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34화
"혹시 그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을까요?"
"……."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는 줄곧 무심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성주님."
그래서 나는 목소리에 더 감정을 실었다.
"세상이 난리가 났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억 단위의 사람들이 죽어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좋다."
침묵을 이어가던 알베르가 비로소고개를 끄덕였다.
"허가하지."
"……아!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허가를 받아냈다.
나는 안내원을 따라 알베르의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나를 5중의 잠금장치가 걸린 방 안으로 안내했다.
"드릴 수 있는 시간은 20분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안내원은 그렇게 말하곤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주위를 슥 훑어보았다.
보관 상태가 양호했다. 병에 든 액체나 서랍안에 든 문서들, 모두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배치까지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았다.
'준비됐지 에아?'
-네.
나는 제일 먼저 창고 안에 감시카메라가 있는 지부터 확인했다.
마침 천장에 한 대가 돌아가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 이 정도야 껌이다.
-카메라 해킹 완료. 우리 쪽에서 준비한 자료로 송출되도록 하겠습니다.
'나이스, 에아.'
감시장치를 무력화시킨 뒤, 나는 진열대에 보관된 병들을 꺼내 확인했다.
혼탁한 색깔에 점성 있는 액체. 바로 이거다.
"사미아."
마탑에 있는 사미아가 허공에 조그만 워프를 열었다.
나는 그것을 챙겨온 보호대에 둘둘 감싼다음 워프 안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약품을 대신 그자리에 두었다.
다음으로는 서류들을 펼쳐 살폈다.
[인간에 대한 감염 효과가 있는 언데드 몬스터 크롤로스의 타액을 다량 확보했다. H연구소로 운반.]
[실험체에 크롤로스의 타액을 소량투여했다. 감염 효과가 미미하다. 타액은 시간이 지나면 인체에 무해한 성분으로 바뀐다.]
[크롤로스의 타액에 CY 용액과 CI 용액을 섞어서 실험체에 투입한다.]
[실험자가 사망했다. CI 용액의 개선 필요성이 제기된다.]
…….
'이거 다 조작됐네.'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남극에서 본 자료는 '크롤로스'의 타액으로 만든 게 아니라 '텔로스'라는 몬스터의 타액이었다. 같은 감염계열 몬스터지만 종족 자체가 다르다.
만약 지금 전 세계의 제약계가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크롤로스의 타액을 분석하고 있었다면 제대로 헛발 짚은 셈이 된다.
'절묘하게 바꿔놨네.'
남들은 그러려니 넘어가겠지만, 이미 두 개의 연구소를 파괴한 나는 이 정보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유일한 인간이 아닐까 싶다.
-탑주. 해독제 분석 자료도 삭제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런 거짓 정보를 퍼뜨린 걸까? 자료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수상함이 가중된다.
현 상황만 놓고 보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천공성 아니면 세계 연맹이다.
제일 먼저 이 시설을 확보한 건 천공성이다. 그들이 빠르게 자료를 조작하고 연맹에 넘겼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엔 동기가 확실치 않다. 천공성주는 마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세계길드의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마인 사냥에 힘을 쓰는 인물이다.
두 번째 용의자는 세계 연맹. 연맹상위층에 마인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내 개인적으로는 믿고 있다.
연맹의 마인들은 연구소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신속히 자료를 확보한 다음, 중간에 자료를 조작해서 보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천공성주가 이 자료들을 다시 회수했을 때는 원본과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고.
'으으음…….'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어느쪽도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탑주.
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성 어딘가에 진짜 해독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것뿐이다.
나는 에아에게 플랜 B 작전 개시를 알렸다.
-김유신 헌터. 워프를 열겠다.
이어마이크에서 사미아의 목소리가 들린 뒤 잠시 후, 허공에 푸른 포탈이 열렸다.
사뿐한 걸음으로 그 안을 통과하니, 천공성의 새로운 장소에서 나타났다.
나는 목걸이를 붙잡고 '물의 장막'을 시전했다. 오자마자 나한테 냅다 검을 휘둘렀던, 가장 잘 기억나는 얼굴로.
변신을 마치고 문을 나서서 걸었다. 복도에는 천공성 길드원들이 쫙깔려 있었다.
"마탑주 김유신이 직접 왔다며?"
"그래."
"성주님과 면담하는 중이라나 봐."
"혹시 세계길드 합류 건과 관련해서 뇌물 공세?"
"그런 것치곤 너무 막무가내로 들어왔는데."
"지랄들을 한다. 세계길드는 다섯으로 충분해."
다 들린다, 이놈들아.
나는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며 걸었다.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경직되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발 말 걸지 마라. 제발 말 걸지마라.
"에런! 여기서 뭐 해?"
아 씁.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천공성의 여성 길드원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탑주한테 당했다며?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미리 코어 통역기를 조작해 목소리를 바꿔두긴 했는데, 되도록 말은 안 하고 싶다.
"못 살아! 그러니까 내가 상대를 보고 덤비라고 했지?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대뜸 내 얼굴을 만지려 팔을 뻗었다.
'윽, 만지는 건 안돼!'
나는 다급히 몸을 틀어서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는 대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몸이 아파서 쉬러 가려고."
"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렸어."
나는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고생이네. 감기약 꼭 챙겨 먹어."
"……."
심각해진 내 표정을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갈게."
나는 빠르게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이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저여자만 정세에 둔한 걸까?
"헤이! 에런!"
"오늘 당직 아니었냐?"
"저녁에 한 판 쳐야지."
사방에서 사람들이 자꾸 아는 척한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인기 많냐고!
나는 대충 대충 아프다는 핑계로 홀려 넘기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천공성은 다섯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슨 층에 뭐가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데바의 눈을 최대한으로 발동한 채 주위를 살폈다.
'여긴 창고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와인 저장고였다. 오크통째로 와인을 숙성시키고 있었다.
'여긴 아니고.'
다음 창고방에 들어갔다.
각종 헌팅 디바이스들이 보관된 방, 몬스터들의 자재가 보관된 방도 있었다. 하지만 어딜 가도 해독제로 보이는 건 찾지 못했다.
'더 위층으로 올라가야 하나?'
이놈의 성은 방이 너무 많다.
몇 시간은 여유 있게 뒤져야 할 것 같은데, 내겐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 계속 시간을 끌면 알베르가 의심할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리프부츠 마법진을 밟고 단번에 4층 난간으로 올라왔다.
여기도 마탑과 마찬가지로 1층이 넓고 5층이 좁았다. 5층은 아예 별개의 층처럼 되어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기둥 뒤에 등을 붙인 채 슬쩍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4층부터는 보안이 유난히 철저했다. 경비들이 각 방마다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들은 기존 길드원들과 복장부터가 다르다.
아무리 내가 지금 이쪽 길드원 차림이라도 이런 보안 구역을 돌아다녔다가는 추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데바의 눈을 최대한 활성화한 채 방들을 살폈다. 각종 서재나 문헌들이 보관된 방들이 보인다. 어떤 방은 로봇이나 기계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어, 잠깐만.'
기계들을 쌓아둔 방에서 내 시선이 고정된다.
어디서 많이 본 기계들인데.
나는 천천히 외형을 살폈다. 흰색으로 도색 된 기계의 몸에, 소름 끼칠 정도로 정밀한 사람의 얼굴, 그리고 등 뒤에 달린 날개까지.
꿈에서도 가끔 나오는 그것들.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탑주. 왜 그러십니까?
잠든 기억이 깨어나며 내 몸이 전율로 부르르 떨린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저건 틀림없이.
'……안드로이드.'
이렇게 멀리서 보는 거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꿈에서 나오는 것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이다.
심지어 저 중에는 이브를 지키는 '친위대'도 있었다.
마키나티오의 안드로이드가 왜 지구에 있는 거지?
여기 대체 뭐야?
나는 홀린 것처럼 그쪽으로 걸어갔다.
-탑주!
에아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본분을 망각하셔선 안 됩니다!
'……으.'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넘겼다. 두통이 치밀어 오르며 머리가 지끈거린다.
괜히 이상한 걸 봐버려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나는 안드로이드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참아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충격으로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집중하자, 집중.'
데바의 눈으로 꼼꼼히 방들을 뒤지 다 보니 결국 수확이 있었다.
몇 개방을 통째로 이어붙여서 자동화 공장을 돌리는 장소가 있었다.
그 기계는 유리병에 담긴 액체를 찍어내고 있었다.
-성분 분석은 불가능하지만, 데이터에 남아 있는 해독제의 외형과 90% 이상 흡사합니다.
'워프게이트로 몰래 몇 병 훔쳐올수 없을까?'
-해당 지점의 위치 정보 데이터가 없으므로 불가능합니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셔서 차원지기의 시야를 확보해야 합니다.
'끙, 그렇겠지.'
내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 그때였다.
-탐지 마법 감지! 돌발상황입니다!
안내원이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급해진 에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뒤이어 사미아의 목소리도 들린다.
-김유신 헌터. 바로 방으로 돌아가는 워프를 열겠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사미아가 열어준 워프게이트를 타고 원래 있던 방으로 넘어왔다.
"김유신 헌터님!"
거의 고함과도 같은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계십니까? 김유신 헌터님!"
스릉!
흥분한 안내원은 아예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아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는 Y-1! 비상사태다! 김유신이 사라졌……!"
"저기요."
나는 자리에 누운 채로 고개만 내밀어 손을 흔들었다.
이어마이크에 손을 올린 그녀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누워서 자료 보다가 잠깐 졸았네요. 요즘 일 때문에 통 잠을 못 자서."
내가 서류를 흔들며 웃었다.
그녀는 차게 식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쉬며 헌팅 디바이스를 거두었다.
"시간 다 됐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협조 감사해요. 아, 마지막으로……."
나는 상체를 일으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돌아가기 전에 성주님께 조사 결과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