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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66화 (266/337)

나 혼자만 마탑주 266화

유신이 차를 타고 떠났다. 평소답지 않게 손까지 흔들어주며 배웅하던 정서진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놈은?"

"밑에 있습니다."

정서진은 경호팀장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알케미아 지하실은 일반 직원은 출입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중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운영하지 않는다.

정서진은 직접 계단을 걸어 지하4층으로 내려갔다.

"아아아아악!"

지하에서 사람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서진이 다가오자 경호원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다리가 밧줄에 묶인 경호원이 천장의 도르래에 고정되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물이 채워진 목욕탕이 있다.

"회, 회장님! 살려주십쇼!"

아까 유신의 뒤통수를 쳤던 바로 그 경호원이었다. 정서진이 차갑게 말했다.

"처넣어."

남자들이 줄을 잡아당기자, 경호원의 몸이 다시 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온몸을 비틀며 고개를 흔들었고 정서진은 경호실장이 준비해 둔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정서진이 팔을 들자 경호원이 다시 올라왔다.

"콜록! 콜록! 케에엑! 끄으으……"

물을 토해내던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유를 모르겠습니까?"

정서진이 손짓 했고 경호원이 탕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고통스러운 비명과 몸부림이 계속 됐다.

두 번째로 올라왔을 때, 경호원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너져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합니까?"

"그, 그게……"

"넣어."

세 번째 입수. 경호실장이 땀을 삐질 흘렸다. 정말 죽겠다며 넌지시 말렸지만 정서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장이 대신 들어가실 겁니까."

서슬 퍼런 그 말에 경호실장은 얼른 허리를 펴고 앞을 뚫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경호원이 올라왔다.

"이유."

"커헉! 쿨럭! 큭! 회장님의 손님을…… 하, 함부로 포, 폭행했습니다."

"그냥 손님이 아닙니다."

정서진이 차갑게 대꾸했다.

"내 은인이지."

"주,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내려주세요."

남자들이 경호원의 발에 풀린 밧줄을 풀어주고 있는 사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리고 흰 머리가 듬성듬성 자란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정서진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박 이사님. 지금 당장 이사회 소집하고 재작년 상하반기 실적까지 싹 뽑아오세요. 그리고 알케미아 전 부서 감찰 들어갈 테니 준비하십시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정서진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회사를 말끔히 정돈해야겠습니다."

박 이사와 최 실장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서진의 이런 미소는 두 사람 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 * *

대한민국 재앙 비상 대책 위원회.

통칭 비대위.

국가급 재앙이 열릴 때마다 발휘되는 한국 최고 수준의 위원회다.

"오라클에 너무 의존했던 게 문제입니다! 그도 모든 미래를 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동안 너무 편하게 재앙을 막긴 했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할 때야? 대책을 내놓으라고 대책을!"

사람들의 목에 핏대가 선다.

침을 튀기고 삿대질을 하는 손들이 서로를 가리킨다. 비대위의 이름 높은 군 관계자와, 고위 공무원, 저명한 군 전문가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논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Top10길드의 마스터들도 와 있었다.

제1위 - 스노우.

제2위 - 아일라.

제3위 - 팬텀.

제4위 - LCM.

제5위 - 블레이져.

제6위? SG컴퍼니.

제7위 - 체이렌.

제8위 - 적룡(赤龍).

제9위 - 가디언 코리아.

제10위 - 시티즌.

유닉스, 블랙가드, NIX 등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새로운 길드가 나타나기도 했고, 기존 길드가 개편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남아 한국을 주름잡고 있는 길드도 있었다.

현재 최강은 스노우.

한때 김유신을 영입할 뻔한 길드였다.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보좌관의 외침에 비대위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훤한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허허허! 어이구, 다들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회의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하고 후줄근한 차림, 마치 동네 아저씨가 밭일하다가 잠시 들른 느낌이었다.

그는 비대위에 참석한 한 사람 한 사람 악수하며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바로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덕배.

악명높은 박정양 이후에 당선된 대통령으로 선한 이미지와 민정 정책, 그리고 국민바보라는 별명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모두와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아."

이덕배는 중앙에 텅 빈 자리를 가리켰다.

"제일 중요한 분이 아직 안 보이는군요."

대통령보다 늦게 나타나는 협회장.

군 관계자들이나 길드 마스터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대통령 무시하고 꼽주는 게 협회장의 전통이라도 된단 말인가.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다들 알다시피 협회장이 워낙 바쁘잖습니까? 허허허!"

충분히 문제 삼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이덕배는 웃어넘겼다. 오히려 협회장을 감싸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곳곳에서 바퀴가 드르륵 굴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네 명의 헌터들이 바퀴 달린 카트를 끌고 비대위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들은 막 현장에서 복귀한 듯, 옷에 말라붙은 핏물과 흙이 묻어 있었다. 앞에 잘 보이는 위치에 카트를 댄 헌터들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뭐야 이건?"

카트 위에는 은쟁반이 뚜껑이 덮인 채로 있었다.

또각. 또각.

뒤이어 선명히 울리는 구둣발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협회장께서 입장하십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 깔끔한 제복 차림에 허리에 찬 장검. 그리고 전 협회장의 눈과 같은 금안(金眼).

대한민국 유일의 공인 1급 헌터이자 현 협회장, 홍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분한 시선, 냉정한 목소리, 서릿발 같은 분위기.

협회 사람들이 홍율을 '휘발유 들이부어서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불꽃'이라고 묘사했다면, 홍연은 '얼음 같은 불꽃'이라고 말했다.

그 표현을 들은 시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녀를 겪은 사람들은 정확히 맞는 말이라고들 했다.

"어서 오세요! 협회장!"

이덕배가 두 팔을 벌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인사를 받는 둥마는 둥 가볍게 묵례하고는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허허허허! 차가 많이 밀렸나 봅니다. 이 시간에 마포대교는 역시……."

"배신자를 처단하느라 늦었습니다."

홍연의 대답에 이덕배가 눈을 깜박였다.

"배신자……. 요?"

그녀가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함께 들어왔던 헌터들이 은쟁반 위의 뚜껑을 열었다.

"허억!"

"크읍!"

혈향과 썩은 내가 풍기며 곳곳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온다.

은쟁반 위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머리였다. 하나같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죽기 직전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이 사람은 SG의……"

머리 중에서는 TOP 10 제6위 SG 컴퍼니의 길드 마스터, 차수현의 머리까지 있었다.

홍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차수현은 재앙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듣고, 측근들과 함께 길드 운영자금을 횡령해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습니다."

"……!"

협회장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웅성거렸다.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국민의 혈세로 호가호위할 때는 언제고, 위기가 닥치니 제일 먼저 해외로 내빼는 쓰레기들. 살아 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들어와요."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쭈뼛거리며 나타났다.

"SG의 모든 권리와 권한을 박탈하고, 그들이 보유한 재산과 자원은 협회가 회수하겠습니다. 그리고 SG의 빈자리는 11위에 랭크된 '엠지트' 길드가 채우겠습니다."

엠지트의 길드 마스터가 모두에게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갑자기 Top 10돼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다른 길드마스터들도 엉겁결에 인사를 받았다.

"이보시오, 협회장."

가만히 지켜보던 합참의장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대국가 반역 행위로 SG를 친 건 그렇다 치겠소. 그런데 이런 중대한 자리에 사람 머리를 보여주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인 거요?"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녀는 안색 한번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경고입니다. 이번 작전 중에 또 다시 이탈자가 나온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처단하겠습니다."

자리한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당연히 진심, 결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홍연의 과거 행적을 봐도 알 수 있었다.

'미치겠네. 홍율이 가고 편해지나 했더니 다음은 홍연……'

'차라리 홍율이 나았어. 그 사람은 융통성이라도 있었는데.'

'숨도 못 쉬겠다 진짜.'

홍연이 휘하 헌터들을 보며 말했다.

"이 역겨운 얼굴들, 이만 치워주십시오."

"예!"

헌터들이 다시 은쟁반에 뚜껑을 덮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시작하세요."

그녀가 턱짓하자 뒤에서 멀뚱히 서 있던 재앙관측관이 다급히 스크린을 띄웠다.

"그, 그럼 우선 오라클에서 발표한 재앙에 대해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이제야 회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길드 마스터들은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스크린에 집중했다.

"우선 이번에 출현하는 재앙은 지구 전체가 범위입니다."

웅성웅성.

"전 세계 동시다발?"

"이 스케일은 간만이군."

관측관이 리모컨을 조작해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재앙명 카타클리즘. 전례 없이 지구에 처음 출현하는 재앙입니다. 현재 오라클이 밝힌 이상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땅에 이렇게 반원형 막 같은 것이 생깁니다."

화면에는 도시 중앙에 커다란 막이 펼쳐진 삽화가 나타났다.

"이 반원형 막에 포함된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 이계의 영토와 위치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뭐, 뭐?"

"그냥 던전화가 아니라, 뒤바뀐다고?"

"예. 던전과 지구의 영토가 통째로 교환됩니다."

관측관이 안경을 눌러썼다.

"지구의 영토가 일방적으로 소실되고, 지구 전역에 이계의 영토가 들어서는 것. 이것이 카타클리즘 재앙의 기본 개념입니다."

"세상에……!"

"정말로 종말이 오는 건가."

잠자코 듣고 있던 홍연이 입을 열었다.

"막을 방법은?"

"던전화 재앙과 비슷합니다."

관측관이 스크린을 넘기자 괴상한 무늬의 씨앗 사진이 나타났다.

"……봉마의 씨앗?"

"예, 비슷한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공간으로 진입해 씨앗을 지키고 있는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고, 씨앗을 깨트리면 막이 사라지고 원래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엔 몬스터 측이 봉마의 씨앗을 깨러 오는 게 아니라, 지키는 거군."

"바로 그렇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적룡의 길드 마스터가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그럼 별것도 아니잖아? SG는 왜 도망친 거래?"

"문제는 지금부터 입니다. 카타클리즘에 이어 쌍둥이 재앙이 관측됐습니다."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재앙이 두 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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