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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48화 (248/337)

나 혼자만 마탑주 248화

성문이 별다른 저항 없이 열렸다.

그리고 내부의 모습을 들여다본 유신과 마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성 내부에는 청공성, 사자선단, 성기사단의 모든 주력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헌팅 디바이스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가자. 마리."

"응."

두 사람은 적진 한복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흉흉한 분위기, 차가운 공기, 무수한 시선들, 수 많은 감정들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공격당할 것 같은 위협을 느끼며, 유신은 고개를 들었다.

성 내부의 2층,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인다.

공인 1급 헌터, 천공성주 알베르 클로스테르망.

유신은 입가를 비틀었다. 어째 저 사람은 만날 때마다 차를 마시고 있는 것 같다.

알베르의 옆으로는 샴이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젊어진 모습 그대로다.

알베르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유신을 보았다.

"어서 와라. 마탑주, 그리고 유령왕."

"……."

유신은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지만, 알베르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벅. 저벅.

천공성 헌터 두 명이 다가와 유신과 마리 앞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알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신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몸을 숙여천을 거두어보았다.

나무 박스에 액체가 든 병들이 담겨 있었다. 수량은 50병.

"그대들에게도 제안을 하지."

알베르가 말했다.

"감염 성분이 퍼지는 것을 느리게 만드는 약이다. 그걸 가지고 물러나라.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해독약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겠다."

"……."

유신이 작게 한숨을 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러는 이유가 뭐죠?"

"뭘 말인가?"

"뭐긴 뭐겠습니까. 몬스터가 되는 약을 연맹으로부터 숨기고, 해독약을 가졌으면서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오히려 연맹과 세계길드를 조종하는 이런 계략을 꾸민 이유 말입니다."

"……."

알베르가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당신."

유신의 눈이 한 순간 번뜩였다.

"마키나티오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죠?"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온 듯, 알베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유신은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걸……!"

"알다마다, 그쪽 세계에 다녀온 적도 있고 심지어."

유신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세계를 멸망시킨 게 나야."

웅성웅성.

주위의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샴도 놀란 표정이다.

하지만 다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는 눈치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마탑주."

"그럼 살짝 대화의 방향을 돌려보죠. 당신의 목적은 '인구수의 통제'. 맞지요?"

"……."

침묵의 긍정이란 게 이런 건가. 유신은 미소를 흘렸다.

천공성에 방문했을 때, 고장난 안드로이드가 천공성 안에 있는 걸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마탑에 돌아와서 쭉 고민하고 고찰한 결과 나름의 답을 얻었다.

왜 사람들은 이 시대를 '오버레이'라고 부르는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겹쳐졌다는 소리다.

지구에는 이계의 동식물이 자라나고, 이계의 유적들이 전이되었고, 이계의 문명, 심지어는 이계의 몬스터들까지 넘어왔다.

유신은 처음엔 겹쳐진 세계가 '에렌델'에 국한된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에렌델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세계들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들은 파편이 되었고, '던전'이나 '통제구역', 혹은 '재앙'의 형태로 나타났다.

지금 지구는 바로 이전에 멸망했던 에렌델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고 있지만, 마키나티오의 파편으로 구성된 던전도 어딘가에는 열렸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추측이다. 아마도 알베르는, 마키나티오의 던전에 들어가 모종의 방법으로 그쪽 세계의 데이터를 입수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이브의 기록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브의 이야기를 알게 된 알베르는, 자신을 이루고 있던 가치관에서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이브가 하려던 일을 지구에 재현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브의 계획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구수 통제.

사실 재앙과 인구수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지구에서도 무척 활발하다. 대도시같이 사람이 밀집한 곳 일수록 '균열'이나 '재앙' 사태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는 건 이미 검증된 팩트다.

인구수가 적은 개발도상국보다, 인구수가 많은 강대국이 재앙에 자주휘말린다.

이상현상 중 하나인 '균열사태'는 시골보다 대도시에 자주 일어난다.

이에 따라 이브는 행성 전체의 인구수를 기준치 이하로 확 줄여 버리고, 심지어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의 수까지 통제했다. 몬스터들의 공격은 우수한 과학력과 안드로이들로 막았다.

방법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무튼 나와 레지스탕스가 움직이기 전까지 그녀는 꽤 잘 행성을 운영하고 있었다.

만약 알베르가 이브의 계획에 감화되어 이러는 거라면…… 참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을 수 있나 싶다.

두 번이나 이브를 막아서야 한다니.

"바보 같은 짓입니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유신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이브의 계획은 세계를 완전히 쥐고 비틀 힘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구는 상황이 훨씬 복잡해요. 당신의 계획으로 몇억의 인구가 사라지다고 한들, 재앙은……."

"이번 계획은 시작에 불과하다."

알베르가 말했다.

"나는 인류를 완전히 통제해 보이겠다."

"……자만이 하늘을 찌르네요. 다른 공인 1급들이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뭐, 천 번 양보해서 당신의 뜻대로 된다고 한들, 인구수가 줄면 인류의 전력이 약해지니 더 위험할 거라곤 생각 안 해봤어요?"

"각성하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구수를 줄여나갈 것이다. 헌터 한 명이 감당해야 할 사람 수를 줄이면 부담도 큰 폭으로 줄어든다. 단 10%까지만 줄여도 재앙의 부담은 30%이상 격감하는 효과가 있지."

"그런 개소리가 납득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알베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한다. 지금 당장만 보면 큰 변화가 필요 없어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이미 재앙은 가속 단계에 이르렀고, 더는 시간이 없어. 더 벅차지기 전에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해."

그가 두 팔을 벌렸다.

"재앙이 출현하면 제일 먼저 헌터가 죽어나간다. 전체 인구에 쓸모없는 비각성자들의 비율만 높아지고, 내려오는 재앙은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하지. 그래서 나는 헌터 연맹을 부수고, 각성자가 비각성자를 지키는 태세가 당연하게 된 사회 관념을 부술 것이다. 비각성자들을 전장으로 내보내 그들의 수를 큰 폭으로 줄일 것이다. 각성자들끼리 아이를 낳고, 신생아의 각성자 비율을 크게 늘려 차후의 사태에 대비하겠다."

유신은 표정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말이 안 통한다. 이 새끼 역시 마인인가? 완전히 다른 사고를 하는 기능이 막혀 버린 게, 비틀어진 사고관을 갖추게 된 마인과 대화하는 느낌이다.

정말로 브레이크를 걸 수 없는 걸까?

"하지만 성주님도 아실 텐데요."

그렇담 이쪽도 비장의 카드를 쓴다.

"결국 당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이브의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그 방법은 정답이 아니라는 게 판명 났어요."

"아니."

알베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브의 정책은 완벽했다. 단지 다른 변수에 의해 무너졌을 뿐이지. 안 그런가?"

유신은 이를 악물었다. 묻어뒀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마탑주, 유령왕. 그대들은 인류의 중요한 전력이다."

알베르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을 내 계획해서 배제하고 싶지 않다. 그 약을 가지고 돌아가라. 너희들과 너희 지인들의 목숨은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지."

"대신 플레이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이고?"

"그렇다."

"X발, 당신이나 마인이나 다를 게 뭐야?"

내가 마력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주위의 헌터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총구를 내게 겨눈다.

"당신은 미쳐 있어. 한 명의 강자가 일으키는 독단에 멸망한 세계가 한 둘인 줄 알아?"

"논리가 부실한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키나티오를 멸망시켰다고? 다른 세계의 예시를 드는 건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나? 아니면 다른 세계에 다녀오기라도 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유신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대도 미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미친 시대의 미래를 알게 되면, 미친 사람 취급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 둘 다 미친 놈이라고 가정할 때, 차이점이 뭐겠는가?"

그가 해독제로 보이는 유리병을 꺼내 흔들었다.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미친 놈인가? 아니면 입으로만 떠드는 그냥 미친 놈인가."

"……."

"선택은 우리를 미친 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달렸지."

그가 다시 품 안에 유리병을 넣고는 말했다.

"놈을 죽여."

철컥! 철컥!

이 성안에 있는 모든 헌터들이 마력을 끌어올린다. 모두가 능력을 사용할 준비를 하는 듯 사방에서 빛이 몰아친다.

성기사단의 무기에서는 백색의 섬광이, 천공성 헌터들의 날개에는 녹색을 띠는 마력이, 선단 헌터들의 팔에서는 푸른 빛이 휘몰아쳤다.

마리는 겁에 질린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림처럼 완벽한 열세의 순간이었지만.

"맞는 말이야."

유신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가 마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렸지."

유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빛의 십자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

의자에 앉아 있는 알베르의 가슴을 강타한다.

알베르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피가 튀고 가슴이 꿰뚫린다. 갈 곳을 잃은 헌터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주르륵 쓰러진다.

2층과 3층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던 헌터들의 몸이 바닥에 털썩털썩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쓰러진 헌터들은 모두 천공성 헌터들이었다.

"무슨!"

알베르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눈을 부릅떴다.

철컥!

무표정한 얼굴의 샴이 갑각화된 팔을 알베르에게 겨눈다.

"아직도 모르겠어?"

유신이 입가를 찢으며 말했다.

"이미 해독제는 완성됐어."

갑각화된 샴의 팔이 푸른 불을 뿜는다. 포탄이 작렬하며 알베르의 몸이 벽을 뚫고 들어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천공성 전체가 들썩이며 잔해가 후두두둑 떨어졌다.

"아, 으, 어으으……?"

혼란에 빠진 마리의 눈동자에는 물음표가 백 개쯤 떠올라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안심해."

유신이 미소 지어 보였다.

"제 연기 어땠습니까? 김유신 헌터."

천공성의 정문으로, 마르첼로가 십자가를 붙잡은 채 나타났다. 그의 흰 성의가 천공성 헌터들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신은 픽 웃음을 흘렸다.

"얄미워서 한 대 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하!"

그렇다. 해독제는 완성됐다.

독일 제약 업계에서 처음으로 감염시간을 늘리는 베이스를 개발해 냈고, 그 위에 알케미아의 진보라와 정서진이 밤을 새워가며 해독제를 완성시켰다.

해답은 '텔로스'의 암컷이었다. 세간에는 외형 때문에 아예 다른 종의 몬스터로 알려져 있었지만, 마탑의 몬스터 도감에는 온갖 몬스터의 생리가 다 담겨 있다.

암컷의 존재를 알아낸 정서진은, 면역성이 떨어지는 어린 새끼들이 감염독에 중독됐을 때 텔로스 암컷이 사용하는 타액으로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힌트를 얻었다.

마인들이 굳이 많은 수고를 들여서 해독제를 연구 개발했다는 점을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텔로스의 수컷에 더불어 암컷도 있으니까 덤으로 하나 손쉽게 만들어진 느낌이다.

해독제가 때맞추어 완성됐다는 정서진의 연락을 들은 유신은 바로 움직였다.

첫 번째 해독제는 진보라에게 마시게 하고, 두 번째 해독제는 샴에게 보내주었다.

샴의 조카는 완치되었고, 그녀는 알베르의 뒤통수를 치는데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르첼로와 성기사단은 처음부터 유신과 같이 싸울 생각이었지만, 해독제 개발이 완성 단계에 이르자 알베르에게 협력하는 척하라고 해놓고 뒤통수를 때릴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에아. 이제 메일을 보내도 돼.'

-알겠습니다.

이제 전 세계의 신뢰를 얻어놓은 오라클을 동원한다.

세계 연맹, 각국 정부, 주요 제약업체에 비밀리에 해독제 레시피가 담긴 메일이 보내진다.

감염 약물이 손쉽게 양산이 가능했던 만큼, 해독제를 만드는 것도 쉽다. 각국 업계는 준비가 되어 있고 빠르게 양산 준비를 마쳐 피해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우리의 추적을 피하느라 세계에 고립되어 있던 알베르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후우우우."

유신이 두 팔을 벌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가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시 상황은 4:1.

완벽하게 공인 1급을 속여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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