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68화
"아아아아악!"
"끼야아아아악!"
비명 한번 우렁차네.
계속 듣다 보니 귀에서 피날 것 같다.
정서진이 통째로 임대해 준 실외훈련장에서, 나는 하예린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쉴드를 딛고 정신없이 달렸다.
도망치는 그녀의 뒤로는 바람계 마법 아이올로스가 다가오고 있었고, 아래에는 대지계 마법 가이아로 만든 팔들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이제 제발 그만해요! 꺄아아아아악!"
나는 두 손을 모아 입에 붙이고 외쳤다.
"살고 싶으면 뛰어!"
이번 트레이닝은 3층 시련 재현.
그녀는 울먹거리면서도 잘 달리고 있다. 이제 제법 쉴드로 발판을 만들어 뛰는 것도 익숙해졌다.
내가 3층 시련에 도전할 때야 뭐, 에아가 있어서 바로바로 해냈지만 그녀는 시행착오를 좀 겪어야 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빠르게 적응한 걸 보니 확실히 재능은 재능인 것 같다.
아이올로스와 가이아를 피해 훈련장을 한 바퀴 돈 그녀가 바닥에 내려왔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죽었어어어어어어어!"
엉엉 울면서도 살벌하게 외치는 걸 보니 악바리가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3층 시련의 하이라이트, 검은 골렘이 바로 내 역할이었다.
아이올로스가 다가오기 전에 날 한 대라도 때리면 그녀의 승리. 그대로 트레이닝 종료다.
아, 물론 진짜 내 실력을 내면 평생을 해도 못 깰 테니까 핸디캡이 있다.
나는 지금 바닥에 그려진 작은 원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고, 1공정 마법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다.
그녀는 두 팔에 2공정 윈드커터를 꺼내 날려 보냈다.
'궤적이 너무 단순해.'
나는 팔짱을 낀 채 허공에 쉴드를 깔아 막아냈다.
바람 칼날이 쉴드에 부딪쳐 카가각!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사이 그녀가 주먹에 건틀릿을 두르고 소리쳤다.
"그 짜증 나는 면상!"
촤아아악! 그녀의 왼 다리가 바닥을 쓸며 다가왔다.
"한 대만 쳐보자아아아아!"
그리곤 힘껏 스트레이트.
나는 하품하는 시늉을 하며 오른팔을 뻗었다. 다가오는 그녀의 주먹을 옆으로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리고 왼손에 건틀릿을 두르며 카운터 펀치.
"오!"
그녀가 허리를 90도로 꺾어서 내 펀치를 피해냈다.
주먹이 나가며 내 몸이 경직되어 있는 상황에, 유연하게 상체를 들어올린 그녀의 등에는 한 장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내가 옛날에 했던……!'
"받아라아아아아아!"
그녀의 티셔츠가 찢어지며 바람의 칼날이 날아갔다.
허를 찌른 건 인정해 주마.
하지만.
"역시 부자연스러워."
나는 허릿심을 이용해 자세를 틀었다. 그러고는 날아오는 윈드커터의 측면을 손날로 침착하게 가격했다.
파창!
급하게 만든 윈드커터는 경도가 낮아져 있었고, 손에 마력을 둘러 때리는 것만으로도 쉽게 파훼할 수 있다.
"아……"
"아쉽네."
상체를 일으켜 세운 내 뒤로 초록색 바람이 불어닥친다.
"탈락이야."
후우우우우우웅!
그녀가 몸을 움츠리며 바람을 맞았다. 동시에 지면에서 올라온 가이아가 그녀의 두 다리를 밧줄처럼 휘감았다.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며 말했다.
"이걸로 20번 죽었네, 축하해."
"……."
어, 음.
뭐지, 이 분위기는?
보통 이렇게 약 올리면 왁왁 화를 내면서 달려와 내 머리를 쥐어뜯거나 팔을 깨물어야 하는데.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두 팔로 다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몇 주 동안 잘 해왔으면서 갑자기 이러니까 좀 당황스럽긴 한데…….
그동안 쌓였던 게 폭발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주춤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린아, 괜찮……"
"꺄아아아악! 여, 여기 보지 마요!"
그녀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나는 뒤늦게 그녀가 가슴께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변태 사이코패스!"
"……."
급한 대로 내 겉옷으로 몸을 가리도록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까 등 뒤에서 마법진을 그리고 윈드커터를 발사했을 때 그만 속옷 후크가 잘려나갔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올로스가 다가와서 찢어진 속옷을 날려 버렸고…… 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그녀는 다리를 감싸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예린아."
"……가까이 오지 마요. 청소년 추행범."
나는 이마를 덮고 한숨을 쉬었다.
"윈드커터를 등에 깔고 발사한 건 넌데, 왜 내가 욕먹어야 해?"
"흥, 몰라요! 이런 훈련을 시킨 아저씨 잘못!"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쭉 내민채 말하는 걸 보니, 화내는 게 아니라 투정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군말 없이 애써 달래주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저기 가방에 옷이랑 속옷 잔뜩 사놨으니까 아무거나 골라 입어."
"소, 속옷도 샀다고요? 역시 변……"
"보라가 골랐으니 걱정 마세요."
나는 적당히 그녀가 통화 내용을 듣지 못하도록 떨어진 곳으로 와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정서진으로 부터의 연락이었다.
"어, 서진아. 무슨 일이야?"
-탑주님. 한국에서 곧 일어날 재앙에 대해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정서진은 내게 '카타클리즘'과 '레드게이트' 재앙에 대해 알려주었다.
설명을 듣다 보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국제사회의 지원 없이 우리 힘만으로 두 개의 재앙을 막아내야 하는 거야?"
-예. 해외언론에선 한국이 멸망할 확률이 70%가 넘는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소문을 들은 몇몇 길드들은 해외로 이탈을 시도했고, 특히 Top10의 SG 컴퍼니도 도주하려다 협회장과 집행부에 덜미를 잡혔다고 합니다.
Top10 길드까지 도망칠 정도라니, 상황이 어지간히 심각한 모양이다.
나는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탑주님. 이건 순전히 제 의견입니다만.
정서진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탑주님은 이번 재앙전에 참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응? 이유가 뭔데?"
-우리의 최종목적은 '네메시스'를 막는 겁니다. 이를 위해선 내부의 적을 먼저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치해 두면 계속 애를 먹일 테니까요.
"그렇지."
-만약 탑주님이 재앙전에 참전하시면, 정체를 들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정서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것 같다.
지금 내가 정체를 숨기고 진행하는 마인 조사는 성과도 뚜렷하다. 여기서 내가 재앙전에 참가하면 전 세계가 내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수사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럼 한국의 재앙은 어쩌고?"
-원래는 탑주님의 도움 없이 막아내야 하는 재앙입니다.
정서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많은 재앙들이 닥쳤고, 멸망 위기라는 말은 숱하게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떻게든 버텼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아저씨! 갈아입고 왔어요!"
하예린이 일상복 차림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가 입을 샥 가리더니 그 근처에 앉아 자신도 휴대전화를 꺼냈다.
-마나의 아이를 훈련시키고 계시군요.
"응."
-어떤 것 같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노력형 천재? 일단 궤도에 올려놓기만 하면 다 씹어먹을 수준이야."
-오, 무척 기대되는군요.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재앙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너희를 돕는 방법도 있고, 만약 진짜로 한국이 위험할 정도라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겠어."
-알겠습니다. 이것도 제 의견일 뿐 이니 탑주님 판단에 따라 움직여 주십시오.
"그래. 다른 정보더 들어오면 이야기해 줘."
나와 정서진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내가 통화가 끝난 걸 본 하예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표정 엄청 심각해 보이시던데,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냐."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옷도 갈아입은 김에 밥이나 먹으러 가자."
"좋아요!"
"아, 점심 뭐 먹지? 오늘은 선……."
"또 또 선짓국이에요?"
윽, 내 메뉴 패턴이 읽혔다.
"그럼 네가 말해봐."
"크림 리조또?"
"그 돈으로 국밥 한 그릇 사 먹고 말지."
"어휴, 아저씨!"
* * *
유신과 하예린은 저녁 훈련까지 마쳤다.
유신은 오늘은 일이 있어서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말했고, 하예린은 씩씩하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동네에 도착했다.
스산한 밤, 허름하고 인적이 드문 골목. 평소 다녔던 길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음침한지 알 수 없었다.
'하긴, 그동안은 계속 아저씨가 데려다줬으니까.'
유신과 함께 있으면 편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준 사람. 가장 힘들 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준 사람. 무척 고마웠다.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이 없으니 갑자기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어휴, 애도 아니고. 가자, 가.'
그녀는 평소처럼 허름한 골목으로 들어가 걸었다.
'……아으 씨.'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 소리가 묵직한 게 몬스터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겠지.
오버하지 말자.
그녀가 그런 각오를 다지고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러자 뒤쪽의 기척도 빨라졌다.
'아 씨! 무서워! 무서운 걸 나보고 어쩌라고!'
유신이 부르는 그녀의 별명은 울보였다. 하예린은 적극 부정했지만 어느새 공포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되면 뭐하는가, 밤길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체질이 되고서는 이 트라우마는 더 심해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평소 가지 않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 지나갔나?'
벽에 등을 기댄 그녀가 안도하기 무섭게, 기척도 골목 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다. 그녀는 걸음을 빨리 하다 못해 뛰기 시작했다.
따라오는 걸음 소리도 계속 빨라진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탁 트인곳이 나온다. 그녀가 몸을 틀어 골목으로 넘어가려는 그때.
누군가 불쑥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넘어졌다. 어둠 속에서 있는 덩치 큰 무언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 히익! 가까이 오지 마요!"
"……?"
검은 인형이 눈을 깜빡거리며 한 발짝 다가오자 그녀는 기겁하며 뒤로 파바박 물러났다.
검은 인형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빛나는 청색의 구슬하나가 떠올라 터졌다. 주위가 한결 밝아졌다.
"이제 잘 보이니?"
뒤늦게 자신과 부딪힌 사람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포는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바뀌고, 놀라움은 환희로 바뀌었다.
"……대박!"
꿈에 그리던 그 사람.
모든 마법사 후보생들의 목표.
세계 최강의 마법사.
틀림없다. TV나 유튜브에서 보던 그 사람이 확실했다.
"……마, 마탑주 나대용 님?"
화려한 로브를 입은 남자가 헤픈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잘 보이나 보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