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24화
나도 노트북을 챙기고 카페를 나섰다.
열을 냈더니 집중이 안 된다. 아까 집중력 최고조였는데, 하여튼 간에 사업하는 사람들은 도움이 안 되는…….
"탑주. 앞을 보십시오!
"응?"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까 벽을 통과해 사라졌던 그 소녀 유령이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얘! 잠깐만!"
그녀는 내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벽 쪽으로 넘어갔다. 나는 재빨리 데바의 눈을 활성화했다.
'에아! 저 벽 너머로 가는 최단 루트를 찍어줘!'
-알겠습니다. 바닥에 푸른 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나는 다리에 마력을 일으키고 에아가 표시해 둔 지점으로 뛰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피해 길을 열어주었다.
-탑주. 타깃이 계속 벽을 넘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안 놓쳐.'
속도를 더 내서 전력 질주했다.
저기 벽 너머로 소녀의 옷자락이 보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따라잡았다.
"너 대체 무슨……! 응?"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소녀를, 한 여자가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엥? 뭐야?"
나를 본 그녀가 확 밝아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여기서 딱 만나네?"
이집트의 파라오이자 내 친구, 한 윤정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부담스럽던 금빛의 헌터 슈트가 아닌, 청바지에 깔끔한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 세계길드 심사니까, 묘지기의 수장인 그녀가 연맹 본부에 와 있을 거란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소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얘 보여?"
"……갑자기 뭔 귀신 싸나락 까먹는 소리야? 당연히 보이지."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령이 아니었나?
"또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인사해. 장차 네 선배님 되실지 모를 분이야."
"선배님?"
한윤정이 웃었다.
"이 아이가 바로 멕시코의 세계길드, '유령대'의 길드마스터야."
순간 멍해졌다. 이런 꼬마가 전 세계에 다섯 개밖에 없는 세계길드의 수장이라니.
분명 내가 알던 사람은 키 크고 콧수염 난…….
"세간에 길드마스터로 알려진 그사람은 그냥 임원이야. 바지사장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모든 실권은 마리에게 있어."
"마리가 이름이구나."
그녀는 힐끔 나를 쳐다보고는 다시 벽을 넘어 사라졌다.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 원래 애들이 낯을 좀 가리잖아."
한윤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튼 너 딱 잘 만났어! 안 그래도 만나러 갈 생각이었거든."
"음?"
그녀가 흰 봉투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랜만에 한잔할래?"
* * *
나는 호텔방으로 들어왔다. 트레이닝복 셔츠를 걸어놓고 있는데 뒤에서 한윤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문 안 잠겨!"
"……걍 닫고 와. 내가 할게."
기계치인 건 여전하네.
그건 그렇고 안주는 뭘 사 왔으려나? 나는 테이블에 그녀가 가져온 봉투를 내려놓고 내용물을 꺼냈다.
맥주캔과 피시앤칩스, 후라이드 치킨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화장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비데 버튼 뭐야? 불어라서 모르겠어!"
"……파라오 됐다고 지능까지 기원전으로 돌아갔냐?"
"뒈질래? 새끼야!"
그녀가 화장실을 쓰는 사이, 나는 테이블에 맥주와 안주를 세팅해 두었다.
갓 튀긴 치킨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식욕이 당기는 냄새다.
"아, 배고프다. 먹자! 먹자!"
그녀가 후다닥 달려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일상복 차림의 파라오 한윤정은 조금 낯설지만, 새로운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니트를 입었는데 볼륨감을 숨길 수 없었다.
피시앤칩스 포장을 뜯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휙 노려보았다.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넌 만날 때 마다 남의 몸 훔쳐보고 앉았냐?"
"당당히 봤는데."
"죽어 좀!"
그녀가 내 쪽으로 다리를 휙휙 들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젖혀 피하며 말했다.
"어휴, 냄새. 발 좀 씻고 와."
"방금 씻었거든!"
그녀가 맥주캔을 집어 던지려는 시늉을 하자, 나는 킬킬거리며 캔을 빼앗아 뚜껑을 땄다.
"이 꼭두새벽부터 술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뭐 어때? 회의 전날 밤에 마시는 것보단 낫지."
"그건 그래."
우리는 맥주캔을 맞부딪치고는 단숨에 입 안으로 들이켰다.
스위스 맥주라고 했던가? 알프스 그림이 붙어 있는 맥주였는데 무척 맛있었다.
"캬하! 좋다."
정신없이 맥주를 들이켠 한윤정이 어깨를 들썩였다.
"야, 너 벌써 한바탕 했더라?"
"뭘?"
"나이트워커를 꺾고 공인 2급 됐다며? 소문 쫙 퍼졌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네 이야기뿐이야."
그녀가 맥주캔을 착 들어 올렸다.
"김유신의 공인 2급 승급을 위하여!"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와 맥주캔을 맞부딪쳤다.
시원한 걸 들이켜니 바로 바삭한게 땡긴다. 우리는 한마디도 없이 치킨을 먹어치우는데 집중했다. 스위스식 후라이드 치킨도 꽤 먹을만 했다.
"야,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갑자기 그녀가 분위기를 잡았다.
찔리는 게 있던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마탑에 대해 숨긴 거?"
"그래, 짜샤! 어쩜 나한테까지 말 안 해줄 수 있냐? 니가 그러고도 친구야?"
"숨긴 건 정말 미안하다."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래도 기왕 대외비로 지침을 정했으니까, 확실히 지키기로 했어. 누구는 예외를 두고, 누구한테만 몰래 말해주고. 뭐 계속 그러다 보면 내 경험상 항상 문제가 터졌거든."
그녀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아- 생각난다. 내가 아카데미 다닐 때 같이 일해보자고 한 게 이거였구나?"
"맞아. 널 마탑에 데려 올 생각이었어."
그녀가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거절하길 잘 했네. 널 상관으로 모시면서 굽신굽신 하는 꼴을 어떻게 참아?"
"쓰읍, 아깝다. 진짜 이 갈리도록 부려먹을 수 있었는데."
"뒈질래?"
우리는 큰 소리로 깔깔 웃으며 맥주잔을 맞부딪혔다. 술자리 초반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 * *
"……음."
홍연은 스마트폰 메모앱에 적힌 곳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선물 세트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녀 또한 바로 오늘, 남극의 재앙을 클리어하고 스위스의 세계 연맹본사에 들렸다.
아프리카와 남극의 치명적인 대재앙을 물리친 공로로, 그녀는 이제 막 공인 2급 헌터 자격을 부여받은 참이었다.
호텔로 들어온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버튼을 눌렀다. 먼저 타고 있던 두 명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벽에 딱 붙었다.
'호, 홍연? 맞지?'
'쓰읍, 와. 진짜 이건 너무 할 정도로 예쁘다.'
올라가는 층의 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홍연을 보며, 두 남자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말 걸어보고 싶다!'
세상 살면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정신적 기절상태에 빠진 건지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저, 저기……!"
"?"
홍연이 레드톤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특유의 시크한 표정과 마주하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심장이 멎는 것을 경험했다.
"호, 홍연 헌터님! 맞으시죠?"
"정말 팬입니다! 2급 승급 축하드려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한계치까지 달아올랐다.
"크흠흠, 저희는 글로벌 길드인 '가디언'에서 일하고 있는 헌터들입니다. 오, 오후에 전 세계의 헌터들이 모이는 파, 파티가 있는데 시,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옆에 친구가 '목소리 존X 떠네 병X.' 하면서 옆구리를 퍽쳤다. 그런 그의 목소리도 달달 떨리고 있었다.
홍연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그녀는 고개 숙여 예의 바르게 거절한 다음, 띵!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아아."
다리에 힘이 빠진 두 사람이 동시에 퍼질러 앉았다.
사실 저런 거물이 올 거라 기대도 안 했다. 한계까지 쥐어 짜낸 용기에 치어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17층에 도착했다. 이제 1705호를 찾으면 된다.
이번엔 무표정하던 홍연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언니인 홍율을 먼저 만났었다.
두 자매가 재회의 감격으로 한동안 난리 치는 것도 잠시, 홍율은 여동생이 가져온 선물 세트를 보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건 왜 사 왔어?
-……감사 인사를 하러 가는 건데, 빈손으로 가면 좀 그렇잖아요.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선물의 구성품이 문제라는 거야! 걔가 돈이 부족하겠어, 뭐가 부족하겠어? 그런 거 말고 다른 부분에서 어필할 수 있는 것들도 있잖아!
-다른 부분요?
홍연은 이마를 짚었다.
금이야 옥이야 온실의 화초처럼 키워온이 귀여운 여동생은 이쪽 감각이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클래식한 것들이 꾸준히 먹힌다고! 나 때는 말이야. 직접 만든 양말이나, 털옷, 수제 초콜렛, 아이 샹, 막 그런 것들 많잖아! 이런 게 또 정성이 담겨있으니까 감동이라고!
-……그런 건 남자친구한테나 하는 선물 아닌가요?
-어, 니네 사귀는 거 아니었냐?
-언니이!
당황해서 빽 소리 지르는 홍연을 보며, 홍율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래. 니 연애까지 내 참견할 바 아닌 거 아는데, 유신이한테 쥐꼬리만큼이라도 생각 있음 서둘러라. 걔 주가 미친 듯이 폭등했잖아. 젊은 20대 공인 2급에, 마탑주에, 잘 나가는 스타트업 대표이기도 해. 고거 고거 주위기지배들이 가만 냅두겠냐? 앙?
어제의 대화를 상기하던 홍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전체적으로 총체적 난국의 대화였다. 괜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고 홍연은 생각했다.
1705호로 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문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은 가속됐다.
'침착해. 그냥 감사 인사를 드릴뿐이야. 언니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하고.'
마침내 1705호의 문 앞에 선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엄청나게 고민이 되었다.
역시 먼저 연락을 하고 왔어야 했나. 옷이 맘에 안 들어. 그냥 선물만 놓고 도망칠까.
이 날씨에 치마는 너무 오버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냥 입던 거입을 걸. 언니 센스 최악. 그냥 돌아갈까?
그래, 난 스위스에 오지도 않았던거야. 아냐, 공인 2급 승급 사진 찍혀서 기사도 떴을 텐데.
지금이라도 기자한테 전화할까? 선물을 지금이라도 바꿀까? 지금이라도 방에서 목도리 뜨기 입문하면 오늘 하루 안에 만들 수 있나?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바보처럼 굴지 마. 그냥 딱 들어가서, 얼굴 보고,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통화로…….
"꺄하하하하하!"
홍연은 심장이 철렁했다.
1705호 문 너머로 여자 웃음 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유신의 방이 맞았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홍연은 자신의 마음이 방공호를 타고 끝없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응, 맞아. 그렇게 잘 나간다는데 여자 안 만나는 게 이상하지.'
이성은 체념하는 것과는 달리,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극도로 속상하고 소심해져야 할 시점이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이럴 때 홍연은 울컥하는 어떤 감정이 치밀었다.
무슨 생각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대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떡하니 열려 있었다. 실례고 뭐고, 두 눈으로 확인해……!
"뭐야?"
"……응?"
그리고 식탁에 앉아 술자리를 펼치고 있는 유신과 파라오 한윤정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외설적인 장면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뺨이 화끈 달아오른 홍연이 말을 더듬다가 고개를 확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