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52화
"해독제도, 감염 탄두도, 전부 막혔네요. 이제 어쩔래요?"
"…… 어쩔 수 없지."
일자로 앙다문 알베르의 입술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방해꾼들을 없애고 계획을 속행한다."
"거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나오시네."
추락하는 성의 내부를 배경으로, 유신과 마르첼로, 마리가 나란히 섰다.
알베르는 공중에 뜬 채로 도전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유신이 신호하자 허공에 워프게이트가 열린다.
알베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기 무섭게, 그의 몸뚱이가 밀려든 섬광에 휩쓸려 그대로 벽에 부딪힌다.
화아아아아악!
마탑 자체에서 보유한 공격 마법 <디스트로이어>.
거기에 워프게이트는 발동 거리가 가까울수록 열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파괴의 빛은 그간 공격으로 약해진 아다만티움 벽을 뚫고 알베르를 성밖으로 날려 보냈다.
"우리도 가죠!"
세 사람도 뒤따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섬광이 뻗어가는 위로 알베르가 비행하고 있었다.
유신이 손톱을 꽉 깨물었다.
'망할! 저 새끼고유 능력은 날개가 아니라 무슨 좀비 같은 거 아냐?'
몇 번이고 위기에서 벗어난 알베르의 몸이 천공성 꼭대기를 지나 높은 상공까지 날아올랐다.
펼쳐진 이카루스에서 일어난 녹색 돌풍이 포악한 기세로 지상에 내리꽂힌다.
휘오오오오오오오!
돌풍은 땅을 헤집고 건물 잔해들을 찢어 가루로 만들었다. 이제는 천공성이 어떻게 돼도 좋다는 듯 맹렬한 공격.
밖에서 싸우던 헌터들은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유령대가 자랑하는 유령선마저 순식간에 나뭇조각이 되어 사라져갔다.
"김유신! 이제 어떻게 해?"
마리가 천공성 철골 뒤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반대편 철골에 몸을 숨긴 유신이 인상을 썼다.
"지금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은 하나뿐이야."
"뭔데?"
"까놓고 말해 알베르는 쓰러뜨리기 어려워 보인다."
마리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오므렸지만, 유신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 성 어딘가에 있을 '이계 유적'을 찾아 내 부수는 거야. 알베르의 강함은 이카루스 능력으로부터 나오니까 그것만 없애면 평범한 플레이어로 돌아갈 거야."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그녀가 주위를 슥 훑었다. 천공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들은 전부 날아가 버리고 이제는 뼈대만 남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유적을 숨길 만한 공간이 없어."
"내 생각엔 처음부터 유물은 성안에 없었을 거야. 아마도 아래."
유신이 손가락으로 지면을 가리켰다.
"이 섬의 땅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겠지. 내게 맡겨. 5공정 크레바스를 써서 이곳을 반으로 갈라놓으면……."
"그렇게 나올 셈인가."
섬찟한 감각에 유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알베르가 그림자처럼 그의 등뒤에서 나타났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겠다."
알베르의 팔이 유신의 등으로 내질러지는 그때, 갈고리 같은 것이 유신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우왓!'
유신이 끌려 들어가는 동시에, 크고 넓적한 마체테가 알베르의 어깨로 떨어졌다.
터어어어어엉!
바닥에 쓰러진 유신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마리의 등 뒤로 해적의 모습을 한 혼령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알베르는 팔을 움직이지 않고 한쪽 날개를 세워서 검을 막아냈다.
"끝까지 방해할 생각인가? 유령왕."
"흐읍……!"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알베르의 날개를 억누르고 있는 마체테에도 강한 힘이 실리며, 알베르의 두 발이 바닥에 균열을 일으켰다.
알베르는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검처럼 허공에 휘둘렀다.
스릉! 소리가 나며 해적의 영혼이 반으로 갈라져 사라져 버렸다.
"커흑!"
강제로 영체결합 상태가 해제된 마리가 피를 토했다. 알베르가 다시 유신에게 돌진하려는 순간.
콰드드드드득!
이번엔 거대한 장창이 들이닥쳐 알베르의 몸을 밀어냈다. 오른팔을 뻗고 있는 마리의 위로는 중갑옷을 입은 기사의 상체가 나타나 있었다.
"허억! 하아! 후우!"
그녀가 실핏줄이 생긴 눈을 부릅뜨며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기사의 혼령이 매섭게 창격을 쏟아냈고 알베르는 공중으로 피하며 깃털을 날렸다.
"어떤 혼령을 꺼내도 날 이길 수는 없다."
깃털이 박힐 때마다 기사가 든 방패가 고철처럼 찌그러들었다.
"미안! 조금만 더 버텨줘!"
유신은 이를 악물며 마법을 준비했다. 그때 이어마이크로 나대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저희도 돕겠…….
"오지 마요! 절대! 마탑 근처에 붙는 천공성 헌터들만 상대해요!"
이건 절대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만한 싸움이 아니다.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다.
유신은 스펙터의 뒷면에 대지계 5공정 마법 크레바스를 시전했다.
그러나 수식을 펼쳐 나가는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이 섬을 잠시 반으로 갈라놔도 유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시간 안에 알베르를 뚫고 유적을 부술 수나 있고?'
회심의 공격들이 모두 빗나가며 유신은 자신감마저 현저히 바닥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두뇌가 또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가열차게 돌아갔다.
알베르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러나 유신은 곧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성공 확률이 낮은 도박이라도 필요할 때엔 승부수를 던지는 유신이었지만, 이건 무리수인 걸 떠나 그냥 미친 짓이었다.
'에아. 5공정은 나한테 맡기고 지하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를 찾아 줘. 억지스러운 방법을 쓰지 않아도 유적에 닿는 길이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탑주.
콰아앙
마리가 꺼낸 여섯 번째 혼령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마리는 연신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앞으로 알베르가 다가온다.
"경의를 담아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알베르가 깃털을 뽑아서 검처럼 쥐고는 휘두를 준비를 했다.
'큭!'
유신이 5공정을 멈추고 달려들려는 찰나,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큰 십자가가 알베르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섬 전체가 기우뚱했다.
무려 천공성보다 더 큰 빛의 십자가가 작렬하며 섬의 중심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마르첼로……'
힘의 크기로 미루어보아 이게 마르첼로의 마지막 공격일 듯싶었다.
마침 마르첼로가 유신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김유신 헌터, 여기서 빠져나가죠."
"그럼 알베르는요?"
"……분하지만,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이른 상대입니다. 뒤는 다른 공인 1급들에게 맡깁니다."
탈출인가.
정말, 정말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유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게 최선이라고 머릿속으로 인정하고 말했다.
천공성의 모든 계획을 막아내며 급한 불도 껐지 않은가.
해독제가 개발됐으니 알베르는 더 이상 연맹을 붙들어놓지 못한다.
이번 재앙이 끝나는 대로 연맹은 알베르를 마인으로 분류해 처단 명령을 내릴 테고, 전 세계의 공인 1급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 본다면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는 게 최선으로 보인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김유신 헌터는 마리를 데리고 탈출하세요."
"네? 그럼 당신은요?"
"탈출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시선을 끌 테니……"
콰득!
마르첼로의 몸이 덜컹하고 흔들렸다. 순백의 성의가 피로 시뻘겋게 물드는 모습에 유신은 눈을 부릅떴다.
마르첼로의 가슴 한복판에 깃털의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마르첼로!"
"아, 너무 걱정 마세요."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 그는 자신의 가슴에 삐져나온 깃털 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 정도로는 안 죽……"
우득!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깃털이 목을 뚫고 튀어나왔다.
마리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우웅.
깃털에 마력이 일렁였다. 알베르는 깃털에 담은 마력을 무게로 치환할수 있었다.
여섯 장의 깃털들이 상처들을 찢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부우욱 소리와 함께 가슴에 박힌 깃털이 복부, 허벅지를 지나 다리를 찢고 내려온다.
목에 박힌 깃털은 마르첼로의 몸을 일자로 찢어버리고는 사타구니까지 내려왔다.
피 묻은 깃털들이 떨어질 때마다 철근이 떨어지는 울림이 들리며 바닥이 내려앉는다.
그야말로 종잇조각처럼 찢어진 마르첼로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마리는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유신은 완전히 넋을 놓은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까운 인재였다."
저벅.
알베르가 다가왔다.
"그는 인류를 위해 더 많은 할 일이 있었다. 이렇게 사라질 젊은이가 아니었는데."
"……미친 새끼."
유신이 충혈된 눈으로 몸을 부르 떨었다.
"죽여놓고 이렇게 사라질 젊은이가 아니었다고? 니가 X발 사람이냐?"
"나는 공인 헌터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뚝. 하고.
유신은 자신을 유지하던 일말의 자제심도 끊기는 것을 느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신은 기껏 만들고 있던 5공정 크레바스도 대기에 흩뜨려 버렸다.
도망치지 않겠다.
내가 죽든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 저 새끼를 죽인다.
"……후우우."
그런 결정을 내리자, 들끓던 피와 분노가 빠르게 식으며 뇌가 냉각된다.
모든 것이 차분해지고, 확고한 의지가 이 몸뚱이의 목표로 자리 잡는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
결심을 마친 유신이 뒤꿈치를 들고 양발에 데바스타를 켰다.
-……탑주.
"미안, 에아."
유신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야."
알베르가 악몽과도 같은 날개를 펼치며 유신과 마주했다.
"힘의 차이는 절감했을 텐데, 아직도 싸울 셈이냐?"
알베르의 깃털들이 섬광처럼 날아왔다. 유신은 강하게 오른발을 내디뎠다.
그의 몸이 검은 연기를 이끌고 깃털들을 지나 알베르의 후방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회전력을 더하며 다리를 뻗는다.
부우웅!
알베르는 고개를 꺾어 가볍게 피해낸다.
그때 어깨를 지나고 있던 왼발의 방향이 알베르 쪽으로 꺾이더니, 그대로 데바스타가 발동했다.
터어어어어엉!
다급히 팔을 세워 공격을 받아낸 알베르의 표정이 굳어진다.
팔에서 전해진 충격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찌릿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유신은 회수 동작 없이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라 반대쪽 다리를 뻗었다.
'그 기술은 없다.'
유신의 주력기인 데바스타에 대해서는 알베르도 분석했다.
유신은 양발에 데바스타를 착용해서 한 발은 돌진, 한 발은 발차기에 사용했다.
알베르가 가뿐히 팔을 세워 받아내려는데, 다가오던 유신의 오른발을 손이 툭 치고 지나간다. 그 터치만으로 선명한 해골 문양의 마법진이 신발 밑창에 일렁였다.
'……!'
굉음과 함께 데바스타가 발동했다.
알베르가 다급히 날개를 접어 얼굴을 보호했지만, 충격파로 수십 미터를 밀려나야 했다.
그가 날개를 내리며 정면을 봤을 때, 유신의 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대단하군."
알베르가 감탄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느새 등 뒤에서 대검을 휘두르는 유신의 모습이 보였다.
까아아앙!
이카루스를 움직여 스펙터를 막아낸 사이, 유신이 스펙터를 손에서 내려놓고 알베르의 측면으로 파고든다.
쩍!
이를 기다리고 있던 알베르가 유신의 머리를 후려 찼다. 흙을 튀기며 물러나는 유신이 신속히 자세를 다잡았다. 바닥을 긁으며 밀려나던 그의 두 다리가 포인트에 안착했다.
찰칵! 찰칵!
에아가 미리 바닥에 두 개의 데바스타 마법진을 깔아둔 것이다. 유신이 맹수처럼 상체를 낮추며 달려 들었고 두 개의 데바스타가 동시에 '돌진'에 소모된다.
쩌어어어어어억!
포착 불가능한 속도로 들이닥친 유신의 주먹이 알베르의 안면에 꽂힌다.
알베르의 몸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넘어가 바닥을 뒹군다.
"크으."
알베르가 입가에 피를 닦았다. 바닥에 내려온 유신은 오른발에 데바스타를 켜자마자 득달같이 뛰어들었다.
"미친 놈이."
알베르가 깃털을 날려 보냈지만, 다시 검은 연기와 함께 유신의 몸이 후방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휘둘러지는 스펙터를 날개로 받아낸 알베르가 유신의 다음 움직임을 살폈다.
평범한 발차기.
그 기술은 없다. 두 손과 다리 사이의 거리도 멀다.
이번에야말로 방어 후, 이카루스를 움직여 카운터를 먹일 수 있다.
알베르가 팔을 뻗어 가드 자세를 취하는 순간.
슈슉!
휘둘러지는 유신의 다리 앞으로 스펙터가 전이된다.
유신의 다리가 내려오며 스펙터의 겉면을 훑자, 마치 팔레트에 물감을 묻힌 붓처럼 다리가 검은 연기를 이끌며 내려온다.
'천재적이다!'
감탄하다 못해 경이로움마저 느낀 알베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쩌어어어어어어엉!
망치로 대못을 두들기듯, 데바스타의 화력은 가드를 내세운 알베르의 몸을 강하게 바닥에 꽂아 넣었다.
알베르가 입에서 피를 왈칵 토했다.
드디어 유효타를 만들어냈다.
"흐흐, 하하하하!"
알베르가 주위에 녹색 돌풍을 일으키자 유신은 비로소 한 템포 쉬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쓰러진 알베르가 몸을 일으켰다.
"멋진 전투 센스다! 뭔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실력을 숨긴 거지?"
그렇게 물음을 던진 알베르가 유신의 상태를 보고는 짐작했다는 듯 턱을 쓸었다.
"그렇군. 리스크가 심한 기술인가."
데바스타를 남발한 유신의 몸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심각해 보였다. 부작용으로 인해 유신의 체내 마나가 검은색으로 변질되고 있었지만, 유신은 그것을 몰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암흑 친화 특성이 Lv.9에 도달했습니다.]
유신이 입가를 닦으며 무릎을 굽혀앉았다. 그의 두 손이 다시 한번 신발 밑창에 데바스타를 켰다.
"큭……!"
유신이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군. 미래가 창창한 그대가 수명까지 깎으며 나와 싸울 이유가 뭐가 있지?"
"가식 부리지 마."
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오른쪽 눈에서는 평소의 푸른아지랑 이가 아닌, 검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오늘 여기서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