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64화
나는 새로운 물의 장막을 쓰고 있었다. 반은 나 김유신의 얼굴, 그리고 나머지 반은 앙상한 해골이다.
내 얼굴을 본 정서진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충혈된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져 있다.
이 연출로 정서진의 멘탈을 뒤흔들어 놓는데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결정타.
나는 코어 통역기를 종료한 뒤, 진짜 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
정서진의 동공이 어쩔 도리 없이 흔들린다.
"……."
그는 조용히 바지 주머니 품을 뒤진다.
꺼낸 것은 담뱃갑. 폭발 때문에 성한 건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괜찮은 놈을 하나 골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가 숨을 뱉자 회색 연기가 하늘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담배 한 대를 태운 정서진은,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인입니까? 제 앞에서 그분을 사칭하는 건, 좋은 판단이라 할 수 없군요."
나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들썩거리다 못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몸을 뒤틀었다.
마인 연기는 광기가 생명이다.
"당신은 누굽니까?"
"한때 김유신을 신봉했던 사람."
그리고 마인에게는 컨셉이 필요했다.
"회장님께 접근하는데 많은 수고가 들었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이날이 왔네요."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판받을 시간입니다."
"……."
정서진이 피곤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심판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마인."
"암요, 암요. 기왕 말이 나온 거, 우리 한번 제대로 따져볼까요?"
가장 명확한 것은 하나.
정서진이든, 그 누구든 마인이 된 직접적 계기는 '내 죽음'이다. 그렇다면.
"김유신이 죽을 때 당신은 뭘 했습니까?"
"……."
정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알베르전을 기억하십니까? 김유신이 세계 길드를 설득하러 다니면서 사자선단과 싸우고 천공성과 싸우는 동안, 책사라는 당신은 뭘 했습니까? 치료제 개발 이후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죠. 당신은 수억의 사람은 구했을망정, 김유신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침묵했고, 나는 계속 말했다.
"심지어 김유신은 당신을 거두었다는 이유 하나로 유닉스와 프로스트라는 강대한 적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런 김유신이 목숨 걸고 러시아에 들어가는 동안, 당신은 뭘 했습니까?"
이번에도 정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진보라로부터 정서진 대한 소스를 들었다.
내가 의식불명이 된 뒤, 정서진은 한동안 지독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폐인처럼 지냈다고 했다.
무력감. 부채감. 죄책감.
정서진이 나와 본인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을 감정들이다.
"당신은 프로스트의 약점을 잡아 동료들을 지켰지만, 이번에도 김유신 본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도 지금도, 김유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익을 위해 움직였죠."
정서진은 눈을 꾹 감았다.
"……그게 탑주님이 원하던 제 역할이었습니다."
"구차한 변명이군요."
나는 두 팔을 벌렸다.
"김유신은 매사에 무리하는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것도 기승전결처럼 그렇게 되리라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관리자인 당신은 그의 행동을 말리긴 커녕 떠밀었습니다. 당신의 야망을 위해, 김유신은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거든."
해골만 남은 반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당신의 야망이 아닌, 김유신을 위한 조언은 하지 않았습니까? 김유신의 죽음에 당신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나요?"
"……."
정서진은 앞머리를 끌어내리며 안경을 붙잡았다.
"목숨을 챙기라는 조언? 하지 않은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의 몸에서 투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까 당신은 나를 대단하다고 했지만, 천만에. 나는 위에서 시킨 일만 좇아서 하는 세상 지천에 널린 월급쟁이에 불과합니다. 날 대체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가 불에 탄 넥타이를 잡아당겨 바닥에 던졌다.
"하지만 탑주님은 제겐 없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건 안경잡이가 아니라 빛나는 사람들. 저는 탑주님이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단으로 바꿔놓았을 뿐입니다. 좋게 말하면 악어새, 나쁘게 말하면 기생충."
그리고 양손은 천천히 주먹을 쥔다.
"그런 탑주님의 빛나는 면모를, 저는 꺾을 수 없었습니다. 틀에 갇힌 평범한 공산품처럼 만들 수 없었습니다. 야망이라고 했습니까? 그런 건 프로스트와 유닉스를 파괴한 뒤에 버렸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
정서진은 무릎을 굽혀 몸의 중심을 낮추고, 금방이라도 발사될 화살처럼 팽팽하게 전신을 당겼다.
"탑주님이 남긴 계획을 실행시키는 것, 그뿐입니다."
그리곤 무시무시한 각력으로 돌바닥을 산산조각내며 돌진해 왔다.
도약 한 번에 지축이 흔들린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젖혔다.
후우우우우우웅!
그의 주먹이 지나가며 허공으로 내뻗어진다. 어마어마한 힘의 운용에 전율하게 된다.
뒤를 돌아보니 주먹에서 뻗어 나간 충격파가 후방의 돌벽을 산산조각내버렸다.
'미친!'
촤아아아아악!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춰선 정서진 이 몸을 돌려 재차 달려 들었다. 이번엔 내가 다리를 들어 바닥을 짓밟았다.
<가이아>
내 오른발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바닥이 출렁이며 지면이 허연 자태를 드러낸다. 지면의 파도가 정서진에게 뻗어 나간다.
쿠구구구구!
자리에서 멈춘 정서진은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것만으로 대지에 터널만 한 구멍이 뚫렸다.
'이게 무슨 공인 3급이야!'
가이아를 뚫은 정서진이 바짝 거리를 좁혀왔고, 나는 두 팔을 세워 들었다.
<가이아>×2
양쪽의 담벼락이 출렁이더니 달려오는 정서진의 몸을 좌우에서 휘감았다. 이내 지면과 콘크리트 따위가 단단하게 뭉쳐서 공처럼 굳어졌다.
쩌적! 쩍!
그러나 5초도 견디지 못했다.
공에 무수한 금이 생기더니 꼭대기에서 정서진의 주먹이 솟구쳤다.
7초에 지반으로 이루어진 공이 완전히 박살 나며 마력에 휩싸인 정서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적당히 하고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었는데.'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이닥치는 정서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피가 들끓고, 투쟁심이 샘솟는다.
'이러면 그냥은 못 넘어가겠는데?'
나는 입가를 찢으며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파이어 캐논>×100
하늘에 무수히 많은 마법진의 꽃이 피어오른다. 정서진이 다급히 속도를 줄였지만 피하기엔 늦었다.
이미 사거리 안에 들어왔다.
화르르르르르르륵!
시뻘건 불의 비가 허공을 빈틈없이 메우며 쏟아져 내린다.
정서진은 회피 대신, 역시나 정면 돌파로 나왔다. 모든 화염을 맨몸으로 뚫고 들어온다.
'오리지널 마법 봉인, 7공정 봉인, 버프 마법진 봉인, 에아 어시스트없음.'
스스로 제한을 정한 나는 모든 것을 꿰뚫는 주먹을 향해 몸을 던졌다. 데바의 눈이 주먹의 움직임을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했고 그 궤적을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종이 한 장 차로 주먹이 지나치자, 나는 굽혔던 무릎을 펼치며 정서진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쩍!
어퍼컷이 제대로 들어가며 정서진의 턱이 젖혀진다.
건틀릿을 둘렀어도 주먹이 얼얼하다. 마치 바위를 때리는 것만 같다.
뒤로 넘어가려던 정서진의 뒷발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대로 왼손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위력도 있고 속도도 있지만.'
나는 어퍼컷을 날린 오른손에 재차 건틀릿을 장전해 발동했다.
'동작이 너무 커.'
부스터 효과로 팔이 내려가며 어퍼컷에서 엘보로 전환된다. 다가오는 정서진의 왼팔의 관절을 겨냥하고, 팔꿈치로 찍어 누른다.
"흡……!"
정서진의 표정이 굳어지는 사이, 나는 몸을 빙글 회전했다.
쩌어어어어억!
돌아온 다리가 정서진의 안면에 틀어박힌다. 녀석이 바닥을 긁으며 물러나고 거리가 확보됐다. 다시 한번 오른팔을 뻗어 화염구 100개를 만들어 쏟아붓는다.
쿠구구구구구!
들끓는 불의 지옥 속에서, 안경이 박살 난 정서진이 장갑차처럼 들이 닥친다.
그의 오른팔에 빛이 번쩍인다.
'마법……?'
<스카디>
4공정 얼음계 마법. 얼음으로 이루어진 팔이 쏟아져 나오자 나는 쉴드를 딛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이 녀석, 얼음계 적성이었나?'
"실책입니다."
카각!
정서진이 다리를 길게 벌리고 뒤로 당겨둔 오른팔 힘껏 내지른다. 체공중인 내게 예의 그 돌벽도 부순 충격파가 날아온다.
"실책?"
나는 정서진과 똑같은 마법을 캐스팅 했다.
<스카디>
얼음계 4공정은 내 오리지널 마법인 '프로즌 하트'에 밀려서 거의 쓴적이 없지만, 저 정도 보다는 내가 더 잘 쓸 자신이 있다.
"스카디는 이렇게 쓰는 거야."
<쉴드>×300
쉴드들을 좌우 간격 없이 일렬로 촤르륵 펼쳐놓고, 스카디의 얼음 손을 다리 아래에 두고 미끄러진다.
이어지는 형태 변화로 스카디를 썰매처럼 가공하고, 그 상태에서 가속.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허공을 자유자재로 선회하며 파이어 캐논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정서진이 후속으로 발사한 아이스자벨린은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큭!"
속도의 차이.
정서진은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화염구를 피하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완벽하게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공중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던 나는, 쉴드의 선로를 빙 둘러 정서진의 등뒤를 도착지로 만든다.
내 몸이 섬광처럼 정서진의 후면으로 날아오고, 정서진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내 무릎은 이미 그의 안면에 닿아 있다.
쩌어어어엉!
돌진하는 힘에 얻어맞은 정서진의 몸이 뒤로 거칠게 날아간다. 바닥을 구르는 녀석을 향해 오른팔을 뻗는다.
아직 가이아의 지속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지면이 움직여 날아오는 녀석의 몸을 붙잡는다.
"크우우숩!"
지면이 몸을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서진은 두 팔을 모았다.
다시 한번 그의 손바닥에서 4공정 마법이 나온다. 처음부터 녀석은 두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카디>
마법진에서 냉기가 휘몰아친다. 그런데 이번엔 팔이 아니다. 나는 정서진의 형태 변화를 보고는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후우우우우우우웅!
방금 내가 있던 자리를 얼음의 용이 지나간다.
'……새끼.'
자기 형이랑 똑같은 기술이라니.
내가 바닥에 착지했고, 마력고갈증상으로 눈 아래가 시커멓게 물든 정서진이 가이아를 뚫고 뛰어들어왔다.
그는 상처 입지도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철인.
'비살상 마법만으로는 정서진을 이길 수 없어.'
나는 다리를 들어 올리며 데바스타를 켤까 잠깐 고민했다.
그때.
털썩!
달려오던 정서진이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나게 머리까지 바닥에 박았다.
"……돌아오셨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걸까.
나는 들어 올린 다리를 내리고 얼굴을 덮은 물의 장막을 완전히 해제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 정서진이 마인이 될 리가 없지.
나는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서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