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207화
"여러분! 틀림없이 대한민국은 바뀌고 있습니다!"
많은 취재진과 앞에서 프로스트는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첫째도 프로세스. 둘째도 프로세스입니다! 지금의 헌터 정책과 육성시스템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낡고 케케묵은 폐단을 타파하고, 새롭게 개혁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번 임기 제 목적은 프로세스의 완성입니다! 이 다음 협회장이 누가 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프로스트의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가 좌중을 휘어잡았다. 몇몇 사람들은 프로스트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국민 여러분! 안방에 편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불안한 가슴을 졸이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재앙은 시간이 갈수록 더 위협적으로 변합니다! 우리도 발전해야 삽니다! 건강한 대한민국,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제가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역시 이 사람은 믿음이 간다!]
[응원해요 프로스트!]
인터넷 중계 댓글에서도 호평 일색이었다.
프로스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관중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연설이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프로스트는 막힘 없이 척척 대답해 나갔다.
사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기자들은 오로지친 유닉스 성향의 기자 들뿐이었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서 허구한 날 기자들과 싸우고 욕하던 전 협회장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 다음 질문은……"
수 많은 기자들이 손을 들고 있는 가운데, 협회장은 가장 앞에 보이는 기자를 지목했다.
"이분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기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협회장님은 무엇보다 육성 프로세스를 강조하셨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제2의 홍율이 탄생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황을 보면, 비전투계 능력자들은 협회장님의 계획에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많은 비전투계 능력자들이 이에 불만을 토로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찰나의 순간이지만 싸늘한 눈으로 기자를 노려보던 프로스트가 이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외되어 있다니 그럴 리가요. 당연히 비전투계 능력자들도 대한민국의 중요한 전력입니다. 아직 프로세스가 구축 단계라서 그런 소외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안심하십시오! 곧 비전투계에 맞는 육성 시스템을……."
"그 비전투계에 맞는 육성 시스템이란 게, 던전 출장 기회를 줄이고, 던전 절차를 어렵게 하는 그런 것들 말입니까? 대체 뭐가 비전투계에 맞는 시스템이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비전투계는 계속 트레이닝 센터만 다니란 말씀입니까?"
프로스트가 짜증스럽게 손짓하자 질문하던 기자의 마이크가 꺼졌다.
'누가 저딴 쓰레기 기자를 통과시킨 거야?'
프로스트는 속으로 욕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하하! 언제나 이런 가짜뉴스가 판치는 게 문제네요. 통계청을 보면 아시겠지만 비전투계 능력자들의 정책 만족도는 60%가 넘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저기 가장 빨리 손드신 분."
프로스트의 지목을 받은 기자가 놀라서 자신을 가리키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저요? 저 맞죠? 하하하! 감사합니다! 팔 떨어지는 줄 알았네요."
기자의 넉살에 주위에서 작은 웃음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협회장님의 대규모 헌터 통제 정책에 많은 국민분들이 안심하고 있습니다. 평소의 위협적이고 거만한 헌터들의 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입니까?"
"아하하! 그 부분을 언급해 주셔서 고맙네요. 제 의도는……"
프로스트가 준비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기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설명을 듣다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군인처럼 복무 신조를 달달 외우게 한다거나, 헌터마다 다른 개성을 고려 하지 않고 복장을 통일시킨 다거나, 이미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헌터들을 굳이 불러서 트레이닝을 빙자한 군기 교육대에서 굴리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좀 과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로스트의 표정이 굳어지고 관중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군기 교육대라니,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헌터 체계에서 이루어지는 트레이닝의 빈틈을 보완하기 위한……"
"이미 각 길드에서 헌터 개인에 맞춘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도입하고 있는데, 굳이 새로운 훈련을 시키려 하는 저의가 궁금합니다. 정확히 어떤 빈틈을 보완한다는 거죠?"
프로스트가 짜증스럽게 손짓 했다.
질문한 기자의 마이크가 꺼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집행부 요원들이 기자의 두 팔을 붙잡았다. 앞서 질문한 기자는 벌써 끌려가고 있었다.
"이미 길드마스터들과 합의된 사안입니다. 길드의 힘만으로 완벽한 트레이닝이 가능했다면 대한민국 모든 헌터들이 전부 3급 이상이었겠죠. 안 그렇습니까? 질문은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프로스트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번 행사의 마무리 연설이 시작되며, 소란스럽던 관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처음에 저는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1위 길드의 마스터로서 만족했죠. 하지만 절 이 길로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전 협회장 홍율님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분의 마지막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레귤러 몬스터에게 뛰어들기 직전, 그분은 제 눈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뒤는 네게 맡긴다'라고……"
그때였다.
"난 그딴 소리 한 적 없는데?"
모두의 귓가에 꽂히듯 명확히 들리는 한 목소리.
순간 연설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프로스트의 연설도 멈췄다.
"……지금 뭐라고?"
"난 그런 X 같은 소리 한 적 없다고. 새끼야."
그 말과 함께 강단 위의 펼쳐져 있던 '물의 장막'이 철퍽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 안에서 나타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의 모습에 프로스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드러났다.
"어, 어어?"
"잠깐, 저 사람!"
연회장에 있는 모든 관중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모두가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인물이 당당히 강단에 나타났다.
"……호, 호, 홍율!"
"틀림없어! 홍율 협회장이야!"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군중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프로스트는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말도 안돼……"
프로스트를 본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팔을 들었다.
"안뇽
"……!"
프로스트는 온몸에서 소름이 끼치며 전신이 뇌의 통제를 벗어나 떨리는 것을 느꼈다.
뒤통수에서는 식은 땀이 수도꼭지에서 쏟아졌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왜, 그 모터처럼 잘 놀아가던 혓바닥도 중요할 땐 안 돌아가나 봐?"
프로스트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노력하며 쌓아왔던 그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그럴 순 없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가짜다! 저건 가짜야!"
프로스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당장 놈을 끌어내!"
"킥!"
홍율이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강단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우람한 덩치의 헌터 둘이 뛰어들어 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물러서라!"
헌터가 위압적으로 소리치며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홍율의 눈썹이 꿈틀했다.
"빨리 죽여! 저 가짜를 내 눈앞에서 지워 버리란 말이다!"
프로스트가 꽥 소리 질렀다.
홍율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가짜로 보여?"
"당연히 가짜지! 이 쓰레기 같은 마인!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감히 '대영웅'을 사칭하다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프로스트의 말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현재 임모탈 재앙의 던전은 전 세계 모두 닫혔다. 상식적으로 그녀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진짜 마인이야?"
"좀 다르게 생기긴 했는데."
"홍율이란 걸 증명해!"
관중에서 쏟아져 나오는 요구에 홍율은 같잖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내가 왜?"
그녀의 몸에서 붉은 마력이 피어나온다.
"끄, 끄아아아아아악!"
홍율의 어깨를 짚고 있던 헌터의 손이 믹서기에 갈린 고기조각처럼 떨어졌다.
헌터가 무릎을 꿇으며 곤죽이 된손을 달달 떨었다.
"큭!"
또 다른 경비가 뒤로 물러나며 품에서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알이 슬로우모션처럼 날아간다.
그러나 그녀를 중심으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마력한 자락에 닿자, 총알이 사락 하고 버터처럼 갈라져 바닥에 떨어진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헌터는 입을 벌리며 총을 떨어뜨렸다.
"……적광기!"
"틀림없어! 틀림없이 홍율 협회장이야!"
난리가 났다.
얼굴이 시뻘게진 기자들이 서로를 밀치며 강단 앞까지 뛰어들어 왔다.
"다들 멈춰!"
집행부들이 나섰지만 통제가 불가능했다. 모두가 앞다투어 강단 위의 홍율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증명은 뭔 증명?"
그녀가 냉소하며 기자들을 보았다.
"또 카메라 앞에서 구구절절 사연팔이 해보라고? X까라 그래. 니들이 날 마인으로 몰아가든 말든 난 아무 상관 없어. 근데 말이야."
그녀의 입꼬리가 악귀처럼 길게 찢어졌다.
"니들이 날 감당할 수는 있고?"
기자들이 몸을 떨었다. 적광기보다도 확실한 홍율 특유의 위압감.
정말로 대한민국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이상할게 없는 최강의 헌터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프로스트의 표정은 더 없이 굳어져 있었다.
"방송 끊고 마이크 전원 다 꺼! 빨리!"
"예, 옛!"
"서둘러! 서두르라고! 망하아아알!"
프로스트는 부하들을 재촉하고는 이를 악물고 기자들 쪽을 보았다.
"협회장님! 저희는 진실이 알고 싶을 뿐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소리냐. 협회장은 나다. 바로나 프로스트다.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협회장님!"
아우성치는 기자들을 향해 홍율은 마지못해 툭 내뱉었다.
"진실? 니들이 저런 쓰레기 하나에 놀아났다는 게 진실이지."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이크와 방송이 꺼졌다.
카메라에 파직! 하고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기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카메라를 떨어뜨렸다.
"뇌제 한전우다!"
유닉스의 공인 2급 헌터가 팔을 뻗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도 카메라에서 튄 그 전류가 파직거리고 있었다.
프로스트가 소리쳤다.
"이봐! 당장 저 가짜를 흔적도 남기지 말고 죽여!"
"예!"
새로운 유닉스의 길드 마스터 한전우를 필두로 유닉스의 헌터들이 강단에 올라왔다.
프로스트는 경비들과 함께 후퇴하며 무전기를 들고 소리쳤다.
"여기는 협회장! 빠져나가는 기자들 다 틀어막아. 당장 카메라고 휴대폰이고 다 빼앗아서 억류시켜! 반항하면 본보기로 몇 명 죽여도 좋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야, 정하진."
뚜렷이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에, 프로스트는 움찔하며 본능적인 반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전우와 유닉스의 헌터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홍율의 황금빛 눈동자는 너무나 눈에 잘 띄었다.
"나랑 놀아야지, 어디가?"
악마가 돌아왔다.