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32화
내 협박에 막스 전무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갯짓 했다.
"제,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나는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누구 지시로?"
"저, 전부 부회장의 지시였습니다! 감염 약물을 가져온 건 그저 정부의 비밀 지시로 해독제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진짜로 마인들이 개입된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막스의 방진복과 상의를 벗도록 했다.
뒤이어 두 손을 머리 뒤에 올리게 하고 뒤를 돌도록 했다.
"가만히 있어요."
나는 그의 등에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겁에 질린 그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제가 마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마인들이 먼저 정체를 드러냈고 저를 습격했습니다. 맞죠?"
"마, 마, 마, 맞습니다."
"앞으로의 조사에서도 부디 현명한 처세를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부회장 말고 더 알고 있는 건? 배후에 누가 있어요?"
"모릅니다! 정말 입니다! 진짜 알고 있는 건 다 말했습니다!"
나는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도 좋아요."
그 말에 막스가 도망치듯 계단으로 뛰어갔다. 정서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심한 거 아닙니까?"
"저거 그냥 아무 효과도 없는 수식마법진이야."
나는 손뼉을 가볍게 털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네, 연맹 본부죠? 저는 김유신 2급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연맹 통신부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김유신 헌터님.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제가 월척을 낚은 것 같아서요."
* * *
나와 멤버들은 그린케어의 연구시설을 장악했다.
이곳에서 튀어나온 마인들의 숫자만 100여 명이 넘어갔다. 우리는 새하얀 바닥이 붉게 물들 때까지 싸웠고, 잠시 후 경찰들과 독일 협회의 헌터텀이 파견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나는 독일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됐다.
외국인이 자국 기업을 공격했다는 점은 자칫 외교적 마찰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공인 2급이라는 지휘와 마인 사태의 급박함 때문에 혐의없음으로 풀려났다.
막스도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원흉이던 그린케어의 부회장과 관련 임원들은 모두 체포되어 경찰에 넘겨졌다.
부회장은 경찰차에서 운송되던 중 마인으로 변해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이렇게 이번 일도 잘 풀릴 줄만 알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그린케어는 인간을 몬스터로 변이하는 약품을 그린케어의 상품에 함유하여 전 세계로 퍼뜨린 뒤였다.
연맹에서는 즉시 이 사실을 각국 정부에 알렸고, 정부에서는 그린케어 상품의 판매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많은 그린케어 상품들이 팔려나갔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을까?
나와 멤버들은 다시 마탑으로 복귀했다.
"그린케어 상품이 생각보다 많네요."
나와 사미아, 4층팀은 정서진의 노트북 주위를 둘러싼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 이 립밤! 자주 쓰던 건데!"
"뷰티케어 상품도 많네요. 이쪽 브랜드는 독일제라 비싸서 잘 안 쓰긴 했는데…… 엄청 유명한 거예요."
그린케어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브랜드만 세 개였다. 피해자가 상당할 것 같았다.
"그럼 마인들은 어떤 제품에 약을 포함시킨 거지?"
내 물음에 정서진이 대답했다.
"감염 약물은 섭취를 통해 효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밴드, 접착제, 뷰티케어 용품들은 제외하겠습니다. 제약 쪽을 보면…… 사실 그린케어는 선두 업체에 밀려서 국내든 국외든 점점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는 추세였습니다."
"그건 불행 중 다행이네."
"하지만 단 하나, 수십 년 동안 확고히 전 세계 1위를 유지하던 제품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정서진이 굳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감기약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보라! 진보라 지금 어딨어?"
나는 서둘러 진보라가 있는 1층의 침실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우당탕탕!
너무 급하게 넘어오느라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근처의 의자 손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머, 선배님?"
마스크를 쓴 그녀는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든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심각한 표정의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뭐예요? 무슨 일 있어요?"
나는 성큼성큼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물이 조금 남은 빈 컵과 포장지가 뜯어져 있는 감기약이 보인다.
나는 포장지 아래에 보이는 제약회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망할."
이가 빠득 갈렸다.
* * *
각국 정부에서는 그린케어 상품들을 즉각 판매 중지 조치 내리고 전량 회수하도록 명령했을 뿐, 그 이유를 확실히 밝히지는 않았다.
상황의 파급력을 우려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갑자기 '당신들 좀 있으면 몬스터가 되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하고 국민들에게 공표해 버리면, 두말할 것도 없이 큰 혼란이 일어날 테니까 말이다.
일단은 해당 기업의 약품에서 심각한 유해물질이 발견됐다. 딱 그 정도만 알렸다.
그러나 소문은 빨랐다. 이미 그린 케어의 감기약에 몬스터가 되는 약물이 들어 있단 루머가 전 세계에 흉흉하게 퍼졌다.
사실상 세계 연맹과 각국 정부는 그 루머를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연맹의 발표보다 한발 앞서 선수를 친 집단이 있었다.
[우리는 GOT.]
눈구덩이 두 개만 뚫린 옷을 뒤집어쓴 남자들이 이번 일의 배후임을 자처하며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다.
[그린케어 약품에 몬스터화 약물을 넣은 건 우리다. 현재는 잠복 단계지만 이제 곧 몸 곳곳에 혈관이 검게 변색되어 도드라질 것이다. 이후에는 서서히 몬스터로 변한다.]
[하지만 안심해라. 우리는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수단일 뿐,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우리의 지시를 이행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해독제를 제공하고 성분 또한 공개하여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다.]
GOT의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로 '세계 헌터 연맹'의 폐지.
지구를 지킨다는 세계 연맹이 사실은 악의 원천이며, 그 실체는 비용을 많이 지불하는 강대국들만 지키는 허수아비라고 GOT는 주장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구 사항들이 있었다.
전 세계의 핵무기 폐지, 대형 기업들의 세금 면제 혜택 제거, 인종 차별 범죄의 형량 극단적 강화, 히잡제도 삭제, 동성애 합법화 등등.
인종, 종교, 성차별, 빈부 격차 등 민감한 사안들을 집어넣음으로써 세계 헌터 연맹의 폐지 같은 안건을 뒤로 미루고 합리화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이것이 GOT의 명분.
이 세계의 기득권자들을 적으로서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났다.
'어처구니가 없네.'
이래서 마인이 싫다. 수억 명을 인질로 삼고 자유와 평화를 운운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역겹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전체적인 여론도 나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들 GOT를 맹비난하고 있다.
뒤에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사미아가 말했다.
"대중도 바보가 아니야. 여론이 분열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 같군."
"글쎄요."
나는 그 의견에는 회의적이었다.
지금이야 뭐, GOT가 벌인 당혹스러운 일에 즉각적인 거부 반응이 튀어나오는 게 맞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말한 검은 혈관이 도드라지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지면 어떨까?
그리고 나 자신이나 가족, 친구가 이런 끔찍한 일에 휘말렸다면?
GOT로 쏠려 있는 원망이 GOT와 협상하지 않는 연맹과 세계로 조금씩 쏠려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GOT가 조건으로 건 문제들. 괜히 수십 세기 넘게 생존해 온 인류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논란들이 아니다.
인류가 분열되면 분열될수록 마인들에게 유리해진다. 그래서 마인들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GOT'라는 이상한 조직으로 전면에 나온 걸 테고 말이다.
역시 영리하다.
"일단은 해독제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겠구나."
"그러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감기약이라니.
그린케어의 감기약은 시장 점유율1위,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다.
이전의 감기약이 진통제 성분에 비타민이 조금 들어가 있는 정도라면, 그린케어의 감기약은 감기 증상을 직접 치료한다는 점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히트 상품이 됐다.
그리고 겨울인 지금, 재앙으로 인한 이상기후가 극성이다. 그린케어의 감기약을 먹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진보라를 바라보았다. 우리들 중 유일한 피해자인 그녀는 은솔과 놀아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짠! 여기 있지롱!"
"언니야 신기해! 어떻게 한 고야?"
쟤는 뭐 걱정도 안 되나……. 은근히 강철 멘탈이다.
그때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했다.
"전 괜찮아요. 선배님.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녀가 손목에 멘 풀팔찌를 꼭 붙잡으며 웃었다.
"……."
갑자기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간다.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사미아는 다시 9층으로 넘어왔다.
"에아."
"네, 탑주."
그녀가 허공에서 나타나 부름에 응답했다.
"혹시 그린케어에 해독제 같은 건 없었어?"
"없었습니다. 그린케어는 감염 약물을 개발해 감기약에 섞는 작업만 맡았을 뿐입니다."
"……음."
해독제의 존재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확인했다.
예전에 마인들의 북극 연구소를 털었을 때, 에아는 메인 컴퓨터 해킹을 시도했다.
해킹 중간에 EMP디바이스가 터져서 끊겼지만, 몇몇 중요 데이터는 에아가 직접 기억하고 있었다. 해독제의 존재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마인들이 해독제를 개발했다고 한들, 순순히 사람들에게 제공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GOT처럼 이것을 대가로 인류를 흔들어 놓을 심산이었겠지.
몇억 명을 죽이는 것으로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독약의 존재는 마인들에게 다채로운 전략들을 구사하도록 도와준다.
누군가에게는 해독제를 제공하고, 누군가에게는 제공하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 둔다.
인간들 간의 갈등을 격화시키면서 전쟁을 부추기고 논란을 일으켜 인류의 결속을 찢어버릴 수 있다면?
그렇다-. 마인들의 진정한 목적은 이쪽이리라.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파괴했던 세 개의 마인 연구소.
그중 두 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마지막 하나,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된 연구소는 천공성주가 피해 없이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내가 원하는 해독제의 데이터도 그쪽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에아. 아이슬란드 연구소의 데이터들은 어떻게 됐어?"
이미 알아본 내용인지, 에아는 척척 대답했다.
"자료의 소유권은 현장을 장악한 프랑스 정부에 있었습니다. 이후 연맹에서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받아 자료들을 복사해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본은 연구소에 남아 있을 겁니다."
남들처럼 연맹에서 해독제를 만들어 줄 때까지 믿고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움직이자."
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감염 몬스터의 성분으로 만든 약물이잖아. 마탑의 조제기술이면 이쪽에서도 독자적인 해독제를 만들수 있을지도 몰라."
"해볼 만하군요."
정서진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지금 바로 관련 자료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알케미아에서도 TF팀을 신설하고 해독제 연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사미아. 아직 워프게이트 잔고 좀 남았죠?"
"정말로 그대는 5층을 거덜 낼 생각이로군."
"죄,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분별없이 워프를 쓰긴 했네요."
사미아는 농담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낫겠지. 다음엔 어디로 갈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