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44화
유령대가 재앙을 클리어하고 본부로 복귀하자마자 사건이 발생했다.
사자선단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초대형 몬스터 쉘터를 이끌고 멕시코 해안에 나타났다. 유령대의 본거지가 있는 '유카탄'의 바로 근처였다.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유령대는 여독을 풀시간도 없이 출동했고, 이내 양측 헌터들이 뒤엉킨 전투가 펼쳐졌다.
"닥치는 대로 죽여!"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유령대와 사자선단의 전쟁.
같은 세계길드지만 그들이 보유한 이계유적의 성향상 전투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사자선단의 헌터들은 '갑각화'라는 고유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몸 일부를 갑각류나 어패류처럼 변화시켜서 싸우는데, 헌터들마다 능력의 스타일과 활용도가 천차만별이었다.
샴에 의해 강도 높은 훈련을 거친 사자선단은 철저히 포지션을 구성해서 들어왔다.
전방의 헌터들은 갑각화시킨 팔을 방패처럼 바닥에 박은 채 전진했고, 그 뒤의 화력 담당 헌터들은 갑각화한 팔에서 물대포들을 쏟아냈다.
콘크리트 건물 정도는 가뿐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이었다.
물대포 외에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촉수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헌터, 온몸에 가시가 튀어나오는 헌터 등 같은 갑각화 능력이라도 가지각색의 개성을 뽐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철저한 지휘 아래 원 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에, 유령대의 헌터들은 그런 포지션 구성에 얽매이지 않았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난전을 유도하며 자유롭게 싸우고 있었다.
이들의 능력은 '유령화'.
신체의 일부를 유령처럼 바꾸어잠시 동안 모든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유령화 능력자들은 마나를 잃는 대신 '소울오러'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일반 마력이 플러스라면 소울오러는 마이너스, 닿는 마력을 모조리 태워 버리는 효과가 있다.
일반인은 이 소울오러에 닿아도 아무렇지 않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유령대는 소울오러를 한 지점에 집중적으로 퍼부어 사자선단의 포지션을 깨뜨린 후, 난전으로 몰고 가는 스타일을 구사했다.
깨뜨리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
양측 모두 살벌하게 싸웠다.
다만 유령대 측은 대재앙을 한 번 치르고 온 뒤라 피로가 쌓여 있는 상태, 장기전이 되면 불리하다는 점은 명백했다.
유령대 측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초장부터 매섭게 몰아붙였다. 먼저 전쟁을 걸어온 사자선단 측은 방어에 집중하며 승기를 굳혀 나가려 했다.
쿠쿠쿠쿠쿠쿠궁!
"피해!"
그러나 전세를 단번에 뒤바꾸는 존재가 나타났다.
소라 괴물 '쉘터'가 거대한 팔을 휘두르자 유령대의 헌터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공격 한 번 한 번에 주변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뭐, 뭐 이리 커?"
"겁먹지 마! 저 괴물을 집중 공격해!"
유령대 측 헌터들이 소울오러를 탄환과 화살의 형태로 쏟아부었지만, 쉘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덩치만큼 마나 보유량이 거대해서 어지간히 마력을 태워도 멀쩡히 움직였다.
"발사!"
그리고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중갑차에 올라탄 사자선단의 헌터들이 화력을 퍼부었다.
쏴아아아아아!
괴물의 등껍질 위에서 물대포와 디바이스 화력이 쏟아지고, 유령화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공인 5~4급의 유령대 헌터들은 속수무책으로 휘말린다. 3급의 에이스급들도 회피에 급급했다.
"좋아! 이대로 놈들의 심장부까지 들어간다!"
쿵쿵쿵! 쿵쿵쿵!
저 거대 괴물의 돌진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저건 또 뭐야?"
하늘을 회색빛 유령들이 뒤덮었다.
눈구덩이만 툭툭 꺼져 있는 이미 스터리한 회색 투사체는 알 수 없는 궤적으로 하늘을 유영하다가 한 순간 방향을 틀어 쉘터에게 부딪혔다.
-키이이이이이!
유령이 쉘터의 몸에 닿자, 뜨거운 냄비에 물을 부은 것처럼 연기가 솟구쳤다. 괴수가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다.
"우와악!"
"이 녀석 왜 이래?"
껍데기 위에 올라타 있던 헌터들은 괴수의 발버둥에 떨어지거나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고 매달려야 했다.
"멈춰. 침입자들."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헌터들은 고개를 들었다.
잿빛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는 아까 쉘터에게 날렸던 회색 유령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를 본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유, 유령왕이다!"
공인 2급 '유령왕' 마리 골드.
그녀 팔을 뻗자 무수히 많은 유령들이 춤을 추며 날아갔다.
이 회색 투사체는 소울오러의 극단적 집약체다.
이에 대응하는 선단의 헌터들은 갑각화된 방패를 세우거나 물대포를 날렸다.
"……!"
그러나 유령에 닿은 물대포는 연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 유령의 돌파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갑각화 방패를 들어도 소용없었다.
유령은 그대로 방패를 통과해 상대의 몸에 직접 닿았고, 온몸에 연기가 피어오른 헌터들은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하거나 전장 한복판에 축 늘어져 버렸다.
닿는 즉시 모든 마나를 증발시키는 힘.
소울오러 이하의 마나량을 가진 플레이어들은 마나 고갈로 즉각 무력화되며 거의 일주일간 손가락 하나까딱 못하게 된다. 심할 경우엔 쇼크사까지 이른다.
그리고 지금의 마리는 쇼크사도 상관없다는 듯 소울오러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헌팅 디바이스는 통하지 않아! 마력 무기 말고 일반 소총으로 쏴!"
"본체를 노려!"
몇몇 헌터들이 유령대와의 전투를 위해 준비해 놓은 재래식 소총 등을 꺼내 사격했지만 이번에는 총알들이 그녀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그녀는 지금 유령화 상태였다.
"……이, 이런 걸 어떻게 이기란 거야?"
마력 공격은 증발되어 버리고, 물리 공격은 그냥 통과한다.
사실상 무적과도 같은 힘을 휘두르는 공인 2급 헌터의 등장에 전황은 반전되었다.
저 거대한 쉘터마저 몇 대 얻어맞고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감히 마리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여전하군. 유령왕."
그러자 사자선단에서도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쉘터 괴수의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복을 입은 백발의 여인. 마리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샴!"
"이렇게 자네와 전장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왜 우릴 배신한 거지?"
마리의 물음에, 샴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필요한 일이니까."
샴은 그렇게만 말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도 쉘터와 마찬가지로 등이 갑각화되며 소라 등껍질을 짊어지게 됐다.
"샤아아아암!"
마리가 격노하며 팔을 뻗자 회색유령들이 쏟아져 내린다.
동시에 샴의 소라 내부에서 여섯발의 물줄기들이 쏘아져 나간다.
콰아아아아아악!
유령과 물줄기가 닿자, 유령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완전히 소멸되었다.
"소울오러 능력자를 상대로는 어떤 공략도 무의미하지. 정직한 힘 싸움이 전부다."
소울오러가 마이너스라면 마나는 플러스.
두 힘이 부딪혀 0이 되어 소멸할때까지 화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하겠네."
샴이 좀 더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가 짊어진 뿔소라 등껍질이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샴이 무게를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대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등껍질이 바닥에 닿고, 그것으로 모자라 더 커져 나간다.
마치 증식. 등껍질 옆에 등껍질이 붙어 나오고, 그 등껍질에 또 다른 등껍질이 붙어 나왔다.
하늘로 향한 소라 포대의 수만 70문(門)을 넘어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이 모든 포문에서 물대포들이 발사된다. 마리도 지지 않고 유령들을 날려 보냈다.
물대포를 틀어막으며 전진해 나가던 유령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소멸해 버리고, 그대로 마리를 향해 날아갔다.
"윽!"
마리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물대포들을 피해냈다.
"많이 지쳤구나. 마리."
샴이 중얼거렸다.
결국 마리는 힘 싸움을 포기하고 공중에서의 회피 일관으로 돌아섰다. 샴도 물대포를 멈추고 공격에 변화를 주었다.
꾸드드드드드득!
이번엔 뿔소라의 안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촉수들이 일어난다.
빨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문어촉수 수백 개가 샴에게서 솟구쳐 나오자 헌터들은 그 괴기함에 어깨를 떨었다.
촤아아아아악!
촉수들이 하늘로 뻗어져 나가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마리는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속비행하며 촉수를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급박한 순간에는 유령을 손에서 만들어 발사했지만, 촉수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리는 정도에서 그쳤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대장을 구해!"
유령대의 헌터들이 뛰어들었다.
"제독님을 방해하게 두지 마라!"
"전부 나가!"
두 세력의 헌터들이 다시 한번격돌하려는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난데 없이 허공에 펼쳐지는 화염과 폭발에 마리는 뒤로 물러섰고, 그녀를 쫓던 촉수들도 불길에 물러섰다.
"뭐야?"
"누군가 있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마리와 샴의 촉수들 사이로, 청색의 마력날개를 펼친 헌터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자, 그만."
다름 아닌 '여섯 번째 세계길드' 의 유력자, 마탑주 김유신.
"같은 세계길드끼리 이게 뭔 짓입니까? 다짜고짜 싸울 게 아니라 대화를 해봐요."
공중에서 숨을 헐떡이던 마리가 유신을 보았다.
"김유신……?"
"방해하지 말게. 마탑주."
샴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네와는 싸우고 싶지 않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독."
유신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보다 저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요?"
"……."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다."
유신은 묘한 표정으로 오른쪽 눈썹을 긁었다.
"그래요 뭐. 그쪽의 최우선 목표가 조카와 부하들의 목숨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뜬금없이 왜 유령대를 공격하는 겁니까?"
"자네가 알 필요 없는 문제일세. 거기서 비키게!"
"……음."
아직 세계길드도 뭣도 아닌 유신에게 두 세력의 전쟁에 끼어들 권리는 없고, 명분도 없다. 최선은 지금 이 중립 포지션에서 싸움을 말리는 정도가 최선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없지.
"마리."
유신은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잿빛드레스의 소녀를 보았다.
"나 멕시코에 오자마자 미친 듯이 일했다? 카르텔에게 공격받는 너희 유령대들을 구했고, 내친김에 마약왕 알바레즈까지 잡았어."
"……알바레즈?"
마리의 눈이 커졌다.
"만약 내가 이번 일까지 도와준다면, 약속해. 유령대 전체가 무조건 나서서 내 부탁을 세 가지 들어줄 것."
"……."
마리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무수한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보기 힘들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유신을 보았다.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우릴 도와줘."
"오케이, 계약 성립."
유신이 다시 몸을 돌려 샴을 바라보았다.
"이쪽에 붙기로 했습니다. 불만 없죠?"
"없네."
샴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녀로서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유신이 오른팔을 뻗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커다란 마법진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그의 손바닥 앞에 펼쳐졌다.
"2:1로 붙어볼래요? 아님 꼬리 말고 꺼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