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25화
술자리에 홍연이 참가했다.
살짝 술에 취해 자유롭게 앉아 있는 우리와는 달리, 홍연은 내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우리 홍연 헌터였구나?"
알코올이 들어가고 텐션이 한껏 오른 한윤정이 깔깔 웃으며 감자튀김을 물었다.
"갑자기 누가 살벌하게 들이닥치길래 나는 뭐 불나서 소방관이라도 온줄 알았지!"
"……아하하."
뺨을 붉게 물들인 홍연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나는 테이블의 안줏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좀 먹어."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맥주 마실래?"
"저는 괜찮아요."
홍연은 대신 콜라를 들었다.
"자, 그럼 한 명 더 왔으니 다시 시작할까?"
한윤정이 맥주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이제는 다 함께 공인 1급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는 서로 캔을 맞부딪치며 웃었다.
아무 격식 없는 서민식 술자리였지만, 처음엔 민망해하던 홍연도 어느새 적응해서 분위기를 맞췄다.
"홍연 헌터도 저 나쁜 놈한테 한마디 해야지?"
한윤정이 홍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 내가 뭐!"
"우리한테 계속 마탑을 숨긴 거 말야!"
홍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서운해요."
윽! 역시 저 녀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해요. 그리고 대중앞에서 공표하기 전에 먼저 전화도 걸어주셨고요. 저는 바빠서 못 받았지만요."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참, 그동안 계속 남극에 있었지? 썰 좀 풀어봐. 대체 무슨 재앙이었길래 공인 2급까지 한 방에 된 거야?"
홍연은 낭랑한 어조로 남극에서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남극의 재앙 '버닝로드'. 연맹에서는 아프리카 '타베스'와 같은 위험성을 가진 재앙으로 분류했다.
놈은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추우면 추울수록 더 불타는 불꽃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남극 일대가 불바다로 번져가는 모습은 대단히 이질적이었다고 한다.
'이거 그거 같은데.'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6층 시련에서 미네르바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바로 극지에 나타난 재앙급 몬스터.
미네르바의 세계에서는 그 몬스터를 방치했고, 결국 극지의 모든 빙하가 녹아내려서대륙이 통째로 물에 잠기고 말았다고 했다.
물론 지구와 그쪽 세계의 환경은 다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홍연은 대륙 하나를 구한 공적을 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다이나믹한 생활을 해와서 그런지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새벽에 시작된 술자리는 점심까지 이어졌다.
"으아아앙! 일하기 싫다아아."
어느새 내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한윤정이 다리를 쩍 벌리고 휴대전화 두들기고 있었다. 내 친구지만 참 대단하다.
반면 홍연은 도통 흐트러짐이 없었다.
쓰레기가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치우고 식탁의 과자 부스러기를 손으로 곱게 모아서 버리는 등 정리정돈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동생 좀 본받아라. 이 아가씨야."
내가 다리로 그녀를 툭툭 건들며 침대에서 비키라고 하자 그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꽥 소리 질렀다.
"아, 싫어!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얘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앙탈이야?
파라오 생활이 어지간히 스트레스긴 스트레스였는지 그간 쌓인 모든 어리광을 내 방에서 다 부리고 있었다.
"홍연. 거기 쓰레기봉투 좀 줘봐. 얘 좀 집어넣게."
"이러언! 무엄하다! 위대한 파라오에게 그게 무슨 망발이냐!"
한윤정이 다리를 번쩍 들어 내 목을 감싸고는 침대로 끌어당겼다.
"꺄하하! 사형이다!"
"야 이 미친 여자야! 술 취했냐?"
"엉, 취했다. 어쩔래?"
우리가 침대 위에서 부둥켜 싸우는 모습을 보던 홍연은 다소곳하게 입을 가린 채 한발 물러섰다.
……그런 눈으로 보면 상처받는다.
"홍연 헌터도 드루와! 너도 쌓인 게 많을 거 아냐!"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파라오님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쫌! 떨어져!"
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한윤정을 떼어내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진 채 멍 때렸다.
"으으. 스위스까지 와서 알프스도 못 가보고 일, 일, 일! 지겹다 진짜."
"알프스?"
나는 그렇게 물으며 의자에 앉아 반쯤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거기 뭐 볼 거 있냐?"
"경치가 엄청 예쁘잖아! 스키도 탈수 있고! 그 동네는 1년 내내 운영한대."
"음, 그래?"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보러 가지 뭐."
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려다주시려고요? 하지만 여기서 알프스까지 왕복하려면……."
시간이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잊었어? 나 마탑주야."
* * *
"우와아! 와아아앙!"
한윤정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감격했다.
"말도 안돼! 실화야? 컴퓨터 바탕화면에나 보던 그 그림이잖아!"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서 있는 싱그러운 녹색의 목초지 위로, 새하얗게 눈 덮인 절경의 산맥들이 펼쳐져 있다. 그 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아름답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런 광경을 세상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폴짝폴짝 뛰며 야단법석인 한윤정을 보던 나는, 슬쩍 시선을 움직여 홍연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 또한 무척 놀란 반응이다.
두 손을 곱게 모아 가슴에 올리고 입을 살짝 벌린 모습에 미소가 그려졌다. 얘는 놀라는 것도 참고상하게 놀란다.
'날씨 좋다아.'
사미아에게 부탁해서 워프게이트를 열어달라고 했다. 이제 내가 마탑주라는 걸 밝혔으니 워프 기술을 숨길 이유도 없다.
"고마워요 선배."
홍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경치를 보여주셔서요."
"크흠, 흠. 너희한테 마탑을 숨긴걸 사과하는 의미야."
"아."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던 그녀는 이내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보았다.
"선배! 탄자니아에서도 이런 마법 가지고 있었죠?"
"……."
나는 슬쩍 딴청을 피웠다.
"치사해요! 선배 혼자만 한국에 갔다 오고! 그래서 그때 그렇게 트렁크 짐도 적었던 거고, 현장에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던 거였죠?"
"피치 못한 사정이 있을 때만 간거야. 알잖아? 나 바쁜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는 괜히 시차 때문에 고생한단 말에 걱정했잖아요!"
"아니, 그건……!"
나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내 얼굴앞으로 휴대전화가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기겁하며 낚아채듯 휴대전화를 받았다.
"야! 그걸로 나 좀 찍어줘! 오늘 인생샷 각이다!"
한윤정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 액정 깨지면 어쩌려고 이걸 던져?"
"아, 닥치고 빨리 빨리!"
나는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 카메라를 작동시키고 앵글을 맞춰보았다.
카메라로 어딜 비추던 장관이다.
인생샷이 안 나오기 힘든 경치다.
이 경치를 배경으로 한윤정이 포즈를 취했다. 한 손은 머리 뒤에,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바디라인을 강조한 자세다.
바람이 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옆으로 휘날리며 한 편의 예술 같은 그림이 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야, 힘들어! 빨리이!"
"그, 그래."
나는 그렇게 연달아 몇 장을 찍었다.
"찍었냐? 찍었어? 잘 나왔지?"
한윤정이 총총총 달려와 휴대전화를 돌려받았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 멍청아! 요즘 누가 이렇게 찍어?"
"웅?"
"수평 수직 제대로 맞추고! 발끝을 하단에 딱 맞춰서 찍어야지! 그래야 다리 길게 나온단 말이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난 그냥 풍경 위주로 찍은 건데."
"그딴 건 필요 없어! 날 중심으로 찍어줘! 내가 예쁘게 나오게! 자, 다시!"
풍경이 필요 없으면 알프스에 왜 왔나 싶은데요.
그때 홍연이 다가와 내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
"야, 이 정도면 그래도 평타는 쳤지 않냐?"
"……음."
눈을 가늘게 뜨고 보던 홍연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네."
"나를 보고 대답해라!"
"제가 대신 찍어드리겠습니다. 파라오님."
그녀는 내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아가더니 다른 배경을 연습 삼아 몇번 찍었다.
"수평 수직, 발끝하단, 역광 주의, 중앙 배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감을 잡아가던 그녀는, 서서히 포스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윤정을 찍을 때는 거의 전문 사진작가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신중하게 앵글을 돌려가며 셔터를 눌렀다.
"어때? 잘 나왔어?"
17개 포즈를 취하고서야 만족한 한윤정이 우리에게 달려왔다.
홍연은 그저 웃는 얼굴로 휴대전화를 돌려 줄 뿐이었다.
"……대박!"
한윤정은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고객 만족도 100%다.
"선배."
"응?"
"저도 찍고 싶어요."
워낙 풍경이 좋으니 홍연도 사진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래, 아까 쟤가 갔던 곳에 서 봐."
홍연이 뛰어가서 알프스산맥을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한윤정이 피팅모델 같은 다이나믹한 포즈를 선보였다면, 홍연은 사진 찍는 게 어색한지 쭈뼛거리며 목각인형처럼 자리에 섰다.
나는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증명사진 찍으러 왔어?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고 찍어."
"편안하게요?"
그녀의 포즈가 바뀐다.
오른 다리가 살짝 앞으로 나가고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던 두 손은 뒷짐을 지어서 감췄다. 가슴을 펴고 고개를 세우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휘날린다.
"오……"
나는 그만 손에 쥔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화보를 넘어서, 거장이 포착한 한 폭의 아름다운 예술과도 같았다.
비현실적이다 이건.
"찍었어요?"
"아, 미안! 한 장 더 갈게!"
사진 풋내기답게, 그녀의 포즈는 전체적으로 얌전한 분위기였다.
두 손을 모으거나, 소심하게 V자를 그리 거나, 꽃을 하나 꺾어서 뺨옆에 대고 웃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참…… 나도 모르게 헬렐레한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꺄악! 진짜 대박이야! 여기 오길 잘 했어!"
자신의 사진들을 모두 체크한 한윤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지금 찍고 있는 거야?"
"저는 다 찍었습니다."
"잠깐만 홍연 헌터! 거기 있어봐!"
한윤정이 홍연에게 달려갔다.
"우리끼리 한 장 찍자! 좋지?"
"물론입니다."
"자, 내 손 잡아."
그녀들은 마주 서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뒷발을 이렇게 살짝 드는 거야."
"이, 이렇게요?"
"응! 좀 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없이 그녀들의 포즈를 지켜보고 있는데, 한윤정이 소리쳤다.
"됐다! 이제 찍어줘!"
"오케이."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그녀들의 모습을 앵글에 잡았다.
'오호.'
앙증맞은 포즈를 취한 두 미녀가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괜히 사진을 찍어주는 나조차도 설레는 기분이 든다.
나는 폰 카메라 셔터를 연달아 눌렀다.
"다 찍었어?"
"어."
두 사람이 달려와서 사진을 확인했다. 한윤정은 방방 뛰었고 홍연도 상기된 얼굴로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데리고 오길 잘한 것 같다.
"야, 넌 안 찍냐?"
"난 됐어. 풍경을 눈에 담아가는 걸로 충분해."
"또 또 혼자 고상한 척한다. 인생에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몰라?"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윤정이 한 여행자 부부를 보고는 달려갔다.
"Hey!"
그녀가 뭐라 뭐라 설명을 하자 남편 쪽이 'Of Course!' 를 연발한다.
"저 아저씨가 사진 찍어주신대! 마지막으로 세 명 다 같이 찍자!"
한윤정이 내 손을 붙잡고 픽쳐 포인트로 끌고 왔다. 홍연도 내 반대편에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외국인 아저씨는 의욕이 생기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앵글을 맞추었다.
아저씨는 다섯부터 숫자를 셌다.
그때 한윤정이 내 왼팔을 붙잡고 몸을 기울였다.
'……야, 야.'
나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녀를 부르려고 했지만, 한윤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홍연마저도 내 오른팔을 붙잡은 채 고개를 살짝 기대왔다.
온몸이 긴장으로 얼어붙는다.
"……Two, One!"
찰칵!
"One more time!"
이 아저씨 즐기는 것 같은데.
아저씨는 사진을 찍으면서 입꼬리가 마구 승천하고 있었다. 나는 그심정을 백번 이해했다.
아저씨는 그렇게 몇 장을 더 찍어주었다.
한윤정이 휴대전화를 돌려받으며 웃었다.
"땡큐! 땡큐!"
"You're welcome."
한윤정과 홍연이 사진을 확인하며 꺄르르 웃고 있는 사이, 나는 조용히 아저씨에게 다가가 옆을 보라는 손짓을 했다.
"What……?"
그렇게 아저씨는 고개를 돌렸고.
뒤늦게 이글거리는 아내의 얼굴과 마주했다.
'잘 가요.'
나는 아저씨의 명복을 빌어주며 그녀들과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