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09화
유신은 블랙잭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는 프로스트 추격을 재개했다.
비상용 엘리베이터로 고층으로 이동 후, 계단을 타고 옥상 테라스까지 올라왔다.
문을 열자 탁 트인 실외가 펼쳐졌다. 옥상은 공원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곳곳에 선글라스를 쓴 경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생 많으십니다."
유신이 손을 흔들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려 했지만.
"대, 대마도사다!"
"막아!"
경비들은 바로 유신을 알아보았고 즉각 총알이 빗발쳤다.
유신은 한숨을 쉬며 전면에 쉴드를 펼치고는 말했다.
"시간 없어. 빨리 쓸어버리고 가자."
-네, 탑주.
곧바로 유신의 등 뒤에서 반격의 레피드 에로우들이 태세를 갖춘다.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가는 황금 화살에, 경비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숨거나 도망치기 바쁘다.
유신은 시전 상태를 유지하며 빗발치는 총알과 화살 사이를 저벅저벅 걸었다.
'헌터는 없나?'
이런 마지막 층 경비도 일반 경호원들이라니, 알만 했다.
대다수는 홍율을 막으러 갔을 것이다.
"우오오오!"
퍽!
진압봉을 쥐고 달려드는 경비를, 보지도 않고 팔을 휘둘러 얼굴을 으깬 유신은 빠른 걸음으로 테라스를 걸었다.
'헬기?'
옥상 끝에 마련된 헬기장에 마력헬기가 보인다.
딱 봐도 최신형의 마력헬기인지, 중무장에 프로펠러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그곳에 프로스트가 올라타고 있었다.
"프로스트!"
유신이 소리쳤다.
"협회장이란 놈이 3급 한 명 한테 쫄아서 내빼냐? 한판 붙어!"
프로스트는 표정을 굳힐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헬기 운전사에게 출발하라는 지시만 반복해서 내릴뿐이었다.
'쩝, 역시 도발이 통하는 타입이 아니야. 어떻게 붙잡지?'
-헬기 모델 검색 완료.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계의 금속이 섞인 신소재 장갑이라 2공정이나 6공정으로는 뚫기 힘듭니다. 최소한 4공정 프로메테우스를 맞춰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알겠어. 4공정으로 준비하자.'
쩌적! 쩌저저적!
유신이 마법을 준비하려는 그때, 옥상의 바닥이 무서운 속도로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유신은 마력을 거두고 웃었다.
"오셨군."
뒤이어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콘크리트 바닥을 통째로 뜯어내며 나타났다.
"꺄하하하하!"
온몸을 적의 피로 적신 홍율이 요란하게 웃으며 주먹을 당겼다.
"어딜 내빼?"
그녀가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 충격파만으로 장갑 무장 헬기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휘말리더니 테라스 바닥에 처박혔다.
쿠쿠쿠쿠쿵!
수십 미터를 미끄러져 내려가던 헬기가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걸친 채로 멈췄다.
"크윽!"
잠시 후, 프로스트가 헬기 문을 박살 내고 기어 나왔다. 이마에서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안뇽."
협회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왼손엔 누군가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선물이야."
그녀가 그 사람을 휙 던졌다. 바닥을 구르며 프로스트의 발 앞에서 멈춘 건 피범벅이 된 뇌제 한전우였다.
"이런 걸로 내 발목을 잡으려 했어? 사람 너무 얕보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러운데."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은 그녀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스트의 어깨가 공포로 떨렸다.
"…… 역시 살아 계셨습니까."
"그래. 동굴에 깔렸을 때는 그냥 이대로 죽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도저히 빡쳐서 안 되겠더라."
그녀가 살벌하게 손가락 관절을 풀었다.
"적어도 널 쥐포가 될 때까지 패놓고 죽자. 그렇게 다짐했어."
"……대체 어떻게 던전에서 빠져나온 겁니까."
"우리 예쁜 내 새끼 덕분이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유신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유신은 옅은 미소를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프로스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어떻게든 러시아에서 치웠어야 했다.
"자, 자, 잡설은 여기까지."
홍율이 손뼉을 짝짝 치며 프로스트를 보았다.
"이제 내가 겪은 고통을 돌려 줄 차례야. 이자는 좀 셀 것 같은데, 준비됐지?"
"죄송하지만."
프로스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사양하겠습니다."
빠득빠득-
무언가 균열이 이는 소리가 들려 홍율이 고개를 돌렸다.
얼음에 갇혀 얼굴만 불쑥 내민 민간인들이 보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엄마, 엄마아!"
아이들과 부모, 교복 입은 고등학생 몇 명도 보인다. 다들 테라스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프로스트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한 것 같다.
"막 나가네."
홍율이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협회장 나으리. 자꾸 그렇게 선 넘을 거야?"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게 뭔 상관입니까."
프로스트는 그렇게 말하곤 팔을 휘둘렀다.
얼음에 갇힌 시민들의 몸이 그대로 테라스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훕!"
그가 한 번 더 능력을 사용했다.
떨어져 내리는 민간인들에게 얼음으로 이루어진 무수한 고드름을 일으켜 쏟아내고는, 자신은 옆 건물로 얼음 다리를 만들어 도망쳤다.
'저 새끼 미쳤네 진짜.'
유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협회장이란 사람이 민간인을 내던 지고 확인 사살까지 하다니. 막 나가도 너무 막 나간다.
덥석!
"응?"
갑자기 멱살이 붙잡혔다.
"김유신 간다아아아아!"
"자, 잠깐……!"
부우웅!
홍율이 유신의 멱살을 붙잡고 냅다 프로스트가 도망치는 쪽으로 내던졌다. 유신의 몸이 대포알처럼 날아갔다.
"금방 갈 테니까 저놈 붙잡아 둬!"
"협회장님!"
홍율은 다이빙하듯 그대로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붉은 마력에 휩싸인 그녀의 몸이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며 얼음 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
그녀가 다시 비행 속도를 낮추었다. 떨어지는 민간인들을 등지고, 얼음 파편을 정면으로 응시한 홍율이 씩 웃었다.
"하앗!"
그녀의 주먹이 무수히 갈라지며 고드름들을 가루가 되도록 깨부수기 시작했다.
"……하하."
그리고 멀리서 데바의 눈으로 그 모습을 본 유신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답다. 막무가내니, 또라이니, 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그녀에 대한 소문들.
하지만 개인적인 복수보다 인명을 우선시할 정도로, 한 사람의 헌터로는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알면 알수록 새롭다니까.'
대영웅, 공인 1급, 무적의 헌터.
뭐 그런 것들을 떠나서 홍율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
건물에 내려온 유신은 즉시 아래층으로 도망치는 프로스트를 뒤쫓았다.
* * *
"꺄아아아아악!"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냥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커피 한잔 마시러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고 응원하던 프로스트에게 붙잡혔고, 대뜸 옥상에서 내던져졌다.
이제 바닥이 보인다. 그녀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후우우우우웅!
'살려줘어어!'
점점 가까워지던 바닥이 바로 코앞까지 보이는 순간, 그녀는 몸을 강하게 꽉 붙드는 손길을 느꼈다.
어느새 떨어지는 여섯 명을 모두 잡아챈 홍율이 이를 악물고 두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투웅!
그리고는 지상에 도달하자, 거짓말처럼 속도가 제로가 되며 아무런 충격도 없이 지상에 안착했다.
"다친 사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틀림없다. 붉은 머리의 헌터.
대한민국의 자랑이었지만 재앙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고 알려진 바로 그 홍율이었다.
'사, 살았다.'
그제야 안도감이 물밀 듯이 밀려 들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아!"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홍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 저기 홍율이 있다!"
"정말 이야!"
소문을 듣고 연회장밖에 몰려와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와 홍율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던전에서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민간인들을 구해냈다.
이건 빅뉴스였다.
"비켜라."
물론 기자들뿐만 아니라 헌터들도 다가왔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 헌터, 협회 소속의 공준혁이 인파들을 뚫고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혁이 아저씨."
홍율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공준혁은 한가하게 인사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프로스트 협회장은 자네를 마인이라고 발표했어. 지금은 최고 비상사태까지 떨어졌지. 미안하지만 우리랑 같이 가줘야겠다."
홍율이 웃으며 대답하려는 그때.
"아니에요!"
아이 엄마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궁지에 빠진 프로스트가 우릴 빌딩 밖으로 던졌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릴 구해줬다고요!"
"내 생명의 은인한테 무슨 소리야!"
"마인은 프로스트겠지!"
그녀에게 구해진 사람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소리쳤다. 기자들은 웅성거리며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어쩔래? 혁이 아저씨."
홍율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
공준혁은 말없이 귀에 낀 이어마이크를 벗어 던졌다.
당장 홍율을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프로스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명령을 무시한 채 이어마이크를 발로 밟아 부쉈다.
"가라."
"땡큐. 설명은 나중에 할게."
홍율의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하늘을 날아갔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달려가 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 * *
콰드드드드득!
얼음으로 이루어진 용이 아가리를 벌리며 들이닥쳤다. 유신은 바닥에 빙판을 깔고 슬라이딩하듯 빠져나왔다.
이어서 파이어 캐논을 연달아 머리에 꽂아 넣자, 아가리가 녹아내리며 얼음 용의 움직임이 멈췄다.
"새끼, 명색이 공인 2급이면서 엄청 조심하네."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은 비상사태가 닥칠 시 발휘되는 자신감과 호전성의 근원이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자신보다 훨씬 약한 경비원들이나 5급, 4급 헌터들의 보호를 받으며 철저히 도망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확실히 보통의 헌터들과는 사고방식이 틀리다.
-탑주. 프로스트가 아래층에 있습니다.
'오케이.'
에아의 말을 따라, 유신은 바로 천장을 부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추웠다. 사방에 서리가 껴있고, 그의 앞을 얼음벽이 가로막고 있다.
'같잖은 짓 하긴.'
유신은 화염계 마법을 난사해서 얼음벽을 녹이며 전진했다.
그렇게 벽을 몇 개쯤 더 부수고 들어가자 드디어 프로스트를 발견했다. 그는 한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프로스트!"
유신이 데바스타를 켜기 무섭게 프로스트의 몸이 사라졌다. 텔레포트였다.
"사미아!"
유신이 외치자, 허공에 워프가 열리며 사미아가 뛰쳐 내려왔다.
"무사했구나, 김유신 헌터! 정말 다행이다."
"오랜만이네요! 회포는 좀 이따 풀고, 아까 그놈 쫓아갈 수 있겠어요?"
"문제없다."
같은 텔레포트 능력자끼리는 추적이 가능하다.
그녀는 마나를 끌어올려 프로스트가 사라진 곳을 꼼꼼히 살피다가 말했다.
"좌표를 확보했다. 장거리 텔레포트 능력자로군. 연달아 능력을 사용하진 못하는 타입으로 보인다. 당장 그쪽으로 이동할 워프를 만들겠다."
"네, 부탁합니다!"
그녀가 빠르게 워프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신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블루 엘릭서 한 병을 입으로 들이켰다.
이제 마지막 결전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