은 무시하고 작전을 속행해 주십시오. 피난 명령은 의무고, 따르지 않으면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도 좋습니다."
임남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제로 피난을 집행하라고?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의 불만이 쌓여 있는데."
"지금은 전시입니다. 모든 불만을 오냐오냐 들어주면 전쟁은 불가능합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재앙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 알겠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지."
임남진이 텐트에서 물러 갔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켰다. 능숙하게 앨범으로 들어간 그녀가 한 사진을 스크린에 띄웠다.
눈부신 알프스를 배경으로, 유신이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양옆으로는 홍연과 한윤정이 그의 팔에 매달려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한겨울 같던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조그마한 미소가 걸린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전화 액정을 슥슥 쓰다듬었다.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배.'
"협회장! 있어? 들어간다!"
누군가 천막으로 들어오자 홍연은 거의 빛의 속도로 휴대전화를 뒤집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임무 수고했습니다. 김승현 헌터."
금속 슈트를 입은 남자가 피식 웃었다.
한때 홍연의 아카데미 학생회장 시절, 그녀의 심복으로서 총무부장을 맡은 김승현이었다. 지금은 협회 직속의 공인 3급 헌터다.
그가 걸을 때마다 등 뒤에 다섯자루의 검이 절그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뭘 그렇게 급하게 숨겨?"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 진짜?"
이 목소리는 옆에서 들렸다.
어느새 책상 위에 고양이처럼 올라가 있는 여성 헌터가 홍연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운영부장을 맡았던 공인 3급의 윤슬아다.
"또 이 오빠 사진 보고 있었어? 너도 참……."
"돌려주십시오!"
홍연이 다급히 팔을 뻗었다. 윤슬아는 허공에서 가볍게 덤블링하며 그녀의 팔을 피했다.
"사람 그리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연이 너 약간 병적인 거 알아?"
"다, 당장 돌려주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헹, 싫은데! 뺏고 싶으면 뺏어보시던가!"
그렇게 말하던 윤슬아는 갑자기 세상이 빙그르르 회전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바닥에 등을 붙이게 된 그녀는 무릎으로 상체를 압박한 채 손끝으로 자신의 목을 겨눈 홍연을 보았다.
"……내놔요."
"여, 여기 있습니다."
윤슬아가 덜덜 떨며 말했다.
휴대전화를 빼앗듯 낚아챈 홍연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크흠. 흠."
민망한 헛기침을 한 그녀가 다시 차분해진 황금빛 눈동자로 김승현을 보았다.
"정찰 결과 보고해 주십시오. 김승현 헌터."
"아, 정말 나만 보기 아깝다니까."
김승현이 낄낄 웃었다.
"세상 사람들도 협회장의 이런 새로운 면모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 연이 너무 귀여워!"
제압당해 있던 윤슬아가 순식간에 뒤로 돌아와 홍연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그녀가 찌릿 윤슬아를 노려보았다.
"공과 사를 구분해 주십시오. 윤슬아 3급."
"아무도 안 보고 있으면 사적인 자리지!"
"또 협회장님 괴롭히고 있었나?"
산만 한 덩치의 인물이 천막으로 돌아왔다.
한때 4학년 체육부장이었던 공인3급 오호승.
그는 후배들을 가볍게 노려봐 준후, 홍연에게 군기가 바짝 들린 모습으로 경례를 올려붙였다.
"화력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수고했어요."
김승현, 윤슬아, 오호승.
아카데미에서의 인연이 협회에서까지 이어졌고 이제는 홍연이 믿음을 주는 몇 안 되는 헌터들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홍연의 풋풋했던 학창 시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연아 연아."
윤슬아가 홍연의 테이블에 턱받침을 하며 말했다.
"이번 재앙 끝나면 소개팅하러 가자. 응? 원래 남자는 남자로 잊는 법이랬어."
"제안은 고맙지만, 관심 없습니다."
"아이잉, 그렇게 말하지 말구! 너까지 언니의 전철을 밟을 필요는 없잖아!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면 홍씨집안 내력이 노처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
홍연이 이마를 감싸며 말했다.
"오호승 헌터. 이거 좀 잡아서 갖다 버리십시오."
"알겠습니다! 이 녀석, 이리와!"
"잡을 테면 잡아보시죠!"
그들이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그때, 밖에서 달려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협회장. 문제가 생겼다!"
임남진이었다.
장난치던 세 사람은 순식간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경례를 올려붙였다.
홍연도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덕배 대통령이 문제를 일으켰어."
임남진이 홍연 앞에 스크린패드를 내려놓고 영상을 실행시켰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참담한 심정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장소는 광화문. 현재 홍연의 재앙정책에 반하는 시위가 계속 되고 있는 장소였다.
곳곳에서 '지방을 살려달라!', '내집을 지켜주세요!' 하는 외침들이 쏟아지고 있다.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 저 이덕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두 팔을 뻗었다.
[평생을 일구어 가꾼 땅! 힘들게 한 푼 두 푼 벌어 자식들 대학 보내던 일터! 여러분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전 세계가 우릴 외면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국민들을 외면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오오오오!]
격한 환호성들이 쏟아졌다.
[나 이덕배는 촉구합니다』
그가 카메라를 보며 소리쳤다.
[비대위는 국민들의 소중한 터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십시오. 이건 군 총수권자의 지시이기 이전에, 온 국민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옳소!]
[이덕배! 이덕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협회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만약 국민의 뜻을 받들지 않을 경우, 나 이덕배는 국민의 대표로서 홍연 협회장의 사퇴 처리까지 불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환호성이 쏟아졌다. 동시에 당황해서 웅성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대한민국은 숱한 위기를 보란 듯이 극복해왔습니다. 이제는 세계를 이끄는 글로벌리더 M10의 가입국으로서, 당당히 이번 위기를 돌파해 낼 겁니다! 우리 손으로 평화와 번영을 되찾겠습니다!]
[이덕배! 이덕배! 이덕배!]
홍연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심복 세 사람도 어이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역시 저 할배 제정신이 아니야."
김승현이 툴툴거렸다. 윤슬아도 한 마디 했다.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망할 확률이 7할이 넘는다니 뭐니 하고 있는데, 자기 정치적 이미지가 더 중요하단거죠? 저거."
오호승이 눈치를 주었다.
"슬아야. 너 협회 소속 헌터다. 말을 조심……"
"어머, 내가 뭐 틀린 말했어요?"
"둘 다 그만."
홍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바짝 얼어붙은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홍연이 고개를 돌려 임남진을 보았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임남진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눈을 감았다.
"저렇게까지 나오면 타협을 해야겠지. 대통령도 자신의 면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거야. 레드게이트 병력을 일정 부분 빼서 카타클리즘으로 넘기고, 지방 보호 구역도 서른 개쯤 추가로 지정하는 게 좋겠군."
조용히 경청하던 오호승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걱정 마라. 실속 없는 보여주기식일 처리니까. 여기서 국론이 분열되고 어수선해질 바에는 융통성 있게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는 게 나아. 보호 구역의 숫자를 확 늘리면 대통령도 만족할 테고, 국민들도 진정하겠지."
"……."
홍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싹 내치고 실권을 잡고 싶습니다."
"안돼."
임남진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충분히 그럴 힘과 능력을 가진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치에서 패배하고 국민이 등을 돌리면 명분과 의의를 잃는다. 마인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지."
마인이라는 말에 홍연이 이를 으득갈았다.
"전성기 시절 자네 언니는 단신으로 한국 전체를 상대할 힘을 가졌지만, 국민 앞에선 고개를 숙였어. 자네도 이젠 굽힐 줄도 알아야 해. 위에 올라선 사람이란 건,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거다."
"……."
홍연은 이마를 감싸며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레드게이트의 방어병력 일부를 카타클리즘으로 보내겠습니다. 기동성이 뛰어난 길드로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고해 주십시오."
"……연아."
윤슬아가 걱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전력이 누설된 만큼 제가 더 무리하면 됩니다."
홍연이 검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재앙으로부터 이 땅을 지키겠습니다."
* * *
눈을 뜨니 익숙한 굴 안이다.
단골 찜질방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기분 좋다.
'몇 시지?'
시간을 보니 아직 오전 8시.
더 잘 때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우려 했다.
그런데 잘 안 넘어간다. 뭔가가 내 몸에 착 달라붙은 느낌이라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으악!'
웬 여자가 내 몸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자세히 보니.
"……소, 솔아?"
은솔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나와 같은 후줄근한 찜질방 주황색 옷차림이다.
"아, 오빠야! 일어났어?"
그녀는 잠이 덜 깬 얼굴로도 방긋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헤헤, 오빠야 냄새 조아아."
나는 얼어붙었다.
주위에 빈 굴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는 인상을 확 구기며 돌아갔다.
"……솔아."
"응?"
"확실히 말해둘게. 이제 우리 예전처럼 막 껴안고 뽀뽀하고 그러면 큰일 나. 아니, 정확히는 나만 경찰에 잡혀가."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왜?"
"넌 아직 미성년자고 난 성인이잖아. 물론 그전에 남녀관계에서……"
"오빠야. 부끄러워 하는 거야?"
그녀가 눈을 말똥말똥 뜨며 물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헤헤! 부끄러워 하는 오빠야도 정말 좋아!"
그녀가 다시 내 품 안으로 들어와 뺨을 비볐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을 느낀다.
"근데 너 민증도 없으면서 찜질방엔 어떻게 들어왔어? 학교는……"
"아침에 들어왔지롱! 학교는 재앙사태로 휴일!"
젠장, 장소 말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나의 은밀한 도피처이자 파라다이스가…….
"오빠야! 나 맥반석 계란 먹고 싶어! 식혜도!"
"알았어, 알았어."
그녀의 성화에 찜질방 굴에서 나왔다.
기지개를 쭉 켜며 눈을 뜬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