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26화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뭘 하는가.
결국 한윤정의 애프터 요청으로 알프스 스키장에 왔다. 이 동네는 365일 눈으로 덮여 있어서 스키장을 운영하고 있다.
몸만 왔지만 장비나 옷은 전부 스키장에서 대여해서 놀 수 있었다.
그런데.
"어려워!"
눈밭을 내려가던 나는 얼마 못 가다가 또 넘어졌다.
스노보드, 이거 쉽게 봤는데 균형잡기가 은근히 어렵다. 내려가면 속도가 너무 빨라지고, 억지로 멈추려고 했다간 휙 뒤집히기 일쑤였다.
"얏호! 하하하하!"
쓰러진 내 위를 스노보드 탄 한윤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디딤대를 딛고 떠오른 그녀는 공중에서 몇 번이고 회전하다가 완벽하게 착지했다.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벌리며 구경하다가 그녀가 내려오자 박수를 치곤 했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그녀의 기술 중에서도 저런 모래를 타는 보딩 기술이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스노보드 정도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선배."
촤아아아악!
홍연이 내 옆으로 다가와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건 뭐, 눈을 튀기며 다가오는 모습조차 광고 속한 장면 같다.
"괜찮으세요? 일으켜 드릴까요?"
"아냐. 나 혼자 설 수 있어."
나는 끙 소리와 함께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경사에 휘청휘청한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그녀를 보았다.
"너도 처음이라 지 않았어? 왜 이렇게 잘 타?"
"……? 그냥 잘 타지던데요."
재능충 죽어.
처음에는 제대로 서지도 못해서 엄마야 연발이던 그녀가, 몇 번 슥슥 미끄러져 내려가 보더니 이제는 카빙이든, 다이나믹턴이든, 거의 전문가 수준의 기교를 뽐내고 있었다.
"이런 것도 특성이 생길 줄 몰랐네요."
……진짜 개사기 능력이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이렇게 몸의 균형을 기울여서 조종하는 거예요. 오른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기울면 왼쪽으로 가요."
그녀는 몇 번 시범을 보이면서 내려갔다. 나는 그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오케이, 알았어."
브레이크를 풀고 눈밭에 몸을 맡겼다. 살짝만 힘을 줘도 보드가 미친 듯이 내려간다. 이 스키장의 경사가 너무 가파른 탓이었다.
사실 여기는 전문가들이 대회를 연습하러 오는 곳이었다. 초보자는 다른 스키장에 가는 게 맞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스키장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이곳을 고른 건 나다.
곧 여기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나는 극한의 이득충이라서, 스위스에 올 때 근처에 뭐 괜찮은 재앙이나 균열 사태가 있는지 미리 파악하고 왔다.
그리고 은솔이 구해달라고 한 재료가 이 근방에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꿩 먹고 알 먹고. 겨울 스포츠도 즐기고, 희귀 재료 수급도 하고.
사실 한윤정이 넌지시 알프스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이번 일의 지원군만 무려 공인 2급 두 명, 놀러 가자는 핑계로 홍연과 파라오를 데려왔다.
"우와앗!"
잠시 딴 생각하다가 몸의 균형이 앞으로 쏠리며 안전벽 쪽으로 향한다.
다급히 보드를 옆으로 틀면서 브레이크를 밟지만, 그 반응으로 내 몸이 눈 바닥에 처박힌다.
으윽, 겁나 아프네, 진짜. 보호대를 착용해도 아파.
몬스터 헌팅보다 스노보드가 더 힘들다.
"선배! 괜찮으세요?"
"바보야, 또 넘어졌냐?"
홍연과 한윤정이 유연하게 미끄러져 내려오며 내 좌우에 섰다. 그러고는 동시에 내게 팔을 내밀었다.
뭐지? 갑자기 이 분위기는.
내게로 팔을 뻗는 두 사람. 그들은 서로는 쳐다 보지도 않고 무릎을 굽힌 채 내게 재촉하듯 팔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팔을 동시에 덥석 붙잡았다. 그러곤 몸을 일으키면서 순간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아 확 잡아당겼다.
"우왁!"
"꺅!"
두 사람이 그대로 쓰러졌다. 나는 손을 탁탁 털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얄밉게 니들만 잘 타기야?"
"야! 죽을래?"
"선배!"
쓰러진 두 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는 모습이 재밌다. 나는 그녀들을 내버려 둔 채 출발했다.
보드를 타고 내려가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다. 하늘을 보니 마력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소용돌이치던 마력의 흐름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그곳에서 이상현상 '균열'이 열린다.
"왔다."
뒤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체가 스키장 뒤편에서 떨어지며,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허억!"
"까, 깜짝이야."
스키를 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적당히 평평한 곳에서 보드를 멈췄다.
"아, 짜증 나."
한윤정과 홍연도 내 옆으로 내려왔다. 한윤정은 발에 고정된 보드를 풀며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일이야?"
나는 스키장 너머로 거대한 팔 두개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팔을 한번 내려치자 스키장이 들썩거리며 거대한 눈사태가 내려오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비명이 연달아 터지며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상, 비상사태입니다! 몬스터가 침입했습니다! 이용객 여러분은 신속히 지정된 대피소로 이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발 빠르게 피난 방송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이 스키장에 상주하고 있던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딱 보니 공인 5급 정도? 스키장측에서 할수 있는 건 다한 것 같지만, 그들로서는 저 위협을 막긴 버거울 것이다.
"눈사태가 점점 더 빨라집니다!"
"균열 사태다. 배후에 몬스터가 있을 거야! 놈부터 쳐야 해!"
상주 헌터팀이 의논하는 와중에도 눈사태는 점점 가속하며 내려온다.
이대로는 모두 눈사태에 휩쓸려 산끝까지 내려가 버릴 것이다. 그사이에 살아 있다면 기적이고.
"자, 파라오님?"
나는 투덜거리는 한윤정을 보며 웃었다.
"수비 부탁해."
"끙, 간만의 휴가가 이게 무슨 꼴이야?"
한윤정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말괄량이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싸늘한 표정을 하는 이집트의 지배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짜증 나."
우우우우우우!
허공의 마나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친다.
수 많은 고유 능력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원천 마력계 능력, 그중에서 묘지기들은 마나를 모래로 바꾸는 능력을 보유했다.
그리고 묘지기의 우두머리인 파라오는 이 능력의 스페셜리스트다.
'역시 굉장한데.'
모든 것을 휩쓸며 내려오는 하얀 눈사태 앞으로, 누런 모래들이 뭉실뭉실 떠올라 시야를 뿌엏게 가린다.
한윤정이 가느다란 팔을 척! 뻗었다.
콰콰콰콰콱!
내려오는 눈사태와, 올라오는 모래폭풍이 서로 부딪히며 충돌한다.
눈과 모래들이 뒤엉키며 파도처럼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은 세상 더 없는 장관이었다.
이 웅장한 알프스 산에서 일어나는 초대형 눈사태를 한윤정은 팔을 드는 것만으로 막아 세우고 있다.
"누, 누구지?"
"지원군인가?"
헌터팀이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그들은 우리가 스키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고객인지 헌터인지 긴가민가 한 듯했다.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호, 혹시 소속이 어떻게 되는……"
"공인 2급 김유신입니다. 이제부턴 우리가 통제하겠습니다."
차작!
정체를 밝히자마자 헌터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예,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과연, 이 맛이구나.
공인 2급 헌터는 헌터 연맹에서 합법적 지휘권을 인정한다. 협회장이 말한 대로 세계 어디든, 어떤 전장이든, 2급 헌터가 있다면 그 사람이 대장이다.
"여러분은 이용객의 피난 유도와 스키장 안으로 들어오는 잔당 몬스터의 차단에 주력하세요. 몬스터 하나가 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바로 피난 유도를 위해 떠났다.
"야, 팔 아파! 빨리 가서 끝내."
눈사태를 막고 있는 한윤정이 투덜거렸다.
"앞장서겠습니다."
스릉!
홍연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서포트할게."
"부탁드립니다."
크게 한번 발을 구른 그녀가 바닥을 산산조각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나도 바로 그녀를 뒤따랐다.
한윤정이 막고 있는 눈사태와 모래폭풍의 격전지를 빗나가는, 다소 눈사태가 약한 지점으로 그녀는 돌파를 시도했다.
눈사태는 계속해서 2차 웨이브, 3차 웨이브까지 다가오고 있있다.
"흡!"
그녀가 검을 한번 휘둘렀다. 거대한 눈사태에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그대로 중간부터 무너져 내렸고 그사이에 홍연이 몸에 적광기를 두른 채 통과했다.
'이게 다 몇 개야?'
눈사태의 파도는 내가 데바의 눈으로 감지한 것만 해도 7차 웨이브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몬스터가 알프스의 눈을 전부 탈탈 털어버릴 기세다.
하지만 앞으로 내달리는 홍연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웨이브가 다가오는 족족 무너뜨리며 달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밀려드는 5차 웨이브의 눈사태 곳곳에 특이한 마력 흐름이 감지된다.
"홍연! 조심해!"
그녀가 검을 휘둘러 웨이브를 무너뜨리는 순간, 눈사태 속에 숨어 있던 흰털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몬스터 하나가 홍연의 몸을 붙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큭!"
두 팔이 붙들린 그녀를 향해 몬스터가 쩍 벌린 아가리를 들이민다.
으적!
적광기를 두른 그녀의 발이 몬스터의 턱을 밀어 올리자 턱뼈가 통째로 박살 난다.
두 팔이 자유로워진 그녀가 바닥을 짚고 달려드는 또 하나의 몬스터의 안면을 후려 찼다.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고, 몸을 회전시킨 그녀가 팔을 휘둘렀다.
촤아악!
짐승의 발톱처럼 다섯 갈래의 붉은 선이 허공에 그어지며 몬스터들이 찢어진다.
뒤이어 바닥에 박힌 검을 붙잡고 횡 베기. 달려드는 몬스터의 몸이 가로로 갈라진 채 떨어진다.
"……!"
그러나 밀려드는 6차 웨이브를 어쩌지 못하고 그녀의 몸이 휘말려 날아간다.
"하여간."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꼭 감은 눈을 뜬다. 나는 그녀의 무게를 견디며 씩 웃었다.
"서, 선배!"
"은근히 손 많이 간다니까. 꽉 잡아."
<데바스타>
홍연을 안은 채 왼발에 켠 데바스타를 발동했다.
시야의 영역이 한 순간 훅 넓어지더니, 넓어진 만큼 엄청난 속도감과 함께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어느새 일곱 번째 웨이브를 통과한 뒤였다.
모든 눈사태를 돌파하고 탁 트인 내 시야에, 이번 균열로 내려온 몬스터가 보인다.
"다 왔어!"
"네!"
나는 힘껏 그녀를 던졌다. 붉은 마력에 휩싸인 홍연의 몸이 혜성처럼 보스 몬스터 앞까지 도달한다.
"후우."
정자세로 검을 쥔 그녀가 눈을 감은 채 팔을 올렸다. 거구의 흰털 괴물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온다.
<적무>
그녀의 몸이 빛살보다 빠르게 몬스터를 통과한다.
그리고.
쩌어어어어억!
여지없이 저 몬스터의 몸도 가로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진다.
이번에도 일격이면 충분했다.
'7랭크 몬스터를 원킬……. 그동안 얼마나 세진 거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름 6공정을 장착하고 자신감이 차 있었는데, 역시 그녀를 성장으로 추월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다.
"선배! 같이 가요!"
아무렴 뭐 어때.
나는 달려오는 그녀와 하이파이브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