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30화
나는 지중해 요리를 좋아한다.
외국에서도 한식만 찾는 전형적인 아저씨 입맛이긴 하지만, 지중해 요리 만큼은 내게 있어서 각별하다.
떠올려 보라.
따스한 푸른 연안에서 나오는 질 좋은 생선들과, 초록색 노란색 보라색 알록달록한 여름 야채들, 그리고 올리브, 올리브, 올리브!
지중해 음식만의 감성이 있다.
자극적인 소스 범벅이 아니라,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심플한 맛을 내는 이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내 앞의 접시에는 반듯한 생선구이가 놓여 있다.
노릇하게 구워진 표면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속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댕댕흐b다.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서 먹어본다.
음, 소스는 살모리그리오인가.
톡톡 튀는 레몬 향과 톡 쏘는 오레가노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아주 좋다.
다음은 봉골레 스파게티.
듬뿍 올라간 바지락 사이로 파르메산 치즈와 루콜라, 그리고 올리브를 두른 파스타 면이 황금의 빛깔을 내고 있다.
이것도 바로 한 젓가락…….
으으음, 역시 좋다! 지중해식답게 조개 육수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한국의 싸구려 뷔페에서 먹던 그 조개탕면 맛 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음은 새우가 듬뿍 들어간 감바스와 병아리콩을 튀긴 후무스가 남아 있다. 뭐부터 먹어볼…….
"대표님 음식에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에요! 갑니다아아!"
차도연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신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이런 젠장.
나는 빠르게 팔을 휘저으며 인트로에 참가한 다음 '이미지 게임!' 을 외치며 손가락을 다섯 개 펼쳤다.
"5서클 미만 접어!"
"우왁! 대표님 치사해!"
"안경 낀 사람 접어!"
"조용희 씨! 지금 안경 벗기 없어요!"
곳곳에서 정신없는 웃음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모쏠 접어! 어, 대표님 왜 안 접으세요?"
"아니,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자산 100억 이상 접어!"
"오디다스 티 입은 사람 접어!"
"마탑주 접어!"
아 씨, 너무 하네, 진짜!
순식간에 손가락 다섯 개가 다 넘어 갔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나는 근처에 있는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원샷했다.
콜라가 목 아래로 질질 흘렀지만 사방에서 환호하는 목소리에 전부 다 마셔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빈 병을 내려놓은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쪽 팔을 들었다.
"자, 바로 다음 게임…… 어머, 대표님. 왜 그러세요?"
"목 막히셨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 잠깐…… 현타 왔어요. 잠깐만……!"
"꺄하하하하!"
정신을 차리고야 말았다.
술 없는 술 게임이라니…… 다들 분위기에 심취해 버렸지만 나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다.
"스승님!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정신을 잃는 놈이 잘 노는 놈입니다!"
사각팬티 하나만 남은 나대용이 말했다. 아저씨는 너무 정신을 잃어서 문제야.
"전 이제 그만 올라 가볼게요"
"앗, 치사해!"
"우우우!"
4층팀이 야유를 보냈다. 이 사람들 너무 텐션 올라서 내가 감당이 안되네.
"죄송해요. 여러분도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들어가요."
"네!"
몰타 공화국에 들어온 지적지 않은 시간이 홀렀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이유?
그냥 너무 심심해서.
우리는 모든 걸 끝냈다. 봉마의 씨앗을 위협하는 요소는 이제 없고, 몬스터들도 은솔의 골렘과 포탑 선에서 대부분 정리된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66일을 버터야 하는 걸까? 오죽 심심했으면 마탑에서 술 없는 술 게임중이겠냐고.
"으으, 피곤하다."
4층팀은 다음 게임을 속행하고 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지중해 요리 중에서 치즈를 올린 포카치아를 챙겨 들고는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탔다.
제2층, 대서재.
여긴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된다. 그야말로 책의 숲. 벽을 보나 천장을 보나 온통 책들로 가득하다.
나는 정서진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이 근처에는 안 보여서 계단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오래된 책들이 나온다.
누렇게 변색 됐거나, 표면이 타들어가서 너덜너덜해진 것들도 있다. 그나마 책장마다 걸려 있는 보존 마법 덕분에 최선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얘는 대체 어디까지 들어간 거야?'
계단을 타고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들어온 나는 마침내 대서재에서 가장 보안 레벨이 높은 '봉인된 서재' 까지 도착했다.
바로 이 서재에 있었던 '멸망의 기록'이라는 책에서 11랭크 네메시스에 대해서 알게 됐었지.
정서진은 여기에 있었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들을 쫙 펼쳐놓고 읽고 있었다.
장난이 치고 싶어진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말했다.
"서진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
정서진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새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선입견이 없다고 자부했었습니다만, 그 게임만큼은 못하겠습니다."
"푸하하하하!"
나는 용기에 담긴 잘 구워진 포카치아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 좀 먹고 해. 저녁도 걸렀으면서."
"아, 감사합니다."
정서진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포카치아를 집어서 한입 베어먹었다. 그의 눈이 금세 동그랗게 변했다.
"이 집 포카치아 잘 하네요."
"그렇지? 이 동네요리는 어딜 가든 평타는 치더라."
"랜덤게임 끝나면 밥 먹으러 내려가겠습니다."
"4층팀 애들 온종일 로비에서 놀 기세던데?"
정서진이 끙 소리를 내며 기둥에 뒷머리를 댔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나는 소리 내어 킬킬댔다.
"읏차."
적당히 정서진의 옆자리에 퍼질러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벌써 세 개나 열었네."
봉인된 서재의 잠금은 암호 퍼즐로 이루어져 있어서, 특정 지식을 확보하지 않으면 열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정서진은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세 개를 풀었다.
"아르민 발터는 잘 있을까?"
"네.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아르민 발터가 아니겠지만요."
생각난 김에, 나는 첫 번째 봉인된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이 커다란 방에 보관된 건 고작 여섯 권의 책들뿐이다. 위험하거나 오래된 책들이라 봉인 마법진 위에서 보관 중이다.
그중에서는 책이 아닌, 돌멩이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한국에 몰래 숨어들어 왔던 연쇄살인마, '아르민 발터'.
한윤정이 파라오가 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영혼을 옮기는 고유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였다. 나와의 정면승부에서 패배한 녀석은, 죽은 척하려는 의도였는지 몰래 바닥의 돌멩이에 영혼을 옮겼다. 물론 바로 내게 발각되어 회수당했다.
지금은 이 대서재에서 보관하고 있다.
"에렌델의 영혼학에 따르면, 육체가 없는 영혼이 오랜 시간 방치되면 자연 상태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정서진이 말했다.
"지금 아르민 발터라는 존재는 사실상 지워졌다고 봐야겠죠. 이 돌에 들어 있는 건 거의 순수한 영혼 덩어리일 뿐입니다. 에렌델에서는 이걸 영혼석이라고 부르죠."
"흐음."
나는 물끄러미 그 돌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이걸 써서 암흑 마법 하나를 재현해 보려고 하거든?"
"예?"
정서진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혹시 그 인간을 타이탄으로 만드는……"
"아니, 아니, 그런 위험한 거 말고!"
나는 칼같이 X자를 그리며 부정했다. 정서진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럼 어떤 마법입니까?"
"음,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말했다.
"부활 마법? 이라고 해둘게."
정서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정서진이랑 놀다가 다시 9층으로 복귀했다.
내 책상에는 마인 관련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의자에 앉아서 에아가 놓아둔 비타민 음료를 하나원샷 하고는, 다시 조사에 들어갔다.
나는 지금 마탑을 공격했던 마인들의 과거를 캐고 있다.
마인들의 직업은 회사원부터 시작해서 학생이나 배우, 군인까지 정말 다양했다. 신분도 확실하게 세탁해서 다녔기에, 먼저 몬스터로 변하지 않는 이상 찾아 내기 힘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눈에 띄는 공통점이 없었기에, 나는 실낱같은 공통점이라도 찾으려 애를 썼다.
볼펜을 질겅질겅 씹으며 리스트에 체크 표시를 했다.
"역시 걸리는 건 같은 기업을 다니던 마인들."
마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알고 지내왔다. 그들이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탑주, 결과가 나왔습니다."
환한 빛무리와 함께, 에아가 내 책상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도 계속 마인들의 과거 행적을 캐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그린케어라는 기업에 여섯 명의 마인이 일했던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오! 이건 좀 냄새가 나는데?"
무려 여섯 명의 마인이 얽힌 기업이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뭐 하는 회사야?"
"독일의 제약업체입니다. 글로벌 기업 50위권, 독일 제약회사 가운데 2위를 차지하는 탄탄한 기입입니다."
독일이라면 제약 분야의 초강국이다. 거기서 2위라면 대단하네.
"조사해 볼 만한 가치는 있겠어."
에아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린케어를 해킹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시간이 걸리겠지만 해보겠습니다."
"부탁해. 나는 바로 독일로 갈게."
에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일에 가시는 건 좋습니다만, 거기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음, 그냥 부딪쳐 볼 생각이었는데 너무 생각 없나?"
세계길드가 되면 세계 어딜 가든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겠지만, 난 아직 후보일 뿐이라 그쪽 권한은 없다.
공인 2급 헌터라고 해도, 전장이 아닌 타국에서 수사권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제약회사의 연구시설이라면 경비는 장난이 아니게 삼엄할 터였다. 잠입도 어지간해선 힘들다고 봐야 한다.
"뭔가 괜찮은 건덕지 없을까……"
나는 스마트폰을 켜고 그린케어라는 기업을 검색해 보았다. 평소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던 소독약, 밴드, 파스 등 유명한 제품들 다수가 이 회사에서 나왔다.
"탑주. 아-하십시오."
내가 열심히 정보를 검색하고 있으려니, 에아가 포장즙을 입에 물려주었다. 그대로 쪽쪽 빨아 마셨다.
아니, 이 씁쓸한 해조류 맛의 향연은?
"오늘은 다슬기즙이네."
"네. 탑주."
"저번에 사 왔던 칡즙은?"
"탑주가 다 마셨습니다."
젠장.
"서울 한번 갔다 와야겠네."
"그냥 추출기를 하나 구매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안 돼. 보라가 날 죽이려고 할 거야."
에아와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정보들을 뒤적거리던 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하긴, 굳이 헌터 신분으로 갈 필요가 없겠네."
"?"
"이것들 최근에 신약 투자회도 열었나 봐. 서진이 통해서 바로 그린 케어에 컨택해. 알케미아가 신약 투자에 관심 있다고."
에아가 눈을 빛냈다.
"과연 탑주!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응, 사미아한테도 미리 연락해 줘. 내일 아침 일찍 갈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공인 2급의 혜택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낚싯대는 드리워졌다. 과연 어떤 월척이 낚일까'.
"탑주. 오는 길에 독일 소시지 세트 잊지 말아주십시오."
"관광하러 가는 거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