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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237화 (237/337)

나 혼자만 마탑주 237화

"천공성주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계획이었겠죠."

찻잔에 감염 약물이 검출됐다는 보고서를 내려놓은 정서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탑주님이 차를 마시지 않아도 본전이고, 마신다면 계획에 가장 거슬리는 헌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요."

"맞아."

차에 든 약품 성분을 내가 당장 분석할 수도 없으니까 밑져야 본전이었으리라.

하지만 자기가 떡하니 보는 앞에서 차를 빼돌릴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으으으, 그건 그렇다 치고 이걸로 한 가지 의문이 풀렸네."

"어떤 의문 말씀이십니까?"

"알베르가 내게 몰타 재앙을 맡긴 이유 말이야."

연맹 본부에서 알베르는 내가 처치한 200명의 마인 리스트를 확인했다. 거기서 그는 '그린케어'에서 일하는 마인들의 이름을 봤을 것이다.

그는 내가 이 마인들을 수사하지 못하도록 묶어둬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세계길드 찬성표를 미끼로 내게 재앙 하나를 떠맡겨 버렸다.

만약 대서재에서 이 재앙이 별거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도 재앙의 클리어 조건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베르. 대단히 용의주도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는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합니다."

정서진이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첫째, 천공성주는 마인이다."

"……."

나와 사미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둘째, 천공성주는 마인에게 모종의 이유로 협력하고 있는 인간이다. 어느 쪽이든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고, 인류는 강대한 아군 하나를 적으로 돌리게 됐군요."

"최악의 상황이군."

사미아가 한숨을 쉬었다.

"탑주."

그때 빛무리와 함께 에아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사자선단 측의 좌표를 제공받았습니다. 가실 시간입니다."

"응, 알았어."

내가 몸을 일으키며 사미아를 바라보았다.

"부탁드려요. 사미아."

"그러지. 바로워프를 준비하겠다."

5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녀는 잠시 붕대로 둘둘 감싼 내 상체를 바라보았다.

"부디 이번 세계길드 방문은 무사히 돌아와 줬으면 좋겠구나."

"하하! 이번엔 정말로 별일 없을 거예요."

음, 아마도.

* * *

나는 포탈을 통과해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들어오자마자 한 무리의 헌터들이 내게 총을 겨누고 있다.

"경계 중지. 오시기로 한 손님이 맞습니다."

해군 제복을 차려 입은 헌터가 정지 사인을 보내자, 헌터들은 절도 있게 총을 내렸다. 그러곤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기동요새 '쉘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유신 헌터님. 저는 기관장 벤저민이라고 합니다."

벤저민이 똑같은 자세로 내게 인사했다. 나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근무 고생 많으시네요."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제독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기하다. 내가 지금 그 소라괴물 안에 들어와 있는 거 맞지?'

소라 껍데기의 겉이 투명해서 바깥의 광경을 안에서 볼 수 있었다.

바닷속에서 줄무늬 물고기들이 살랑 살랑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바닥에는 이계의 해초들이 물살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색다른 풍경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벤저민은 무전기를 들고 어딘가로 보고하는 중이었다.

"여기는 벤저민. 마탑주님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카피.

벤저민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기동요새 쉘터가 움직였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데 정말 빠르다. 바깥의 경치도 슝슝 지나가는 느낌이다.

"멋지네요."

내가 감상을 말하자, 벤저민이 싱글벙글 웃었다.

"처음 쉘터에 방문한 사람들은 다 비슷한 반응이죠."

"이 괴수…… 아니, 몬스터…… 아니, 이 함선도 정말로 이계의 유적인가요?"

"하하하! 정확히는 쉘터의 체내에 이 몬스터를 조종하는 유적을 심어뒀습니다."

쟤들도 그냥 몬스터라고 하는구나.

"심어뒀다는 말씀은…… 그럼 그유적을 다른 갑각류 몬스터에 갈아끼울 수도 있겠네요?"

"물론이죠. 저희도 벌써 세 번째 이사했습니다. 이번 쉘터는 개인적으론 오래갔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크고 온순한 몬스터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거든요."

나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며 벤저민과 함께 쉘터 내부를 걸었다.

기껏해야 소라 껍데기라고 생각했는데, 빨래방 헬스장 당구장 등등 온갖 편의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다.

진짜 함선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운행 중에 흔들리거나, 경사가 기울어진 곳이 많은 건 좀 불편했다. 껍질도 딱딱해서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팠다.

'역시 마탑만 한 곳이 없지.'

그래도 이런 곳에 와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쉘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 경기 봤어?"

"……죽고 싶으니까 말 시키지 마라."

"푸하하하! 배팅에 그만 꼬라박으라니까."

"저거 중독이야 중독."

잡담을 주고 받으며 시시덕거리는 사람들. 이제 보니 출신이나 인종이 다양했다.

묘지기는 100% 순수 이집트인, 천공성과 성기사단은 유럽계가 많았는데, 사자선단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바로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벤저민이 문을 열어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는 함장실로 들어갔다.

'오오.'

이곳 함장실의 벽은, 다른 곳보다 더 투명해서 뻥 뚫린 인상을 받았다.

바다가 사방에 쫙 펼쳐져 있다. 혹시 유리가 아닐까 싶어서 벽을 만져 보니 껍데기의 까끌까끌한 촉감이 느껴졌다.

항해사들이 홀로그램 자판을 두들기며 바쁘게 일하는 가운데, 함장실의 중간에 앉아 보고를 듣는 여인이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 세월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카리스마.

제독이라는 이명을 가진 헌터 '샴'이다. 그녀가 돌아보며 말했다.

"손님이 왔군."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또 뵙네요. 제독."

"거기 앉게."

우리는 테이블 하나를 놓고 마주앉게 되었다. 내가 바깥의 광경을 훑으며 말했다.

"경치 끝내주네요."

"천공성주가 해독제를 가지고 있단 이야기는 확실하겠지?"

천천히 분위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더니, 그녀는 바로 대화를 본론으로 끌고 갔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할 만큼 마음의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네. 제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 중, 해독제의 외형과 완전히 일치하는 약품을 천공성에서 발견했습니다. 심지어 양산 중이었죠."

사실 마셔보지 않는 이상 해독제인지 아닌지 100%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어중간하게 말하기에는, 샴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했다.

사자선단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제가 천공성에서 해독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자 알베르는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뻔한 상황 아닐까요?"

"믿을 수 없구나."

그녀가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천공성주가 이번 사태의 흑막이었다니……"

"여러 정황들이 천공성주를 가리키고 있는 건 사실이죠."

그녀는 인상을 쓴 채 한숨을 푹 쉬었다.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독께서도 감기약을 복용하셨습니까?"

"나는 괜찮지만 선원 중에 복용자가 몇 명 있네. 그리고……"

그녀가 목에 매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눌렀다. 작은 여자아이의 사진이 나왔다.

"내 조카가 감기약을 먹었어."

"……아."

그녀는 펜던트를 소중하게 붙잡으며 눈을 꾹 감았다.

보통 조카 사진을 목걸이까지 해서 걸고 다니진 않는데, 무척 아끼는 조카인가 보다.

"자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네? 아, 아뇨. 그런 건……."

"사실 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네."

그녀는 펜던트를 붙잡은 채로 자신의 불임 사실을 덤덤히 이야기했다.

"무난자증으로 인공 수정마저도 불가능하다더군.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남편에게 이혼당했지."

"유, 유감입니다."

"그런 내게 유일한 빛이 바로 이아이야. 하늘은 이 아이에게 부모를 앗아갔지만…… 그 어떤 시련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지. 지금은 친척인 내가 아이를 거두어들여서 싱가포르에서 공부시키고 있네."

조카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정이 뚝뚝 묻어나 있었다.

"그러니까 마탑주."

그녀의 눈동자가 돌아가 나를 응시한다.

"부디 행동과 발언을 조심하게. 나는 자네의 체스말이 아니고, 이번 일도 장난으로 일으킨 게 아니야. 나는 진지하네.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 늙은 목숨 정도는 몇 번이고 내어줄 수 있어."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저도 진심입니다. 제 동료가 감기약을 복용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해독제를 탈취해야 합니다."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지는 것 같군."

그녀가 인상을 펴고 말을 이었다.

"천공성은 두 번의 '전이'를 사용했네. 몰타로 올 때 한 번, 도망칠때 한 번. 아마 다음 전이를 사용하려면 적어도 3주는 더 걸릴 게야."

"그 3주 안에 천공성을 찾아 내 박살 내야겠네요."

"그렇네. 사자선단의 이름 아래에 있는 모든 선사와 함대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찾고 있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마탑에서도 저희 나름대로 정보망을 돌리고 있습니다. 먼저 찾아내는 쪽이 알려주고, 다 함께 공격 날짜를 잡죠."

"그렇게 하지."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마탑과 사자선단의 동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묘지기와 성기사단, 유령대에도 연락해 봤나?"

샴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전부 끌어들이는 게 좋겠지. 상대는 공인 1급이야. 어떤 준비를 해도 부족함이 없네."

"예."

세계길드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마인 척살이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틀림없이 그린 케어의 피해자가 있을 테니 기꺼이 힘을 보태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세계길드는 그렇다 치고, 연맹을 어떻게 움직일지가 고민이군."

"제 생각엔 연맹은 아직입니다."

무려 세계길드의 핵심이자, 공인 1급 헌터가 속한 길드를 쳐내는 일이다. 연맹을 통째로 움직여 알베르를 배제하기엔 아직 증거가 부족하다.

"일단 우리가 알아낸 부분에 대해서만 어필하고, 천공성을 세계길드에서 쫓아내는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것만 해도 충분하겠지."

프랑스 정부가 넉넉히 'M10'을 확정 지은 가장 큰 이유는 천공성이라는 걸출한 세계길드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일로 천공성주가 이탈해버리면, 프랑스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자국 헌터들을 파견해 천공성을 지원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연맹을 움직이면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을 때였다.

"제독님!"

아까 나를 안내했던 벤저민이 함장실로 뛰어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연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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