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14화
홍율이 다시 협회장 자리에 앉자, 한국은 빠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선 해외에서 가혹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세계 재앙 공략부'의 임남진과 전 집행부 요원들이 복귀했고, 남극기지에 있던 홍연에게도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세계 재앙 공략부는 폐지되었고, 임남진을 위시한 친 홍율 세력들이 집행부로 복귀하며 다시 권력을 잡게 됐다. 자연스럽게 아침마다 애국가 부르고 협회 이념을 외치는 이상한 절차들도 전부 사라졌다.
헌터계 전체로 보면, 프로스트가 펼친 정책들 대부분이 유명무실해졌다. 헌터들은 다시 의복의 자유를 되찾았고, 머리 길이니 치마 길이니 하는 외모 및 복식 규정들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도, 홍율은 프로스트가 기반을 닦아둔 이 프로세스들을 전부 휴지통에 버리지는 않았다. 이용할 건 이용했다.
특히 국민들이 지지하던 헌터들의 통제 방안 같은 것들은 약간의 변화를 주어서 적용시켰다.
본래라면 인권 훼손이니 자유 침해니 반발이 심했겠지만, 프로스트가 워낙 다 헤집어놓은 뒤라서 별 저항이 없었다.
오히려 '프로스트보다는 낫잖아?'하는 소리로 대거 넘어갈 수 있었다. 홍율은 이 혼란을 영리하게 잘 이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식들은, 비헌터계들이 다시 본래의 정책으로 돌아왔다는 것과, 내가 하와이에서 제안했던 마법 관리부가 신설된다는 소식, 그리고 '전력외' 정책이 완전히 철폐됐다는 소식이다.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도 풀린다.
프로스트가 다 뒤집어엎어 놓은 뒤라, 그동안은 엄두도 못 냈을 파격 정책들을 전부 펼칠 수 있게 됐다.
결론적으로 보면 프로스트는 홍율을 위해 명석만 깔아준 셈이 됐다.
-야, 너 진짜 안 할 거야?
스마트폰 스피커로 홍율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웃는 얼굴로, 하지만 냉정히 대답했다.
"네. 안 할 거예요."
-마법 관리부는 네가 제안한 부서잖아! 이걸 네가 안 하면 누가 하는데?
"그거 받아들이면 공직자 되는 거니까 제 사적인 비즈니스들이 전부 막히잖아요."
-야! 그런다고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장사 안 하냐? 명의만 지네 가족이나 친인척한테 맡기고 하는 거지! 너도 그렇게 해!
"저는 제가 직접 관리하고 싶어서요."
사실 대한민국 마법관리부의 수장이면 퍽 좋은 감투긴 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종적인 거처는 더 높은 곳이다.
-쯧, 알았어. 그럼 괜찮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 봐.
"마법사들의 복지를 위한 부서니까 누가 일해도 상관없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마법관리부선데, 마법사가 한 명 정도는 앉아야 그림이 좋을 거 아냐!
"……음, 알겠습니다. 한번 찾아 볼게요."
새로운 미션이 생겼다. 마법관리부에 들어갈 사람이라…… 누가 있으려나?
뭐, 저 자리에 내 사람을 앉혀둬서 연줄을 만들어놓으면 좋을 것 같긴 하다.
"아, 그러고 보니 홍연은요?"
-곧 돌아온 대. 벌써 거기서 적응했는지 지금 하고 있는 임무만 끝내고 온단다.
"……홍연답네요."
홍연은 워낙 사명감이 투철하고, 한번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그럴 만도 했다.
나는 협회장과의 통화를 마치고 노트북을 켰다.
"탑주. 오늘의 드링크입니다."
에아가 쟁반에 음료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깻잎 모히토는 아니지?"
"탑주가 주문한 더덕 뿌리 칵테일입니다."
"최고야!"
나는 얼른 쟁반 위의 음료를 가져와서 한 모금 마셨다. 한약재 맛이 알싸하게 퍼지는 게 훌륭하다.
"아저씨 입맛."
지나가던 진보라가 한마디 했다.
"건강 챙기는 거라고!"
그녀가 쿡쿡 웃으며 지나갔다. 나는 더 덕 뿌리 칵테일을 마시며 노트북 실황 영상에 접속했다.
이제 곧 프로스트의 재판이 열린다.
* * *
프로스트의 재판이 대법원에서 열렸다. 헌터 특수법에 의거한 중대군사재판이기 때문에 단심제. 즉, 한 번의 판결에서 모든 것이 갈린다.
각기 각층의 사람들이 재판장에 와 있는 가운데 피고인 프로스트가 재판장에 들어왔다.
엄숙해야 할 재판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했다.
프로스트도 그간의 고생이 얼굴에 보였다.
전 국민이 보는 단상에서 인상적인 연설을 하던 그 스마트하고 신사적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핼쑥해진 얼굴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뒤이어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재판관까지 자리하고 재판이 시작됐다.
검사가 프로스트의 혐의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대국가 반역행위, 살인, 뇌물, 언론 통제, 기업 유착, 특수협박죄, 채용법 위반까지.
프로스트는 대부분의 죄를 부인하거나 침묵했다. 특히 기업 유착이나 길드 유착 같은 유닉스와 관련된 문제에는 더더욱.
프로스트의 변호는 유닉스 그룹 차원에서 고용한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인단이 맡았다.
프로스트는 준비해 온 대로 차분히 검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좋아.'
프로스트는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법이란 정말 재미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니, 증거재판주의니, 진술 거부권이니, 행위시법 원칙이니, 엄격 해석 원칙이니, 괜히 법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다.
법의 맹점만 잘만 파고들면 있는 죄도 없게 만들 수 있는 게 법정이다.
물론 헌터 특수법이 얽힌 던전 범죄의 경우, 생존자의 진술이 강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홍율 건의 경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증거 불충분을 끌어내고 혐의를 지워가면서 국민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희망이 있다.
'홍율……'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한기가 오는 것 같다.
그 사람은 정말로 끔찍했다. 울고 불고 애원하고 회유하고 협박해도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짐승.
그날 밤, 자신은 그 짐승에게 물려 죽을 운명이었다.
-넌 좀 더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해.
하지만 그 짐승은 다르게 생각했다.
-내가 던전에 쭉 갇혀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네가 그렇게 지껄이던 시스템이 네 목을 조이는 기분이 어떨까? 한번 발버둥 쳐봐.
-물론 니가 뭔 발언을 하든 상관없어. 여의치 않으면 나도 협회장같은 건 다 때려치우고 널 찾아 갈거야. 네 사형을 부르짖는 국민들도 시원찮은 사법적 결말보다는 그런 결말을 원하겠지. 안 그래?
뼛속 깊이 새겨진 공포.
프로스트는 당장 소원을 하나 빌수 있다면, 다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에 빌었으리라.
그 일을 또 당할 바엔 당장에라도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몇 년간 구치소에 들어가 그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홍율과 관련된 건은 어쩔수 없다. 권력을 찬탈한 대국가 반역행위는 안고 간다.
하지만 이 자리는 유닉스를, 그리고 유닉스 내에서 자신이 살아남기위한 자리다.
시간을 끌고,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리면, 반등의 기회는 온다.
이 세상에 공인 2급 헌터를 사형시킬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검사가 진술하고 있는 중에 딴청을 피우자, 검사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피고인, 기업과 길드를 협박했다는 혐의도 부정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본 검사는 해당 사안에 대한 증인을 요청합니다."
판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증인? 대부분의 기록은 말소했다.
누가 감히 유닉스의 반기를 드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이곳에 오려고 하겠는가.
웅성 웅성 웅성.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프로스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핏기가 빠진 듯 하얗게 변했다.
'저, 저, 정서진……!'
다름 아닌 그의 남동생이 증인석에 와서 선서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이런 미친!"
격분한 프로스트가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X발 제정신이야? 가족이 재판받는데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쪽에 서? 얼마나 집안에 똥칠을 해야 정신 차릴 거냐!"
정서진이 빙그레 웃었다.
"저도 증인으로 소환되어온 겁니다. 시스템에 따라야 한다는 건 대표님이 늘 하던 말씀 아니었습니까. 가족과는 관계없이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죗값을 치르는 게 시스템이죠."
"너……!"
판사가 법봉을 치며 두 사람을 조용히 시켰다.
"증인. 증언하세요."
"예."
정서진이 증인석에 무수히 많은 서류 자료와 USB를 후두두둑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럼, 뭐부터 시작할까요?"
"정서지이이인……!"
프로스트가 이를 갈았다. 정서진은 제일 먼저 자신과 얽힌 증거품을 재생시켰다.
[우리 좋게 좋게 생각하자 동생아. 이미 너랑 얽힌 것만으로도 김유신의 결말은 배드엔딩으로 확정이야. 너희가 살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뿐. 포션 능력자와 레시피를 넘겨. 그리고 너희 둘 다 유닉스 소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러면 개로 먹고살게는 해줄게. 먹이도 꼬박꼬박 잘 챙겨주고, 가끔 산책도 시켜주고, 기분이 좋아 지면 포상도 내리고. 사실 누구나 그런 삶을 바라잖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집 개가 되어보려고 온 한국 사람들이 스펙 전쟁을 펼치는…….]
웅성 웅성!
사람들의 노골적으로 분개하는 시선이 프로스트에게 꽂힌다.
치명적이다. 이건 죄가 어쩌고 혐의 어쩌고 하기 이전에, 국민 정서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야기였다.
프로스트는 멘탈이 박살났다.
이럴 리가 없다. 이게 어떻게 나올수 있지? 면담 전에는 안 비서가 녹음 기기가 있는지 당연히 확인했을 터였다.
"이런 게 바로 피고인의 수법입니다."
정서진이 무수히 많은 자료들을 펼치며 말했다.
블랙 가드와 NIX에 대한 협박, 가람 매니지먼트에 대한 협박, 러시아측에 대한 정보조작 권유, 그리고 Top10 길드에 대한 서류와 정보까지.
"상습적이고 악의적입니다. 지극히 불량하죠."
그가 고개를 돌려 검사를 바라보았다.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판사에게 말했다.
"이 모든 자료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가져와 보세요."
정서진의 변호사가 본 심사에는 관련이 없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얼굴이 시뻘게진 판사에 의해 묵살당했다. 판사는 안경을 쓰고 직접 서류들을 검토했다.
잠시 후 판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피고인. 협박죄가 없다고 스스로 진술했었지요."
"그, 그건……"
"법정을 우롱하는 심각한 양형 가중요소입니다."
프로스트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정서진은 처음부터 상황을 뒤집을 반전 요소는 준비하지 않았다. 그건 유신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유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프로스트가 법정에 갔을 때를 대비해서 자료를 모아왔다.
유닉스는 원한다면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여기 있는 참관인까지도 바꿀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래 왔다.
하지만 현재 프로스트의 뇌물건까지 묶여 있고 전 국민이 그의 처벌을 바라고 있다. 검찰에서도 이번 만큼은 유닉스의 제안을 받지 못한다.
정서진의 자료는 이미 검사에게도 전해진 뒤였다. 멘탈이 가루가 된 프로스트를 검사가 가뿐히 요리했다.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특정 범죄 가중 처벌, 죄질 불량, 법정 우롱, 반성의 기미 없음, 사회로부터의 영구적인 격리 필요 등등 여러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프로스트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고 마침내 판사의 입에서 형량이 흘러나왔다.
"피고인을 법정 최고형, 사형에 처한다."
장내가 폭발적으로 술렁거렸다.
전 협회장의 사형 집행.
올해 대한민국 최고 이슈로 등극했다.
* * *
"사형은 안 되겠죠."
재판이 끝나고 정서진과 만났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기껏해야 종신형이 최고입니다. 공인 2급 헌터라는 국가급 자원을 처형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유닉스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테고요."
"그래?"
"예."
정서진은 무척이나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진짜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괜한 짓 한 거 아니야? 그래도 가족이잖아."
"가족……"
정서진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구성원의 모든 것을 빼앗고, 통제하고, 말려 죽이고, 핍박하는 인간들이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이라 칭할 수 있다면, 그렇겠네요."
"……."
정서진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이를 갈고 한을 품어왔을지, 나로서는 헤아릴 방법이 없다.
"그런데 네 형제들이 왜 그렇게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그냥 그룹 내 경쟁자라는 이유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무엇보다."
정서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고 돌아가셨습니다."
"아……"
"집안에서는 아이를 포기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거절했죠. 결국 저를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집안에서 미운털 박히고, 문제아 딱지를 달고 다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기일만 되면 누나들이 절 못살게 굴었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말문이 턱 막힌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정서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이제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진짜 가족은 이쪽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