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63화
"진짜 팬이에요!"
하예린이 눈을 빛내며 진보라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진보라도 그런 대접이 싫지 않은 눈치다.
죄인인 나는 말 없이 고기를 뒤집으며 장단이 잘 맞는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진보라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잠깐 스톱!"
나도 모르게 집게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나는 아저씨고 쟤는 언니야?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냐?"
"어휴, 여자한테 아줌마는 예의 없는 거잖아요 아저씨."
"……그럼 아저씨라 부르는 건 예의 차리는 거고?"
"와, 다 익었다! 잘 먹을게요!"
교묘하게 말을 돌리며 빠져나간 그녀는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쌈장에 듬뿍 묻혔다.
그러곤 바로 입 안으로 직행.
"으으음! 너무 맛있어요!"
그녀가 팔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많이 먹어! 오늘은 언니가 쏜다!"
"감사합니다!"
역시 한창 먹을 때라 그런가. 덜어주는 족족 전투적으로 삼겹살을 해치우는 하예린이었다.
진보라는 식사를 하다가도 중간중간 전화가 와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대부분 짜증스럽게 응대하고는 끊고 돌아왔다.
"사회생활 힘들지?"
내가 킥킥 웃으며 물었다.
"……어휴, 말도 마세요! 빨리 돌아와서 저희 일 좀 도와주셔야 하는데."
"당분간은 꿈도 꾸지 마. 난 지금의 자유를 원 없이 누릴 거니까."
하예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사이세요?"
"아."
그러고 보니 하예린 앞에서 우리들의 정체에 대해선 말 맞춘 적이 없었다.
나는 슬쩍 눈짓으로 진보라에게 신호하고는 입 모양으로 '조카'라고 말했다. 그녀가 싱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빠 친구분이셔."
"아, 역시 나이 많으셨……"
"야! 잠깐!"
우리는 잠시 컨셉 문제로 한바탕 싸웠다.
"사실 헌터계 선후배 관계야."
틀린 말도 아니니까 결국 이쪽으로 합의 봤다. 하예린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멀뚱히 있었다.
"아, 그럼 선배는……"
"당연히 이쪽이 선배님이시지!"
진보라가 얼른 대답하고는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뜬금없이 뭔 조카예요!"
……크흠. 변명을 하자면 하예린이 내 정체를 추측할 만한 재료를 주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역효과만 났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그녀의 예상에서는 내가 '김유신'이란 선택지 자체가 없는 듯했다.
그도 그럴게, 대중들에게서 나는 5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아저씨! 그 명이나물 안 드세요?"
"아껴두는 거 안 보이냐."
"여고생한테 양보하세요."
"닥쳐! 고등학생이 벼슬도 아니고."
우리는 웃고 떠들며 재미있는 저녁시간을 보냈다.
사이다를 잔뜩 마신 하예린이 다시 화장실에 간 사이, 진보라가 넌지시 물었다.
"내일은 뭐 하실 거예요?"
"서진이한테 한번 접촉해 보려고."
"아……"
갑자기 목이 탄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내가 부탁한 건?"
"준비 끝. 언제든 가능해요. 서진 씨한테 뭘 물어보실지는 생각해 두셨고요?
"응, 대충 플랜은 짜놨어."
빈 맥주잔을 내려놓은 나는 풋고추를 쌈장에 푹 담가서 한 입 크게 깨물었다.
"……서진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저도 그래요."
우리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제대로 꾸몄다.
무스를 듬뿍 발라 머리에 힘을 딱주고, 내 키에 맞아떨어지는 타이트한 맞춤 정장까지 걸쳤다. 깔끔한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손목에는 진보라 지인에게 빌린 명품 시계까지.
마지막으로, 나는 흔히 사장님 차라고 불리는 잘 빠진 프리미엄 외제차에 올라타 있었다.
아, 물론 내 차는 아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운전기사 일일 직업 체험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냐.'
가볍게 핸들을 붙잡아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가죽일까? 감촉이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워서 손을 놓기가 싫을 정도다.
의자부터 바닥 매트까지 전부 초고급 소가죽이라 나도 모르게 앉아 있는 자세가 뻣뻣해진다.
룸미러를 이용해서 마지막으로 머리 상태와 물의 장막으로 덮은 얼굴을 점검하고 있는데, 옆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홍 기사님은 어디 가고 저런 젖비린내 나는 놈이 왔어?"
"말도 마. 진보라 라인에서 꽂아준 낙하산이 랜다."
"어휴 X발, 미쳐 돌아간다. 마탑에서 왜 운전기사에 관여하고 난리야."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잠시 들렀다 갈 곳인데 시끄럽게 구는 것도 귀찮아서 한 귀로 흘려넘겼다.
저 사람들 이야기대로 나는 진보라의 인맥으로 운전기사가 됐다. 정서진은 워낙 만나기 힘든 위치에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손가락으로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남자 둘이 창문을 내리라는 듯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창문을 내렸다.
"오늘부터 그쪽이 운전하는 거요?"
"네."
"네가 아니고."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사장님 경호원이거든. 거, 앞으로 자주 마주칠 것 같은데 통성명도 하고 좀 그럽시다."
젠장, 어차피 하루면 안 볼 사람들이라 사회생활하기 싫었는데.
나는 다시 창문을 올려 버리고는 앞문을 박력 있게 열어젖히며 걸어나왔다. 두 사람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친다.
그리고.
"정 회장님 운전사를 맡게 된 김춘추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림다!"
허리 숙여 힘껏 사회생활했다.
"이제 말이 좀 통하네. 어디 학교 나왔어요?"
"고향은?"
시답지 않은 호구조사를 하고 있는 그때였다.
저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사기적일 정도로 잘 빠진 수트핏에 명품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다른 한 손은 전화를 받고 있다. 수행원들이 서류를 들고 빠르게 뭐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도 키가 컸지만,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큰 것 같은 느낌이다.
'……서진아.'
긴장감이 확 몰려들며 침이 꿀꺽 넘어간다.
5년 만에 정서진과 이야기하는 것도 긴장되지만, 만약 마인이라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녀석을 죽여야만 한다. 그런 사실이 내 목을 옥죄는 것만 같다.
나는 정말로 정서진을 죽일 수 있을까?
"이봐!"
경호원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허리를 꺾은 그들이 나를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 타지 말고 숙여!"
에이 씨,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냐.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세기며 그들처럼 허리 숙여 정서진에게 인사했다.
수행원들로부터 브리핑을 모두 들은 정서진이 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세련된 동작으로 뒷문을 열었다. 정서진이 차에 올라타자, 뒷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복귀했다.
"출발하겠습니다."
서류를 검토하던 정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액셀을 밟고 매끄럽게 알케미아 본사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도로에 올라탔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괜히 뒷덜미에 땀이 흐른다.
나는 룸미러로 슬쩍 정서진의 모습을 살폈다.
녀석은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고 안경으로 바꿔 낀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매만지는 모습에서는 품격마저 느껴졌다.
"처음 뵙는 얼굴이군요."
깜짝이야.
나는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예! 오늘부터는 제가 회장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있을 때, 나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인수인계는 제대로 받았다. 정서진은 출근 시간에 뉴스가 나오는 아침라디오를 즐겨듣는다고 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이란의 던전 운영권을 놓고 중국과 미국 간의 첨예한 이권 분쟁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중국 외교부에서는 입장을 번복할 생각이 없다는…….]
"이쪽 일을 하시는 분치곤 젊어 보이시네요."
어,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 맞지?
"아, 넵! 올해로 스물아흡입니다!"
"스물아홉……"
그가 턱을 쓰다듬었다.
"똑같군요."
"아, 그런가요? 저랑 회장님이랑 동갑……"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정서진은 천천히 눈을 감더니, 한 동안 가만히 그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떨림이 멎는다.
긴장이 사라지고 묘한 분위기가 나를 감싼다.
"사실 제가 서울 토박이라 구석구석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3년 전엔 퀵 알바를 했는데."
정서진이 어떤 이야기 소재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아르바이트, 의학상식, 부동산, 이탈리아 음식, 엑시오 등등.
나는 그의 흥미를 적절히 자극해서 대화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주로 내가 말하고, 정서진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엑시오 티켓팅이라, 저도 한때 열을 올렸던 적이 있었죠."
"하하하! 의외네요."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며 슬쩍 방향을 틀었다. 일부러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았다.
"음? 평소 가던 방향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눈썰미 좋은 정서진은 바로 알아차렸다.
"하하! 제가 골목 구석구석 지름길은 전부 꿰차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올림픽대로 타면 차가 많이 밀리거든요."
"든든하네요."
나는 골목으로 차를 몰며 잠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해외 이권분쟁 같은 거 말고 요즘 가장 이슈인 국내 소식 있잖아.
[다음 소식입니다. 김유신 박물관사태가 단순한 균열 사태가 아닌, 계획된 범죄였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감시카메라가 일시에 파괴됐다는 점, 그리고 몬스터를 죽인 헌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룸미러로 정서진이 김유신 박물관 소식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캐치했다.
"아, 그러고 보니 회장님은 김유신 헌터를 아시겠군요. 같이 일도 하셨을 테고……"
"네. 그렇습니다."
"김유신 헌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도 알고 있다. 고용인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면서 정서진을 긁어볼 때가 됐다.
내 물음을 들은 녀석은 눈을 감았다.
"그다지 말할 기분이 아니군요."
…… 이렇게 빠져나가는 건가.
나는 설명을 요구하듯 룸미러로 그를 보았지만, 정서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며 차의 덜컹거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상하군요."
정서진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여기가 지름길……"
"회장님."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김유신의 성공은 회장님의 공이 절반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이 없었더라면 김유신은 뛰어난 헌터가 됐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방대한 영향력을 가진 헌터계의 거물이 되진 못했겠죠. 회장님은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정서진의 표정이 굳어진다.
"……당신, 그냥 운전기사가 아니군."
"동시에 회장님은 야망 있는 분이셨죠. 5년 뒤 유닉스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반면, 알케미아는 유닉스의 자본을 흡수하며 승승장구. 전세계에 포션을 독점 유통하고 있습니다. 대단해요 정말."
나는 차를 멈춰 세웠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오래된 시멘트 건물뿐인 재개발 진행 중인공 터.
"회장님의 야망 때문에 김유신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놀란 얼굴의 정서진을 돌아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안 그래요?"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신호로 차 표면에 있던 마법진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늦지 않게 앞 유리로 빠져나온 나는, 거대한 폭염에 휩싸인 차량을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공터 곳곳에 마법진들이 내 신호에 따라 발동한다. 하늘, 바닥, 건물, 주위가 마치 붉은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이어서 두 개의 마법을 추가 발동하자 소리가 끊기며 주위의 환경이 물살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일그러진다.
별 효과는 없는, 마법적 연출이다.
하지만 인간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
나는 불타는 차량 내부를 바라보았다.
쿵!
불타는 차체를 부수며, 정서진이 걸어 나온다.
옷이 조금 탔지만 몸은 멀쩡하다.
상의가 불타 사라지고 드러난 몸 사이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보인다.
정서진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이내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새로운 물의 장막을 쓰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