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62화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뻗었다.
마나 에로우, 쉴드, 건틀릿 마법진이 펼쳐졌다. 잔뜩 기대 어린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핼쑥한 표정이 되었다.
"또 기본기예요? 그런 건 학교에서도 많이 한다구요."
"나도 요즘 마법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아봤거든?"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챙겨온 '솔잎의 눈' 캔 뚜껑을 땄다.
"고등학생이 2서클 배우고 있는 거면 진짜 빠른 거야. 내가 가르치던 사람들은 20대 중후반에 1서클 마법만 가지고 공인헌터가 됐어."
"네에에에? 에이, 거짓말!"
"진짜라니까."
나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이어서 말했다.
"서클의 수가 곧 강함이라는 인식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요즘 마법계는 진도 빼는 데만 급급해. 사실 마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착실한 기본기야. 나도 아직까지 1~2서클 마법 계속 쓰고 있거든."
"알겠어요. 그래서 훈련할 내용은요?"
"잠시 준비 작업 좀."
나는 바위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마법진 하나를 그려 넣었다.
<필드 마법 - 힐링진>
우우우웅!
주위에 푸른 결계망이 펼쳐졌다.
이걸로 준비 끝이다.
"자, 룰은 딱 두 가지야. 1공정 마법만 쓸 것. 힐링진 밖으로 나오지 말 것."
"아, 네!"
"그리고 이번 트레이닝의 패턴은 딱 세 가지."
나는 마나 에로우를 꺼냈다.
"첫 번째는 이거. 평균적인 속도로 날아가는 마나 에로우야."
나는 그녀 앞에서 마나 에로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음에는 그 진화형인 황금빛 화살, 레피드 에로우를 꺼냈다.
"두 번째도 마나 에로우 계열이긴 한데, 이건 네가 못 피하는 속도로 쏠 거야."
내가 레피드 에로우를 발사하자 쏜살같이 날아가 나무에 박혔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거야."
나는 <가이아>마법으로 바닥을 솟구치게 해 흙의 벽을 만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무슨 훈련을 하실 건지 감이 안 잡혀요."
"흐흐흐흐, 모르겠으면 몸으로 배우면 돼."
나는 다시 바위로 돌아가 앉아 오른팔을 들었다.
"간이 1층 시련, 지금부터 시작한다."
* * *
"하아, 하아, 하아."
하예린이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아 있다. 나는 그제야 그녀를 둘러싼 마법진을 거두었다.
"14번 트라이 끝에 성공! 수고했어."
그녀는 완전히 넋을 놓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왜?"
"아저씨 사이코패스죠?"
나는 그녀의 원망 어린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그냥 트레이닝일 뿐이야."
"트레이닝은 무슨!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잖아요!"
그녀가 빼액 소리 질렀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게 세상 서러웠던 모양이다. 하긴 중간에 차라리 죽이라는 외침까지 나왔으니까.
"위력 조절한 거야. 다친 곳도 없잖아."
"회복 마법을 깔아놨으니 당연하죠! 이게 더 잔인해!"
나는 1층 시련을 나름대로 각색해서 그녀를 굴려보았다.
진짜로 마나 에로우가 내 몸을 관통해서 죽음까지 몰아가던 때와 비교해 보자면, 널널하고 편하게 해준건데.
"불평은 네 능력치를 확인해 보고 해."
"……네?"
그녀가 스테이터스를 열었고, 나도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 보았다.
이름 : 하예린
고유 능력 : 정착자.
개인 특성 : [마나의 아이 Lv.1] [진지강화 Lv.4] [토주 Lv.2]
주요 능력치 : [마력 121] [순발30] [체력 17] [근력 10]
특수 능력치 : [의지 33] [집중 14]
능력치 총합 : [225]
"아……"
그녀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능력치 꽤 늘었지? 마법 숙련도는 어때?"
"1서클 모두 70%대를 넘었어요."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도 참을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보다는 좋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요! 그만하라고 울고불고 애원하는데 계속 쏘는 건 너무하잖아요!"
"너야말로 그렇게 울고불고하면서도 잘 피했잖아."
그녀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하예린은 재능이 넘치지만 엄살쟁이였다.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한계에 가둬두는 타입이다.
여기까지만 하면 되겠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그런 그녀의 패배의식을 깨뜨려 놓고 싶었다. 내가 절대로 마법을 해제해 주지 않을 걸 알았는지, 그녀는 마지막 시도에서 정말 진지한 모습으로 시련을 극복해냈다.
"내 트레이닝 스타일이 마음에 안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수업 듣고 실습하고 그런 뻔한 연습을 반복해 봐야 별 소용 없을 거야.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집중력을 쥐어짜내는 게 마법사의 근본이니까."
"…… 알겠어요."
그녀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사륵.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내가 간과한게 있었다.
몸의 상처는 깨끗하게 회복됐지만 옷은 아니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찢어진 옷자락들이 바닥에 흘러내렸다.
"……."
"……."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의 얼굴이 화아악 달아올랐다.
"끼야아아아아악!"
"예, 예린아! 잠깐만!"
"미친! 뒤! 뒤 돌아요! 빨리이이이!"
나는 얼른 뒤를 돌았지만, 그녀의 사나운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으아앙! 역시 아저씨는 변태 사이코패스!"
……다시 사이코패스로 돌아왔다.
* * *
나는 하예린의 휴대전화를 빌려서 진보라에게 연락했다.
-누구세요.
삶에 찌든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보라야. 나야."
-앗, 아! 선배님! 네! 네! 다행이다! 어디 간 거 아니죠? 회의 도중에 꿈이 아닌가 해서 계속 볼 꼬집었어요! 환상이 아니라 너무 다행이에요! 아하하!
온도 차에 새삼 놀라며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퀵 좀 보내줄래?"
-물론이죠! 안 그래도 새로 개통한 휴대전화랑 위조 신분증 보내 드리려고 했거든요!
"응. 그거랑 지금 절실히 필요한게 있는데."
-뭔데요?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18살쯤 되는 여자애 옷이랑 속옷이 필요하다! 위아래 전부! 아, 카임 여고생 교복도 부탁해!"
-…….
잠시 짙은 정적이 흘렀다.
-선배님?
어쩐지 휴대전화 액정 너머로 경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럼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산에서 여고생이랑 훈련하다가 실수로 옷을 찢었습니다.
……가 팩트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팩트 보다는 거짓이 필요할 때가 많다. 선의의 거짓말이지.
"내가 전에 말했던 마나의 아이 기억나지?"
-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더불어 나도 식은 땀이 흐른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거든. 상처는 내가 급히 치료했는데 옷이 찢어져서 곤란한 상황이야."
-아, 몬스터 맞긴 하네요. 성욕에 눈먼 남자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녀는 좀 처럼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세계에서 가장 보안이 좋은 도시 중 하나인 서울 한복판에서 몬스터가 딱 튀어나온 거네요? 그리고 하필 속옷까지 찢어져 버렸고?
"……그냥 눈 딱 한 번만 감고 보내줘. 진짜 급해서 그래."
내가 다급한 어조로 말하자 그녀의 수화기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 위치 찍어주시면 바로 물건 준비해서 퀵 보낼게요.
"정말 고마워."
다행히 허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나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를 지나, 야차산 올라가는 길 근처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내 후드티를 입고 잔뜩 몸을 웅크린 채 훌쩍이는 하예린이 있었다.
"이제 곧 퀵이 올 거야. 일단 옷입고, 교복도 준비해서 보낼 테니까 내일 바로 입고 가면 돼."
"……네."
으으, 나도 참 빡대가리다.
5년 동안 잠만 자서 그런가. 그냥 훈련 생각만 잔뜩 하고 왔지, 갈아입을 옷 같은 건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예 린아."
"앞으로 오지 마세요!"
다급히 몸을 웅크린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나는 찍 소리도 못하고 대충 근처에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모아 붙이고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남자 옷이라 품이 넓었다. 팔을 다 뻗어도 손가락이 빼꼼 나올 정도.
한동안 그렇게 있던 그녀는 심심했는지 내 후드티 소매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의외로 아저씨 냄새는 안 나네요?"
……이제 하나하나 반응하는 건 포기했다.
"아저씨 소리 듣기엔 어리다고 했지?"
"흑염소 팩 챙겨 먹는 사람이요?"
"관리는 젊을 때부터 해야지."
그녀가 쿡쿡 웃었다. 나는 앞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왜 김유신을 싫어해?"
그녀는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냥 제 개인적인 이유예요."
딱 거기까지. 더 말해주진 않았다.
아, 신경 쓰이네. 오늘도 대답을 못 들었다.
"그러는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인지, 진짜 얘기 안 해줄 거예요?"
"말했잖아. 전 헌터."
"그럼 왜 헌터 일을 쉬게 됐어요?"
나는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 중에 꽤 큰 부상을 당했거든. 계속 재활 중이었어."
"아……"
우리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퀵입니다.
"네, 나갈게요."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갈 테니까 여기 있어."
"네."
다시 넓은 길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자 오토바이 앞에서 박스를 든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수령자예요."
"네. 여기 서명해 주시겠어요?"
내가 서명을 하는 사이 퀵기사가 오토바이 헬멧을 벗었다.
풍성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 입이 딱 벌어졌다.
"……보, 보라야!"
"고객님.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건가요?"
그녀가 내가 왔던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야! 그게 아니라!"
내가 서둘러 그녀를 뒤쫓았지만 이미 늦었다. 달려가던 진보라의 걸음이 멈칫했다.
저 뒤에서 하예린의 비명이 들렸다.
'아, 망했다.'
그녀가 본 광경은, 알몸에 내 후드티를 걸치고 잔뜩 웅크려 있는 여고생과, 그 옆에 찢어져 있는 교복의 잔해일 것이다.
"선배니이이임?"
진보라가 삐걱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웃음이 괴기하게 보였다.
* * *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우리는 근처의 고깃집으로 들어왔다. 내가 고기를 구웠고, 맞은편에 앉은 진보라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턱을 괬다.
"헌터로서 여고생 강간범을 체포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에요!"
나는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아, 이건 의심할 만 했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팔짱을 끼고 나를 샐쭉한 눈으로 째려보았다.
"이번 일은 진짜 비정상이라는 건 자각하고 계시죠?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된 애한테 1층 시련? 미쳤어, 진짜!"
"크흠, 화력 낮춰서 했다니까."
"근데 애 옷은 왜 찢어요!"
"훈련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투닥거리고 있을 때, 화장실에 갔던 하예린이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스프라이트 긴 팔 티셔츠에 스키니진으로 갈아입은 모습이다.
"우와아! 다시 봐도 대박!"
그녀의 눈이 아이돌이라도 발견한 듯 반짝반짝 빛났다.
"진짜 진보라 헌터님 맞아요?"
"응, 그럼!"
그녀가 잘난 척 폼 잡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정신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어, 방금 속으로 한숨 쉬었죠?"
나는 못 들은 척, 얼른 고기를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