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67화
"이다음 재앙이 핵심입니다."
관측관이 리모컨을 조작해 다음 화면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인 던전 게이트와는 다르게, 게이트가 검붉은 색이었다.
"재앙의 이름은 '레드게이트'라고 합니다."
길드 마스터들은 고개를 쭉 내밀며 관심을 보였다.
"게이트형 재앙인가."
"흔히 출현하던 '클래식 게이트'와 다른 점이 있소?"
"예. 블루게이트에 대해서는 들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우리에겐 '모스크바의 악몽'으로 더 잘 알려진 재앙이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대국 러시아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 넣어간 재앙. 전 협회장 홍율이 크게 활약한 재앙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는 헌터보다 군대에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는 대표적인 강군 국가였지만, 이 사건 이후로 헌터 양성에 온 힘을 쏟아붓게 됐다.
"설마 한국에 블루게이트 급의 재앙이 온다는 말을 하려는 건……"
"그 화력의 두 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헌터 강국 러시아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 넣어간 재앙보다 더 위력적인 재앙이 '카타클리즘' 재앙과 함께 한국에 출현한다.
이제야 다들 SG컴퍼니가 도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국내에 출현하는 건 확실하오?"
"예, 확실합니다."
관측관이 지구의 기상 관측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상현상 징조가 일어나는 곳은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 이집트, 한국입니다."
"전부 M10에 소속된 강대국들이로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중 4개국은 모두 블루게이트. 미국과 한국에만 레드게이트가 출현합니다."
'의지'는 마치 밸런스 패치를 하는 것처럼, 세계를 이끌어가는 헌터 강대국에 떡 하니 쌍둥이 재앙을 대기 시켜놓았다.
그러면서도 왜 하필 중국 영국을 거르고 한국에 레드게이트인가?
길드마스터들은 속으로 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 범위급 재앙이 진행 중이라면 국제사회의 지원도 요원하다. 오로지 자국의 힘 만으로만 레드게이트를 막아야 했다.
"잠시 유감스러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관측관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국의 현 전력으로 카타클리즘및 레드게이트의 화력을 막을 수 있을지 수치상으로 계산해 본 결과."
"……."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뒷말을 기다렸다. 관측관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75%의 확률로 한국은 멸망합니다."
곳곳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몇몇은 두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고 누군가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기도 했다.
"자, 자."
벌떡 일어난 대통령 이덕배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우리 힘들 냅시다. 수치가 중요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위기였던 때는 많았지만 그때마다 우리 대한민국은 꿋꿋이 버텨냈습니다!"
이번엔 홍연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의연히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그 모습에 몇몇 길드마스터들은 안도했다. 힘들고 피가 말리는 상관이지만, 결국 재앙이 왔을 때 이 사람만큼 의지 되는 헌터는 없었다.
공식 석상에서 사람 목을 진열하건, 대통령보다 늦게 회의에 참석하건, 모두가 그러려니 넘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
오로지 그녀의 압도적인 강함 때문이었다.
"이상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전시령을 내리고, 인구를 서울에 집중시 키겠습니다."
홍연이 화면에 지도를 띄우며 말했다.
"저와 집행부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력의 절대 다수는 레드게이트로 향합니다. 카타클리즘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 말에 몇몇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그렇다는 말씀은 서울 외에 모든 영토를 포기한단 말씀이십니까?"
아일라 길드마스터, 안세현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경우엔 그래야겠죠."
"……허어."
"물론 지방에도 중요지역의 순위를 매겨서 헌터를 파견하겠습니다만, 그들은 탈환 임무만 수행할 겁니다. 경기권에 사람들을 집중시키면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자아!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주십시오!"
이덕배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그건 너무 성급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협회장."
그녀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성급하다니요?"
"75%니, 블루게이트의 두 배니, 그런 수치적인 부분 때문에 우리는 중요한 걸 잊고 있지 않나요?"
이덕배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바로 우리 국민들의 삶 말입니다!"
"……?"
"레드게이트를 막아내더라도, 국민들이 살아가던 터전이 초토화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국민을 위한 정부고, 국민을 위한 협회예요! 무조건 국민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흥분한 이덕배가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는 단 한 점의 터전도 재앙에 뺏기지 않는 것을 목표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라라고 할 수 없어요!"
"대통령님."
홍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드게이트를 막지 못하면 영토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집니다."
"어허! 그게 다 우려고, 과한 근심이란 겁니다. 전부 오라클이란 양반의 예측일 뿐이지, 100%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협회장은 이대로 국민들의 피와 땀이 어린 삶의 터전을 빼앗겨도 좋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소린 안 했습니다만."
이덕배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비록 전쟁에 대해 잘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압니다! 백성이 나라의 근간입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일수록 국민들의 삶이 어찌 되든 좋다는 생각은 지양해야 합니다!"
몇몇 길드 마스터들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또 시작됐다'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심경을 대변하듯 홍연이 대답했다.
"대통령님. 레드게이트를 먼저 막지 않으면 카타클리즘으로부터 어떤 영토를 사수하든 무의미합니다."
"홍연 협회장!"
이덕배가 다가와서 홍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협회장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대한민국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우리는 강합니다! M10국가이고, 세계 최고의 길드들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홍연의 황금빛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놓아주십시오."
"음? 아, 하하! 미안합니다.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떨어져 나간 이덕배가 푸근한 미소로 홍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콧잔등이 씰룩이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가 갑자기 울먹이며 말했다.
"한참 꽃다운 시기의 젊은이에게 나라의 막중한 짐을 전부 떠맡겨야만 하는 이 현실이 참으로 참혹합니다! 아아, 이 시대는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빼앗아 간 걸까요?"
이덕배가 과장된 몸짓으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길드 마스터들은 조용히 휴대전화로 시선을 돌렸고, 홍연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더더욱 보편적인 가치에 눈 돌려서 안 됩니다!"
"회의 속행하겠습니다."
홍연이 차갑게 대꾸하며 등을 돌렸다. 이덕배가 연설을 하고 있었지만 가볍게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레드게이트를 막지 못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몬스터들에게 짓밟힙니다. 이쪽에 최고 전력을 쏟아붓겠습니다. 카타클리즘은 서울 사수를 기본으로, 각 지방은 중요지역만 탈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지방 광역시에도 방어진을……?"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서울과 경기도에 인구를 집중시켜야 합니다. 제주도처럼 멀리 계신 분들도 적어도 경기도권에는 들어와야 보호할 수 있다고 발표해주십시오. 사람들을 지키면서 주요지역 탈환까지 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홍연 협회장!"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일장 연설을 하던 대통령이 그녀를 척 가리켰다.
"정녕 내 진심이 닿지 않은 겁니까?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건……"
"그럼 제가 반대로 묻겠습니다."
홍연도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레드게이트를 막지 않으면 민생이니 터전이니 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전체가 멸망합니다. 대책이 있습니까?"
"어허, 그러니까 그렇게 단정 짓는 것부터가 너무 이른 거예요!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대통령님이야말로 우리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승리를 섣불리 단정 짓고 계십니다."
"그럼요! 당연합니다! 우리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이덕배는 국민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국민이 좋아하는 민생 정책만 쏙쏙 골라서 제공했고, 가만히 있는 기업이나 길드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라는 명목으로 돈을 왕창 뜯어내는 게 특기였다.
그 돈으로 일자리를 확보했다느니 혜택을 국민들에게 돌려드렸다느니 수만 가지의 방법으로 지지율을 올렸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점은, 이덕배 본인이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고, 하나의 신념으로 여긴다는 점이었다.
재앙이 일어나는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 당장 국민들은 레드게이트보다 자신의 재산과 땅이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카타클리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게 뻔했다.
이덕배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행동 범위 내의 수순이었다.
홍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대통령의 지시대로 해서, 레드게이트가 뚫리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그건 협회장의 책임이지요."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협회장과 같은 어린 아가씨를 전쟁으로 떠민 이 세상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아아! 재앙은 우리 인류에게 대체 무엇을 빼앗아 간……"
이덕배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쩍! 하는 충격음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꺾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다들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못 들어주겠습니다. 광대."
홍연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째서 당신같이 입만 산 광대가 국민들의 표를 받아 이 자리에 올라와 있는지 의문입니다."
"나, 나, 나를……"
코피를 흘리며 부들부들 떨던 이덕배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나를 폭행했어! 이 짐승만도 못한……!"
"폭행?"
그녀가 다가와 이덕배의 손을 짓밟았다. 그가 '끄아아아악!'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스릉.
그녀의 검이 이덕배의 목 끝까지 왔다.
비로소 이덕배는 마주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소름 끼치는 황금빛 눈동자를.
"지금은 전시입니다. 망상에 빠진 몽상가의 정치놀음에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볼 바엔, 쳐내고 인명피해를 줄이겠습니다."
"협회자아아앙! 지금 무슨 짓을! 왜 내 가슴에 못을 박는 거요! 내가 협회장을 얼마나 아꼈는데……!"
"레드게이트가 끝난 뒤에, 절 삶아먹든 데쳐 먹든 알아서 하십시오."
검을 거둔 그녀가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이덕배의 얼굴을 걷어찼다.
고개가 젖혀지며 그의 몸이 바닥에 무너져 내린다.
'……워후!'
길드 마스터들은 승천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합참의장과 군관계자들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협회장!"
"여기가 양아치 뒷골목인 줄 알아!"
"당신 진짜 미쳤어? 당신 언니도 대통령에게 그렇게까진……!"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며 군 관계들을 돌아보았다.
소름 끼치는 금안과 마주하는 순간, 그 어떤 정신무장도 소용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공포가 싹텄다.
"언니는 언니고, 저는 접니다. 책임은 이번 일이 끝나고 지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 사이 수행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기절한 이덕배를 데리고 사라졌다.
"책임은 무슨! 협회가 이딴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협조하지 않겠네!"
"좋습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레드게이트를 방치하고 전 지역에 전력을 분산시키겠습니다. 나라 망하건말건 제 알 바 아닌 겁니다."
"아, 아니, 그건……!"
말문이 막힌 그들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크흠, 흠. 자네의 태도를 지적한거지. 꼭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하자는 게 아니잖은가."
"잘 설득해서 협의점을 맞춰 나가야지. 대뜸 이렇게 사람을 두들겨패면……"
"말귀가 더럽게 안 통하네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광대비위 맞춰준다고 아까운 목숨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그녀가 다리를 바꿔 꼬며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연출만으로도 세 사람이 움찔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협조가 아니라 협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