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18화
헌터의 날(Hunters' Day).
지구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했으며, 전 세계를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간 대재앙 '악마의 정원'의 극복을 기념하기 위해 모든 나라가 공동으로 공휴일로 지정한 날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프로스트 이슈로 어느 때보다 뒤숭숭한 때인 만큼, 국내 정세와 헌터계를 빠르게 안정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올해 헌터의 날 행사는 유난히 크게 열렸다. 초대형 연회장에서 헌터들과 각기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프로스트로 인해 헌터계는 한번 반으로 갈라졌었고, 그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유닉스 출신이야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프로스트의 정책을 옹호했던 헌터들 모두가 싸잡혀 비난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행사는 이전의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모두가 힘을 합쳐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번 홍율 구출 작전의 1등 공신이었던 나와 마탑 멤버들도 초대받았다.
"선배님! 여긴 훈제 연어가 진짜 맛있다니까요!"
"연어도 있었어? 난 못 봤는데."
우리는 격식 있는 연회복장을 차려 입고 한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나와 진보라, 정서진, 은솔, 그리고 사미아까지 이렇게 다섯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반대편에는 4층팀이 둘러앉았는데, 나대용을 필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아아. 이제 좀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네요."
포크를 내려놓은 진보라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진짜 세상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요."
"보라야."
"네?"
"너 내 악플 보고 울었다며?"
그녀의 귀가 시뻘게 졌다.
"누, 누, 누, 누가 말했어요? 야! 정서진!"
대뜸 진보라가 정서진의 멱살을 붙잡았다.
"솔이가 말해준 건데."
"응! 언니야 펑펑 울었어!"
은솔이 진보라를 가리키며 꺄르르 웃었다.
무안해진 진보라가 정서진의 멱살을 놓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곤 괜히 내 쪽을 노려본다.
"아, 왜 사람 헷갈리게 그래요!"
"네가 멋대로 헷갈린 거야. 바보야."
내가 크림이 잔뜩 묻은 은솔의 입을 닦아주미 말했다. 은솔은 마냥 좋은 듯 헤실헤실 웃었다.
"오빠야! 한 그릇 더 먹고 싶어!"
"솔이 오늘 엄청 잘 먹는데? 가자. 가."
은솔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는데, 주위에서 유난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보라와 정서진이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옆 테이블의 4층팀도 마찬가지였다.
"오, 여기 있었구나? 내 새끼."
협회장 홍율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집에 똑같은 게 몇 벌이나 있을까 싶은 진회색 줄무늬 정장 차림이었고, 자켓은 어깨에 팔을 빼서 걸치고 있었다.
"몸은 어떠세요?"
"아, 괜찮아. 괜찮아.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저 눈과 직면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는데, 나는 이제 적응이 돼서 그런지 문제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태연히 받을 수 있게 됐다.
"새끼."
그녀가 히죽 웃었다.
"왜 이렇게 귀엽냐?"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난데 없이 거친 손길로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 협회장님!"
나도 엄연히 사회 생활하는 사람인데 부끄럽게.
나는 반항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행동도 더 과감해졌다. 곳곳에서 자작한 웃음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진보라는 옆에서 입을 가린 채 은밀한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두고 보자.
"아 참. 협회장이 너무 한 헌터만 편애하면 안 되나?"
내 머리에 헤드락을 걸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전에 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 주시면……"
"헹, 웃기고 있네! 내가 볼 땐 넌 아직도 애기야. 애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가 팔을 풀어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건 그렇고, 홍연은 못 온대요?"
내 물음에 협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극에서 맡은 일 슬슬 마무리 중인가 봐. 다음 주 안에는 귀국한대."
"기어코 한 건 해결하고 오려나 보네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홍연은 또 혼자서 한 편의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극지로 좌천당한 그녀에게 온갖 차별과 텃새가 이어졌지만, 얼마 안가 특유의 카리스마로 조직을 휘어잡고, 모두의 인정을 받아 리더로서 팀을 일치단결시켜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타국에서 파견된 남극 기지의 협력까지 이끌어내서 그동안 밝혀진 바 없는 어떤 재앙과 싸우고 있다던가. 남극은 지금 홍연 열풍이다.
"오, 그래."
협회장이 시선을 돌려 옆 테이블의 4층팀을 바라보았다.
"니들이 그 마법사팀이지?"
4층팀은 화들짝 놀라며 차려자세로 외쳤다.
"예! 그렇습니다!"
"다들 1세대 마법사에 거는 기대가 커. 물론 나도 그렇고. 관심 있게 지켜볼 테니까 열심히 해라."
"가, 감사합니다!"
4층팀은 전율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무려 대영웅의 격려라니! 특히 소심희는 거의 정신적 기절상태였다.
협회장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쪽은 사미아 3급?"
"대영웅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이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누었다. 두 쪽 다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악수하고 미소 짓는 행동에 품격이 흘렀다.
"이렇게 한국에 새로운 텔레포터가 들어올 줄은 몰랐네. 안 그래도 2년간 새로운 텔레포터가 안 나와서 고민이었거든."
"은퇴를 앞둔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베테랑의 경험과 관록이 어디 가는 게 아니지. 유신이가 엇나가지 않도록 중심 잘 잡아줘."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미아와 대화를 나눈 협회장은 내다리 뒤에 숨어 있던 은솔을 보았다.
"너구나? 골렘 소녀."
협회장이 무릎을 굽혀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역시나 은솔은 낯을 가렸다.
"요즘 엔지니어들이 거품 물고 만나고 싶어 한다는 유명인사를 이렇게 보게 되네."
"……."
"솔아 인사해야지."
그녀는 내 눈치를 힐긋 보더니 쫑쫑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곤 배꼽에 양손을 올리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협회장은 미소 지었고, 주위에선 '꺄아아악!' 하고 떠들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협회장은 은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상체를 세웠다. 어느새 휴대전화를 든 진보라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협회장을 보고 있었다.
"여, 영광입니다! 협회장님! 진짜 죄송하지만 사……!"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나는 다급히 진보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SNS 관심종자 병은 완치 불가능인가?
그때 협회장이 피식 웃었다.
"사진 말하는 거지? 괜찮아. 찍어. 찍어."
"정말요오오?"
결국 진보라는 협회장과 단둘이서 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진보라는 셀카 장인답게 화사한 포즈로 턱받침을 했고 협회장도 능숙하게 미소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꺄아아악! 정말 고맙습니다! 어쩜 좋아!"
진보라는 행복에 겨운 얼굴로 거듭 인사하고는 휴대전화 앨범을 확인했다. 4층팀이 부러운 눈으로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감히 진보라처럼 사진을 찍어달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협회장은 마지막으로 정서진을 보았다.
"네가 정하진의 동생이지?"
"예."
정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유신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저번에 마법 관리부 유치 자료들 네가 쓴 거 맞아?"
정서진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무원들 일 처리 하는 꼴만 보다가 그 자료들 보고 감탄했어. 너 같은 똘똘한 애들이 협회에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본나는 슬쩍 중간에 끼어들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우리 서진이는 안내어드립니다."
"나도 알아. 쪼잔하게 씨리!"
협회장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등을 때렸다. 그대로 내 허리가 90도로 꺾였지만, 신경 쓰지 않은 그녀는 모두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우리 유신이 잘 부탁해. 앞으로는 좀 바빠질 거니까 수고하고."
"……?"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협회장은 나를 보고 윙크하며 팔을 흔들었다.
"연설 끝나고 봐."
"넵, 고생하십쇼."
* * *
'태평하기 짝이 없군.'
프로스트의 심복, 안 비서는 홀로 앉아 물을 마시며 유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이제 곧 시작된다.'
수 많은 인파가 모인 헌터의 날 행사. 잠시 후 홍율 협회장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높은 사람들이 나와서 연설을 하는 차례가 있었다.
여기서는 안 비서의 차례도 있다.
Top10에서 퇴출당하고 몰락한 유닉스 길드가 아닌, 던전 연구회 고문자격으로 연설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이었다.
'이제 끝이다. 김유신.'
그가 목걸이처럼 맨 USB를 꾹 쥐었다. 이 안에는 김유신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던 서울의 흉물. 아니, 이계의 유적에 대한 진실이 들어 있었다.
만년 비전투계 능력자였다가, 갑자기 고유 능력이 바뀐 남자.
혜성처럼 등장한 마법이라는 힘.
알케미아가 만드는 포션의 비밀.
이 풀리지 않은 모든 비밀들이, 김유신이 이계의 유적을 숨기고 있었다면 말이 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김유신을 습격하러 간 웨인 존스 일행들이 보내온 자료들이었다. 김유신은 서울의 흉물이라 불리는 마탑을 지키고 있었고, 그들이 왔을 때 기꺼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무슨 이유에서?
바로 그 흉물이 이계의 유적이기 때문이다.
자료에는 통제구역으로 들어가는 김유신의 사진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이 탑 안으로 들어가는 사진들도 있었다.
김유신은 지금까지 이 시설을 독점한 채 국민들에게 숨기고 있었다.
이 사실을 국내와 전 세계에 공표하면, 여러 사실 관계가 밝혀지며 수 많은 논란이 터져 나올 것이다.
논란 뿐만이 아니다. 그가 유적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세력들이 개입해 이권 다툼을 시작할 것이다.
김유신은 그동안 겪지 못한 종류의 알력 싸움에 휘말리게 되리라.
물론 김유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숨겨왔던 거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주인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대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큰오산이다.
적어도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김유신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연설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협회장 홍율의 담화가, 그리고 협회를 지원하는 재단의 거물들, 정치인들, 서울 시장, 길드 마스터들이 이어서 연설을 했다.
안 비서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자신이 속한 던전 연구회의 차례까지 남은 연설은 단 하나.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다음은! 대한민국의 선진화된 헌팅 디바이스를 개발하는 곳이죠! 협회 연구 재단의 조민근 이사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관중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안비서도 박수를 치며 기다렸다.
그런데.
"……음?"
다들 기다리고 있었지만 강단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침묵뿐인 홀에서 조금씩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협회 연구 재단은 올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몸살을 앓았습니다."
목소리는 강단이 아닌, 테이블 쪽에서 들렸다.
"협회장이 두 번 바뀌는 초유에 사태에 알케미아 논란까지 있었죠."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김유신!'
안 비서의 얼굴빛이 쑥색이 되었다.
"저는 그 사실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알케미아에 대한 논란을 해명하고자 나왔습니다."
웅성거리는 관중들의 목소리와 함께 유신은 강단으로 올라왔다.
"포션이 만들어지는 과정, 만들어지는 장소, 제조법과 포함성분, 이 모든 것이 공개되지 않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들이 불안해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지금 그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가장 먼저 여러분께 먼저 밝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유신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 김유신은 이계의 유적 '마탑' 을 보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