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마탑주-272화 (272/337)

나 혼자만 마탑주 272화

유신은 나대용과 마주했다.

5년 만에 보는 나대용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이는 연상이긴 했지만, 스승님스승님 하면서 강아지처럼 들러붙던 남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과 특유의 오버텐션으로 모두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던 에너지 음료 같던 사람.

이제 기껏해야 30대 초반이겠지만, 세월을 직격탄으로 맞은 건지 아니면 그가 기른 수염에 익숙하지 않아 서인지, 유신이 보기에 그는 훌쩍나이 들어 보였다.

'자, 어떻게 할까.'

정체를 드러내면 나대용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 동료였던 은솔을 공격할 정도로 나대용의 심리상태는 뒤가 없어 보인다.

성공률에 비해 리스크가 크다.

적어도 나대용이 마인인지 아닌지 확실히 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왜마나의 아이를 납치하고 동료를 공격한 건지 알아내야 했다.

"이만 물러나는 게 어때요?"

생각을 정리한 유신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이유로 학생들을 공격하는진 모르겠지만, 마탑주가 이러고 다니는 게 알려지면 세상이 시끄러워질텐데."

"돌아가야 하는 건 그쪽이고."

나대용이 말했다.

"그쪽이 누구고 방금 마법을 어떻게 막아낸 진 모르겠지만, 이건 마탑 내부의 집안싸움이야. 외부인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

"글쎄요?"

내가 히죽 웃었다.

"집안싸움이라면 내가 더더욱 끼어들어야 할 것 같은데."

"……."

나대용이 한숨을 쉬었다.

"말로 해선 비키지 않을 모양이군."

파직! 파지지지직!

그의 몸에서 다시 한번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이에 반응하듯 하늘의 먹구름에도 번개가 쳤다.

'제법이네.'

나대용은 그동안 만난 어떤 마법사보다 강했다.

에아의 서포트도 없고, 데바스타도 숨겨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나대용과 붙으면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마지막 경고다. 거기서 비켜."

나대용이 말했다. 유신은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한번 비키게 해봐요."

쿠구구구구구구구!

유신의 몸에서 극도로 순도 높은 마력이 솟구쳐 올랐다. 그 기세에 이번엔 나대용이 움찔했다.

'……내가 모르는 마법사 중에 이런 실력자가 있었던가?'

나대용은 5서클 마법을 준비했다.

이 일대를 새까맣게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전력을 다해야 했다.

양측이 일촉즉발인 상황.

나대용은 선제 공격을 위해 먹구름을 움직였다.

그런데 구름 아래로 뭔가가 비행하는 게 느껴졌다.

쿠구구구구구구구!

하늘에서 헬기들이 나타난 것이다.

유신은 데바의 눈으로 헬기에 붙어 있는 마크를 확인했다.

'헌터 협회네.'

나대용도 귀에 끼고 있는 이어마이크로 보고를 듣고 있는지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들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 어쩔 수 없지."

나대용이 마력을 거두자 하늘의 먹구름이 걷혀간다.

그리고 소녀를 바라본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꺼져! 절대 안 가!"

그녀는 양손으로 중지 손가락을 올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대용은 쓴웃음을 흘리더니, 마법을 일으켜 주위에 안개를 일으켜 사라졌다.

'뭐,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유신이 마력을 갈무리했다.

덤볐다면 기꺼이 응해줄 생각이었으나, 나대용도 당장 재앙을 앞두고 협회와 갈등이 생기는 건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신은 몸을 돌려 소녀를 보았다.

"당신 누구야?"

그녀가 물었고.

"나도 네가 누군지 궁금한데."

유신도 물었다.

피차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유신이 보기엔 아무리 봐도 10대같은데, 대체 누구길래 나대용과 주위가 이렇게 될 정도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걸까 싶었다.

그리고 왜 하예린을 구해줬고, 왜 나대용이 '집안싸움'이라는 표현을 쓴 걸까.

"내가 먼저 물었으니까 대답해!"

소녀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왜 당신이 그 사람……!"

그렇게까지 말한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짜증 나!"

그리곤 애꿎은 로봇의 파편만 꾹꾹 밟아댔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신은 주위에 널려 있는 파편 중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잠깐, 이거 설마……'

내부가 열려 있는 원형 구조물. 표면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건 틀림없는 골렘볼이었다.

유신의 두뇌는 골렘볼을 보며 어떤 가정을 했고.

'……!'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너 설마…… 소, 솔이 맞지?"

"당신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유신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은솔이라니! 정말 그 솔이라니!

그 작고 귀엽고 앙증맞던 그녀가 5년 만에 이렇게나 컸다고?

그래. 요즘 애들 발육이 빠르단 건 알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소녀가 엄마 키 따라잡는 경우도 흔하다지만!

이건 사람이 너무 확 바뀌었잖아.

"당신 뭔데."

그녀의 목소리가 유신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늘씬한 다리, 봉긋한 가슴,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지만 창조한 얼굴과 티끌 한 점 없는 피부까지. 자세히 보니 얼굴은 확실히 은솔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 곳곳에 보이는, 어린 시절 학대당한 흔적까지.

"왜 눈알 굴리면서 내 몸 훑냐고! X나 변태 같은 거 알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수상쩍음을 넘어, 이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 왔다.

그녀와 가까워지자 유신은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얼굴엔 은솔의 모습이 곳곳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잘 클 수 있을까 싶었다.

하렘가에 버려져 학대당하던 그 아이가 지금은 이렇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멈춰 있다.

예전과 그대로.

그 사실을 자각하자 유신은 갑자기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경찰이랑 얽히면 골치 아파져."

유신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너나 나나 그런 상황은……"

"멈춰."

그녀가 검지를 세웠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골렘의 팔이 그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내게는 은인이 있어.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대신 내게 세상을 가져다준 사람이야."

유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녀의 눈과 목소리에 생동감이 깃든다.

"그 사람은 부모도 없는 나를 지옥에서 끄집어내 키워줬어. 내게 마법을 가르쳐 줬고, 학교도 보내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도와줬어."

유신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다망가진 골렘의 팔에 붙잡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에서 나갈 수 없었다.

"왜 당신 같은 짜증 나는 아저씨가……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건데?"

그녀가 유신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찰랑.

그녀의 손이 유신의 얼굴을 덮은 물의 장막을 뚫고 들어와 살갗을 매만졌다. 유신의 코와 입술을 훑는 그녀의 손길에 수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곤 그녀는 마스크를 벗기듯 조심스럽게 팔을 내렸다.

주르르륵!

유신의 얼굴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진실과 마주한 소녀의 눈은 한계치까지 커졌다.

그랬다. 젖어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이 얼굴은 5년간 꿈에 그리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유신 또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5년 만의 은솔이다. 애처롭게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어마이크의 변조 기능을 끄고 말했다.

"돌아왔어 솔아."

"……아."

커다래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급속도로 고이기 시작한다.

"아… 아아… 아아아아! 아으! 아아아아아!"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유신의 품으로 확 뛰어들었다.

"오빠야아아아아아!"

유신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골렘의 팔에 앉았다.

"어엉! 으허어어어엉! 오빠야! 맞아? 정말이야?"

눈물로 흥건해진 그녀가 유신의 얼굴을 마구 꼬집고 늘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그녀가 감격에 소리쳤다.

"그리고 변치 않아 줘서 고마워!"

이번엔 유신의 동공이 흔들렸다.

변치 않아 줘서 고맙다는 그 말이, 정말로 가슴 깊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그렇게 있었다.

"아저씨!"

하예린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다가도, 우선은 급히 상황을 보고 했다.

"경찰들이 사방에 쫙 깔려 있어요! 전부 이리로 오는 중이에요!"

"알았어."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했다. 유신은 은솔과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솔아. 일단 여기서 벗어나서 이야기하자. 알았지?"

"으허어어엉!"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유신의 몸을 다시 꽉 끌어안았다.

어리광쟁이인 건 여전했다.

유신은 그녀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형처럼 가벼웠던 예전보다는 무게감이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컸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뿐이다.

"저기 다리 쪽은 경찰들이 많아요! 이쪽이에요!"

* * *

밤이 어두워졌다.

조명이 드문드문 있는 한적한 밤공원에서, 나와 은솔은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진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헤헤헤."

절대로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내 무릎 위에 올라와서 고양이 처럼 애교를 부리거나, 뺨을 내 가슴에 대고 슬쩍 슬쩍 비볐다.

……난감하다.

5년 전이야 내가 솔이를 예뻐해줘도 워낙 체구가 작고 아담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솔아. 이제 조금 떨어져서……"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하더니 예전처럼 내 뺨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어쩔 도리가 없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본인은 아직 어리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신체는 아니었다.

하렘가 시절의 영양실조 상태에서 벗어나 한참 2차 성징 중인 그녀의 키는 진보라와 비슷했고, 곡선형으로 발달하여 탄력이 생긴 몸은 어엿한 아가씨였다.

사람들의 시선에 이런 애정행각은 여러모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게.

"……."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온 하예린이 경멸의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아저씨는 미성년자 킬러……"

"자, 거기까지! 너 또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 진 모르겠는데, 큰 오해야."

그녀가 팔짱을 꼈다.

"어머, 제가 뭘 오해했는데요? 일단 눈에 보이는 건 징그러운 아저씨가 여학생을 안고 있는 모습인데요."

"……이건 그냥 순수한 감동의 재회야."

"애인과의 재회?"

"아니라니까!"

하예린은 수상쩍은 눈빛을 하며, 자판기에서 뽑은 캔 음료를 내려놓았다.

"아씨, 뭐 내가 좋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은솔이 솔잎의 눈을 홱 낚아채며 말했다. 다시 이전의 그 퉁명스러운 사춘기 소녀로 돌아왔다.

"부, 불만은 아닌데요. 전 그저 걱정이……"

"꼬우면 저리 꺼져. 오빠야는 내꺼야."

위험한 발언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오해가 점점 더 큰 오해를 낳고 있잖아.

"그럼 확실히 말해주세요. 두 분은 어떤 사이에요?"

"보고도 몰라? 당연히 사랑하는……! 읍읍!"

"가족보다 절친한 오빠 동생 사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은솔의 입을 막으며 대신 대답했다.

하예린은 나를 향한 수상쩍은 눈빛을 거두지 않았고,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은솔은 솔잎의 눈 캔뚜껑을 땄다.

오오! 감개무량하다. 은솔도 나이를 먹으니까 진정한 맛의 세계에……!

"오빠야! 이거 좋아하지? 내가 땄어!"

괜히 좋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